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새해 전망] 덴버신학대학원 정성욱 교수 (中)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복음주의 신학자’ 덴버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 정성욱 박사와의 인터뷰 2편을 연재한다. 전편에서 정성욱 교수는 코로나19 당시 교회들이 창조적인 해결책을 찾기 위해 노력하면서 생동력을 회복했으며, 피치 못한 비대면 예배 상황으로 교회론과 예배론에 대한 많은 논의와 논쟁이 있었으나 양쪽 입장이 모두 일리 있으며 서로 입장을 존중하면서 공존을 추구해야 함을 강조했다.
이번 편에서는 구원론과 관련된 각종 신학적 문제들을 중심으로 논의를 펼쳤고,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성경적 종말론에 대해 설명했다. 이와 함께 지난해 있었던 ‘그리스도의 능동적/수동적 순종’ 관련 논쟁에 대해서도 평가했다. 다음은 정성욱 교수와의 서면 인터뷰 두 번째 내용.
율법주의와 방종주의 구원론 두 극단 한국교회 지배
선행은 구원받음 열매, 결과, 증거, 목적 진리 회복을
구원파 깨달음 구원론 비성경적, 하나님 갈망이 징표
-조직신학자로서 한국교회 구원론의 문제점을 자주 지적하셨습니다. 어린이들도 쉽게 알 수 있도록 성경적 구원론을 비롯해 구원의 ‘서정’, 칭의와 성화에 대해 설명해 주신다면.
“한국교회를 지배하고 있는 한 극단은 ‘율법주의 구원론’입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 율법이나 교회 전통이 요구한 특정한 종교적 행위들을 실천해야 한다는 주장이죠. 예를 들어 주일성수, 십일조, 새벽기도, 주초금지 등을 잘 실행해야 구원을 얻는다는 주장입니다. 물론 전혀 비성경적인 생각입니다.
또 다른 극단은 방종주의입니다. 오직 믿음과 은혜로 구원을 받았기에, 그 이후 우리가 힘쓰고 애써야 할 것은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아도 괜찮다는 주장입니다. 예를 들어 입술로는 신자라고 주장하지만, 삶의 모습은 세상 사람들과 똑같거나 심지어 세상 사람들보다 못한 신자들이 늘어나고 있는 현실이 방종주의의 결과입니다. 방종주의 역시 결코 성경적이지 않지요.
그렇다면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구원론은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요? 첫째,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은 자기 자신의 힘으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롬 3:9-18). 둘째, 자신의 죄와 죄된 삶을 철저히 회개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함으로 구원을 선물로 받습니다(요 1:12).
셋째,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이 확정된 자들은(엡 2:8-9) 새로운 피조물로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자라나야 하며(엡 4:13-16), 하나님이 예비하신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하나님의 자녀와 백성으로 살아가야 합니다(엡 2:10; 딛 2:14).
결국 선행은 구원받음의 조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도리어 선행은 구원받음의 열매, 결과, 증거, 목적이라는 진리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구원의 ‘서정’과 관련해 우리는 구원의 즉각성·점진성·최종성을 인식해야 합니다. 구원의 즉각성이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을 때 즉각적으로, 영단번에 일어나는 사건들과 관련됩니다. 죄사함, 칭의, 화해, 거듭남, 성령의 내주와 인치심,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결혼, 하나님의 자녀됨, 참자유를 얻음, 영생을 얻음, 하나님의 상속자가 됨과 같은 사건들이 구원이 확정될 때 즉각적으로 일어납니다.
구원의 점진성이란 구원이 확정된 성도들이 영적으로 자라나는 성화, 영적 성장 과정에서 누리는 주님과의 동행, 그리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견인과 관련됩니다.
마지막으로 최종성이란 우리가 죽을 때 경험하는 영혼의 영화, 주님 재림 때 경험하는 몸의 부활과 영화, 그리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상급과 관련되지요.
구원의 즉각성, 점진성, 최종성을 균형있게 가르치고 강조하는 것이 복음적인 구원론의 핵심입니다.”
-일부 이단들이 ‘몇 시 몇 분에 구원받았느냐? 구원받았다는 증거가 있느냐?’고 물으면, 우리는 뭐라고 답해야 할까요. 우리에게 구원의 ‘징표’가 있다면, 더 이상 의심하지 않으리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렇습니다. 소위 ‘구원파’라 불리는 집단은 우리가 몇 년, 몇 월, 몇 시, 몇 분에 구원을 받았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만일 모른다면 그것은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전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그들의 구원관은 그리스도의 피가 영단번에 모든 죄를 덮는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구원을 받는다는 ‘깨달음 구원론’이지요. 이러한 생각 역시 전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성경은 죄인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함으로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맺어질 때, 구원이 확정된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구원은 인격적인 사건이지, 단순히 지적인 깨달음의 사건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참되게 구원받은 증거나 ‘징표’는 무엇일까요? 구원받음의 증거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고 싶다는 갈망이 생기게 되는 점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사모하게 되고, 더 기도하게 되지요. 또한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의 갈망이 강해지는 것이고, 그러한 삶이 깊어지게 됩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죄와 불결함에 대한 인식이 더 깊어지고, 혐오감이 강해지며, 따라서 더 진지하고 철저한 회개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징표에 대해 가장 탁월한 저작을 남긴 사람이 바로 조나단 에드워즈 입니다. 그의 <신앙감정론>은 참된 신자에게서 나타나는 표지에 대한 상세하고, 포괄적인 설명을 담고 있습니다.”
자발적 헌신,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인 정체성 강조로
강요나 위협으로 억지 헌신 유도 심각해, 개선 필요
예정론 신중히 다뤄야, 주님께 맡기고 사명 감당해야
-율법주의적 가르침 때문에 구원파적 왜곡이 생겼다면, 자발적인 종교적 헌신을 바르게 권유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사실 이것을 권유하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닌가요.
“자발적인 종교적 헌신을 바르게 권유할 수 있는 방법은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을 강조해 주는 것이죠. 즉 예수님을 주와 구주로 믿고 영접할 때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느냐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함으로 우리의 구원이 확정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 예수님의 제자, 새사람,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모든 만물의 소유자,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게 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인식시키면서 그런 정체성을 살아내는 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함을 강조해 준다면, 대부분의 신자들은 자발적인 헌신의 주체로 자라게 될 것입니다. 자발적인 종교적 헌신을 권유하는 것은 결코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신약성경 특히 서신서의 뒷부분에서 반복적으로 나오고 있거든요.
하지만 자발적인 헌신을 권유하기보다, 강요나 위협으로 억지의 헌신을 유도하는 것은 정말 심각한 문제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 이런 면들이 많은데, 앞으로 바른 방향으로 개선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함께 일부 구절을 부풀려 ‘구원받을 사람, 못 받을 사람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식의 극단적 주장의 문제점과 이런 주장이 횡행하는 원인, 그리고 반박할 수 있는 변증이 있을까요.
“‘구원받을 사람과 못 받을 사람이 정해져 있다’는 것은 신학적으로 예정론 또는 선택론이라고 부르지요. 예정론과 선택론은 매우 중요한 교리입니다. 하지만 예정론이 신중하게 다뤄지지 않을 때, 큰 문제가 발생합니다. 누가 선택되었고, 누가 선택되지 않았는가는 오직 하나님만 아시는 비밀이지요.
물론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셨구나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른 사람의 선택 여부에 대해 절대적으로 확실한 지식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책임은 누가 선택되었고 예정되었는가 하는 문제는 주님께 맡기고, 우리의 사명을 신실하게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복음을 증거하고,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을 교회 공동체의 형제와 자매로 환영하고 함께 영적 순례의 길을 가는 것이죠.
만일 어떤 종교지도자 혹은 누구라도 자신이 선택자와 불택자 또는 구원받을 사람과 못 받을 사람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 사람은 거의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 있다고 봐야 합니다. 신학적, 영적 분별력이 매우 필요한 상황이 되는 거지요.”
-예정론에 이어 ‘구원의 확신’에 대해 여쭙고 싶습니다. 구원의 확신이란 아주 좋은 신앙적 가치이지만, 자칫 교만과 위선, 방종으로 흐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배우 김혜자 선생님의 책 속 말처럼, 차라리 ‘매일 죄 짓는 내가 정말 구원받았을까? 난 지옥갈 거 같아’ 하고 회의하는 태도가 오히려 더 신앙적이고 솔직하지 않을까 하는데, 이건 ‘악마의 유혹’일까요.
“네. 정말 중요한 질문입니다. 구원의 확신이 아주 좋은 신앙적 가치라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우리가 죄와 죄된 삶을 철저히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님과 구주로 영접할 때, 우리의 구원은 확정됩니다. 이 확정된 구원은 절대 다시 폐기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원의 확신은 오직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받음/확정의 열매요 결과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구원의 확신도 자라남의 과정을 거친다는 것입니다. 갓 거듭나고 중생한 성도들, 즉 주님과의 처음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은 자신의 구원에 대한 거의 절대적인 확신을 가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신앙이 자라나는 과정에서 온갖 유혹과 의심과 시련을 경험하며, 이로 인해 구원의 확신이 흔들림을 경험하지요. 그러다 다시 주님께서 은혜를 더하여 주시면 처음 가졌던 확신보다 더 강한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다시 말해 구원의 확신도 때때로 약해지거나 흔들림을 경험하면서, 더 견고해져 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의 확신은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강한 믿음으로가 아니라, 약하더라도 참된 믿음으로 구원을 얻기 때문입니다. 약하고 진실된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사람은 그 열매인 구원의 확신을 점진적으로 더 견고하게 가지게 됩니다.
구원의 확신이 자칫 교만과 위선, 방종의 삶을 부채질하는 경우는 많습니다. 그것은 처음 믿을 때 구원의 확정이라는 즉각성만을 강조하고, 구원에서의 자라남 또는 성장이라는 점진성을 무시하기 때문에 생기는 오류이지요.
구원의 확정 또는 즉각성은 우리가 ‘영적인 어린 아기’로 태어남을 의미합니다. 구원의 점진성은 태어난 어린 아기가 유아, 유치, 유년, 초등, 중등, 고등의 단계로 자라남을 뜻합니다. 영적 자라남의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의 죄와 허물에 대해 더욱 진지하고 진실하게 회개하게 됩니다.
배우 김혜자 씨가 ‘매일 죄 짓는 내가 정말 구원받았을까? 난 지옥 갈 것 같아’라고 한 것은 솔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사실 부정확한 말입니다. 도리어 우리는 ‘비록 구원을 받았지만 나는 매일 죄와 싸워야 하고, 때로는 싸움에서 패배하여 죄를 짓는 존재구나’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래서 매일 짓는 죄에 대해 진실하게 주님께 반복적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반복적인 실패와 회개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우리를 받아주시고 용납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지속적으로 누려야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을 의지하여 승리할 것을 결단해야 합니다.
우리가 반복적으로 회개해야 하는 이유는, 반복적으로 회개하지 않을 경우 우리의 구원이 취소되기 때문이 아닙니다. 도리어 반복적으로 진실되게 회개하지 않을 경우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깨어지기 때문입니다.
처음 믿을 때 우리의 호적은 주님의 나라로 옮겨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는 매일 매일 우리가 범하는 죄로 인하여 깨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매일 우리의 범죄에 대해 진지하게 회개하고, 다시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회복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영적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영적 성장을 위해 교수님께서 추천하시는 영성훈련 방법들이 있다면 나눠주십시오.
“전통적으로 한국교회 많은 성도들이 실행하고 있는 새벽기도를 추천합니다. 새벽에 주님께 마음의 무릎을 꿇고 깊은 기도를 드리는 훈련은 정말 많은 영적 유익을 줍니다. 동시에 경건의 시간 즉 큐티(Quiet Time) 역시 여전히 유익한 훈련 방법입니다. 요즘 아주 좋은 큐티 교재가 많이 나와 있습니다.
몇 가지를 더 추천한다면 영성일기 또는 예수동행일기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많은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이 영성일기 쓰기를 실천했습니다. 예수동행일기는 날마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친밀하게 동행하며, 주님의 임재를 계속 누리는 데 있어 큰 유익을 줍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지난 7년 동안 영성일기를 써왔는데 큰 영적 유익을 얻고 있습니다.
한 가지만 더 추천한다면 ‘공동체 성경읽기(Public Reading of Scripture)’를 추천합니다. 이것은 믿음의 공동체가 함께 모여 누군가 큰 소리로 성경을 읽어 주는 것을 들으면서 성경을 읽는 훈련입니다. 30분 동안 6-7장, 한 시간 동안 12-14장의 성경을 들으면서 읽을 수 있습니다.
이 시간 동안 정말 주님의 말씀에 초집중하면서, 말씀이 우리 영혼을 치유하고, 회복시키고, 강건케 함을 경험하는 놀라운 시간입니다. 지난 1년 동안 덴버신학교 한국어부 학우들과 함께 오디오 바이블을 함께 들으면서 성경을 묵상하고, 묵상한 내용을 함께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너무 큰 영적 유익을 누렸습니다.”
-때아닌 논란이 있었던,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이란 무엇인가요.
“그리스도의 능동적/수동적 순종과 관련해 최근 보수적인 장로교 개혁신학권에서 뜨거운 논쟁이 있었지요. 그런데 밖에서 보는 제 입장에서는 이 논쟁의 모습이 덕스럽지 못한 것 같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성육신하실 때부터 부활 승천하실 때까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다고 가르칩니다. 종교개혁 직후 17세기 개혁신학자들은 예수님의 순종을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으로 나눠 이해했습니다.
‘능동적 순종’이란 인간을 대표하여 율법의 도덕적 요구를 적극적으로 성취하심을, ‘수동적 순종’이란 인간을 대신하여 율법의 저주와 정죄를 받아 고난과 형벌 받으심을 의미합니다. 특히 17세기 개혁신학자들은 예수님이 ‘능동적 순종’을 통해 율법을 성취하시고 의를 획득하셨으며, 예수님이 ‘능동적 순종’을 통해 획득하신 의를 회심하는 죄인에게 전가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 가르침은 21세기인 지금에 이르기까지 개혁신학권에서 확고한 정통의 지위를 누려왔습니다.
최근 일부 신학자들이 이런 ‘능동적 순종’ 교리를 거의 이단시하면서, 예수님이 율법 순종으로 획득한 의가 아닌 예수님의 본연적 의가 칭의 시에 전가된다는 주장을 내세웠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논쟁의 불길이 타오르게 되었지요.
저는 이것이 칭의 시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의 성격에 대한 매우 전문적이고 세부적인 논쟁이기에, 이단 논쟁으로 비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입니다. 양측 모두 오직 예수,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이라는 구원론의 근본 진리에 대해 동의하고 있기에, 서로를 이단으로 정죄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다만 성경 해석상에 있어서의 차이와 다양성의 문제로 인식하고 서로를 존중하면서, 어느 입장이 더 성경에 가까운가에 대한 ‘신사적 토론’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신학계에서 성숙한 토론 문화가 더 깊이 자리잡게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밝고 행복한 종말론’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기존 네 가지 종말론 학설의 간단한 소개와, 이를 다룸에 있어 유의해야 할 점이 있을까요.
“제가 ‘밝고 행복한 종말론’을 강조하게 된 이유는 역사의 마지막과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한국교회 전반의 가르침이 거의 ‘어둡고 두려운 종말론’에 지배를 받고 있다는 분석에 따른 것입니다.
디도서 2장 13절은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복스럽다’는 말은 ‘행복하다’는 뜻입니다. ‘영광’은 ‘밝음’을 의미합니다.
요한계시록을 자세히 읽어보면, 예수님의 재림과 관련하여 ‘기대, 대망, 열망, 희망, 기쁨, 승리’ 등을 강조하고 습니다. 결국 성경의 종말론은 밝고 행복한 종말론일 수 밖에 없지요.
제가 강조하는 ‘밝고 행복한 종말론’은 기존 네 가지 종말론 학설 중에서도 ‘역사적 전천년주의’와 궤를 같이 합니다. 역사적 전천년주의는 초대 교부들 대부분과 16-17세기 많은 청교도 신학자들, 그리고 20-21세기 다수의 복음주의자들이 지지한 관점으로 교회가 환난을 통과하고, 환난 중에 보호하심을 입으며, 예수님 재림 후 천년왕국이 지상에 건설되고, 최종적으로 영원한 신천신지가 도래한다는 관점입니다.
역사적 전천년주의에 입각한 ‘밝고 행복한 종말론’은 세대주의의 유대인 특권주의와 환난전 휴거설을 반대합니다. 무천년주의와 겹치는 부분이 많지만, 지상의 천년왕국을 거부하는 무천년설과는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후천년설은 이미 학계에서 추종자가 거의 없는 이론입니다.
한국교회 안에는 세대주의와 무천년주의가 여전히 세력을 떨치고 있지만, 저는 역사적 전천년주의가 가장 성경적인 관점이기에 이 관점을 중심으로 통폐합돼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네 가지 학설 중 어느 하나의 입장을 택하더라도 구원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믿습니다. 천국에서 우리는 네 학파에 속한 사람들을 모두 만나게 될 것입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