[서성록, 한 점의 그림] 성탄을 바라보는 렘브란트의 시선
<목동들에게 나타난 천사>
메시아 오신 순간 감격적으로 재현한 판화
렘브란트의 <목동들에게 나타난 천사>(1640-42)는 이 땅에 메시아가 오신 순간을 감격적으로 재현한다. 누가복음 2장 8-14절을 묘사한 판화작품으로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는 천사, 그리고 이 소식을 접한 목동들의 반응을 각각 담고 있다.
화면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상단 좌측에는 왼손을 치켜든 천사의 모습이 보이고, 하단 우측에는 돌연한 천사의 방문으로 인해 놀란 목동들과 양떼, 그리고 송아지들이 혼비백산 달아나는 장면이 보인다.
이 작품은 뜻밖에도 가로 21센티미터, 세로 26센티미터에 불과한 소품이다. 소품에 불과하지만, 내용과 형식이 뛰어난 작품이다.
목동들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추적해 보자. 그들은 하루를 마무리했다는 안도감을 품으며 막 잠자리에 들려 했을 것이다. 하루의 피로가 물밀 듯 밀려오고 잠이 쏟아진다.
그런데 갑자기 그들 곁에 무언가 출현하였다. 한밤중에 하늘이 대낮처럼 밝아지면서 광명한 빛 가운데서 천사가 나타난 것이다. 화면을 보면 목동들의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놀란 건 목동들만이 아니다. 짐승들도 갈피를 못 잡고 있다.
예수님이 오실 때, 그 분은 신분이 높거나 명망이 있는 사람들에게 소식을 전하지 않으셨다. 그 분은 먼저 가난하고 마음이 상하고 깨진 사람들에게 이 중요한 사실을 알리셨다.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사 61:1).
그런 이유 때문인지, 렘브란트는 종교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하기보다는 목동들의 경배를 더 선호하였다.
예수님이 오실 당시 목동들은 유대 계층 중에서도 가장 낮은 부류에 속했는데, 그 이유는 하루도 쉬지 않고 일주일 내내 양을 치는 힘겨운 노동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반복되는 고된 노동으로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지키기 어려웠다고 한다. 실제로 목동들은 모세의 율법 위에다 바리새인들이 까다롭게 제정해 놓은 규칙들을 제대로 준수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한 율법주의는 일반 유대인들에게 굴레를 씌웠을 뿐 아니라, 이런 규칙들로 인해 목동들은 졸지에 율법을 어기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런 그들에게 천사가 나타나 ‘큰 기쁨의 좋은 소식’(눅 2:10)을 알려주었다는 것은 메시아가 사람들을 자유케 하려고 오셨다는 것을 말해준다.
<아기 예수께 경배하는 목동들>
화면 모든 것 아기 예수께 모아지도록 설정
메시아의 오심을 줄거리로 하는 <아기 예수께 경배하는 목동들>(1646)은 천사를 만난 목동들이 구유에 와서 예수님에게 경배하는 장면(눅 2:1-20)을 담은 작품이다.
이야기의 흐름은 천사의 출현 장면에서 아기 예수를 경배하는 목동들의 장면으로 바뀌고 있다. <목동들에게 나타난 천사>와 <아기 예수께 경배하는 목동들>은 모두 빛과 그림자의 대비 효과가 두드러진 야경으로 되어 있으나, 후자의 경우 아기 예수를 경배하는 목동들 외에도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강아지와 함께 있는 소년 등을 포함시켜 훈훈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화면에서 예수님은 구유에 누워 곤히 잠자고 그 옆을 마리아와 요셉이 지키고 있으며, 그 앞에 목동 한 사람이 나아와 무릎을 꿇고 손을 모아 기도한다. 아울러 화면 우편에 지팡이를 들고 경배하는 목동, 그리고 호롱불을 왼손에 들고 오른손을 들어 감격해하는 목동이 눈에 들어온다.
또 화면 오른편에 양치기 개와 소년의 모습, 그리고 마주보고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는 여인들도 그림의 분위기를 한층 생동감 있게 만든다.
렘브란트는 기쁜 소식을 듣고 모인 사람들이 “하나님이 너희 조상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희 씨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행 3:25)는 은혜의 증인들임을 상기시킨다.
화면의 모든 것은 아기 예수께 모아지도록 설정되었으며, ‘세상의 빛’으로 오신 아기 예수를 맞이하는 목동들의 기쁨을 잔잔히 그려내고 있다. 조촐하지만 진실되고, 소박하지만 거룩하고, 화려하진 않지만 진정한 예배가 드려지고 있다.
들판의 목동들은 베들레헴 마굿간까지 달려와 메시아를 영접하고 있다. 그들의 목소리는 떨렸을 것이며 감정이 매우 고조된 상태였을 것이다.
목동들은 천사에게 ‘들은 것’으로 인하여, 또 구유에 있는 아기를 ‘본’ 사실로 인하여, 그리고 자기들이 듣던 바대로 아기가 강보에 싸여 있음을 ‘안’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찬송을 드리고 있다. 그들 인생 최대 사건, 그러니까 그리스도가 오신 사건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흔히 성탄을 ‘성육신의 축제’라고 부른다. 그 분은 우리와 함께 거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칼뱅(John Calvin)이 지적한 대로 “하나님의 엄위는 육체로 오신 것으로 인해 감소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육체로의 낮은 차원 아래 감추어진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오히려 그 영광을 볼 수 있게 만들었다.”
이러한 성육신의 시각은 예수님을 슈퍼맨이나 스타가 아닌 온유하고 선하신 분으로 묘사하게 된 배경이 된다. 프로테스탄트 화가들에게 르네상스 미술에서 보이는 우아함이나 화려함은 미적 기준이 되지 못했다.
그들에게 아름다움의 기준은 사랑의 크기와 진실성에 의해 결정되었다. 프로테스탄트의 이런 적정률(Protestant decorum)은 렘브란트의 회화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난 특징이기도 한데, 렘브란트의 그림에 나타난 예수님은 자신을 희생시켜 우리의 죄와 허물을 덮어주신 분, 그 결과 우리의 몸과 영혼이 영원히 아름다운 것으로 옷 입게 해주신 분으로 인식되었다.
렘브란트의 그림은 예수님으로부터 빛이 흘러나오는 모습으로 표현한다. 이것은 단순히 그림의 주인공이 예수님이란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성육신하신 예수님이 세상의 어두운 밤을 밝혀주신다는 내용을 함축한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으로 인해 세상이 회복된다는 교훈을 얻게 된다. 리처드 마우(Richard Mouw)는 요한복음 3장 17절을 언급하면서 “하나님께서 원래의 창조질서(cosmos) 속으로 아들을 보내신 것은 원래의 창조질서(cosmos)를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아들을 통해 원래의 창조질서(cosmos)가 구원을 얻게 할 수 있도록 하시려는 것이다”(Richard Mouw, Abraham Kuyper ; A Short and Personal Introduction)고 해석하였다.
예수님은 인간의 구원만이 아니라 타락이 만연한 창조세계를 바로잡기 위해, 그리고 본래의 의도하신 창조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곧 우주 만물을 구하시기 위해 오셨다.
성육신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함께 세상에 대한 긍정을,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세상을 변혁해가야 하는 우리의 문화적 책임에 대해 말해준다.
요컨대 예수님은 타락의 저주 아래 신음하는 세상에 유일한 희망이 되는 셈이다. 이 그림에서 나타나는 형형한 빛은 초월자라는 의미보다는 망가진 세상을 바로잡으시는 변혁자로서의 성격이 더 강하다.
서성록 교수
안동대 미술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