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과 성경 15-1] 이스라엘 7대 절기의 구속사적 의미
종교 중심 고대 사회, 절기 영향력 지금보다 커
이스라엘 정체성 가장 잘 보여준 절기, 유월절
농업 사이클보다 하나님 백성 부름받음 더 중요
애굽 등 고대 사회 문화·사상별 신년 시작 달라
1. 들어가는 말
1) 절기의 중요성
절기(Festivals·명절)는 일상에 매몰되어 사는 인간들이 매년 주기적으로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들을 만날 수 있도록 해주는 특별한 날입니다.
예를 들면 생명 유지를 위한 식량 획득 문제, 불가항력적인 자연재해 문제, 내·외부 적으로부터의 안전 확보 문제, 생로병사 문제, 자유와 책임, 사후 세계 등에 관한 주제들은 비록 그 영향력이 막중하지만,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잊고 살기 쉬운 주제들입니다. 절기는 이런 삶의 근본적인 문제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들을 제공합니다.
특히 종교가 모든 것의 중심을 차지했던 고대 사회에서는 절기의 영향력이 지금보다 훨씬 더 컸습니다. 고대인들의 세계관과 밀접히 연관돼 있던 절기는 삶의 목표를 제시했고, 생존 자체가 큰 문제였던 고달픈 삶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도록 카타르시스를 제공했습니다.
따라서 절기는 일상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모든 공동체에 소속된 모든 구성원에게 하나 될 수 있는 소속감을 주는, 1년 중 가장 중요한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삶의 주기가 절기 중심으로 진행됐던 고대 종교 사회라고 해서 모든 문화가 똑같은 절기를 만들어 지킨 것은 아니었습니다. 각 문화 혹은 문명마다 절기 내용이나 형식은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따라서 절기를 잘 비교하면 절기를 지키는 문화의 특성을 알아낼 수 있습니다. 각 문화가 소중하게 지키는 절기는 종교적 기원을 가질 수도 있고, 농경이나 목축 등 삶의 생존 방식에 그 기원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한국인들의 절기는 설(구정)과 추석이 가장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외에도 삼일절, 한글날, 개천절, 광복절 등등 역사가 진행되면서 기념해야 할 일들이 많이 생겨났지만, 한국인들의 삶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은 바로 농업 주기와 관련된 설과 추석입니다. 이는 ‘농자 천하지대본(農者 天下之大本)’이라는 한국 전통 사상과 정확히 그 맥락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설은 지난 한 해를 마무리짓고 새해 농사를 설계하는 출발점으로 한국인들의 가슴 속에 가장 깊숙이 자리를 잡고 있는 최대 명절(절기)입니다. 추석도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한 절기로 첫 곡식으로 떡을 만들어 한 해 농사를 잘 마무리지을 수 있도록 도와주신 조상님들께 감사를 드리고 잔치를 벌이는 시간입니다.
이처럼 설과 추석은 전통적인 농업 국가인 한국을 대표하는 절기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한국 사회가 점차 산업사회를 넘어 정보화 사회로 탈바꿈해가는 과정에서 농경 시대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절기가 점점 그 의미를 잃어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 되었지만, 아직도 설과 추석은 한국인들의 가슴에 가장 큰 절기로 남아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절기도 이스라엘 문화의 정체성을 잘 보여주는데, 그 중에서도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절기는 단연코 유월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약간의 과장은 있을 수 있겠지만, 예수님 당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전 세계에서 수백만 명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모여들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구도시가 과연 이들을 다 수용할 수 있었는지는 의문이지만, 그만큼 유월절은 유대인들에게 큰 의미를 주었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공생애 3년 동안 유월절에는 빠짐없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절기를 지키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스라엘의 일곱 절기(유월절-무교절-초실절-오순절-나팔절-속죄일-초막절) 중에서도 특히 유월절은 이스라엘 문화의 특성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절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유월절(니산월 14일)과 무교절(니산월 15-21일)은 연이어 발생하는 절기로 유월절을 지킨다는 것은 곧 유월절과 무교절을 함께 (물론 초실절도 함께) 지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절기는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돼 탈출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스라엘 일곱 절기도 다른 농경사회와 마찬가지로 농업 사이클과 밀접한 관련이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점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건으로, 하나님도 유월절이 포함된 니산월을 ‘해의 첫 달’로 삼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출 12:2).
2) 신년의 중요성
절기를 구성하는 데는 ‘1년’이라는 주기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인간이 일생을 살면서 이 땅에서 체험할 수 있는 가장 큰 자연적 주기는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도는 1년이라는 사이클입니다.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도는 일년이라는 주기는 전 세계 모든 문화가 공통으로 사용하는 가장 큰 주기입니다. 인류는 고대부터 태양의 그림자를 이용하여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춘분과 추분, 또 낮이 가장 긴 하지와 밤이 가장 긴 동지 등을 관찰하여 절기에 활용을 하여 왔습니다.
이 태양의 주기가 중요한 것은 밤과 낮 길이에 따라 계절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지구가 태양을 한바퀴 도는 동안 계절이 바뀌는데, 이 계절은 농업이 가장 큰 생계 수단이 되는 농경 사회에서 씨를 뿌리고 가꾸고 수확하는 농업 사이클을 결정하는 중심 요소가 됩니다.
낮이 길면 더운 날씨(여름)가 되고 밤이 길면 추운 날씨(겨울)가 됩니다. 이 주기는 온도에 크게 영향을 받는 농사의 주기와도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경우 비록 쌀쌀하지만 겨울에 비가 내리기 때문에 겨울에 추운 날씨에도 잘 견디는 보리와 밀 농사를 짓게 됩니다. 대신 비가 전혀 내리지 않고 무더운 여름에는 과일 농사를 짓게 됩니다.
1년의 주기를 시작하는 때, 즉 신년이 되는 시점은 모든 문화들이 가장 중요시하고 때로는 신성시하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1년이라는 사이클에서 신년의 시작을 알리는 시점은 각 문화마다 큰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그 이유는 신년이 그 문화의 가장 특징적인 사상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신년이 시작하는 기준으로 삼느냐 하는 것이 그 문화의 성격을 규정합니다. 대체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 주는 농업 사이클이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지만, 모든 문화가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비옥한 초승달 지역’ 안에서도 신년 절기에 대한 개념은 큰 차이를 보여줍니다.
애굽에서는 홍수가 시작되는 시점이 신년의 시작인데, 이는 홍수가 그만큼 애굽인들의 생활에 절대적 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또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춘분을 신년이 시작하는 시점으로 보는데, 이는 뜨거운 태양(주간) 보다는 시원한 달(야간)을 선호하는 메소포타미아인들의 생각이 반영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신년은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 주는 농업 사이클보다 애굽의 노예 생활로부터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유월절부터 시작됩니다.
2. 애굽 절기의 특징
종교는 대부분 그 지역 삶의 방식과 밀접히 연관돼 있습니다. 산악 지역에서는 산과 관련된 종교가 대부분이고, 해안 지역에서는 바다 관련 종교가 대부분입니다. 애굽에서 삶의 방식은 전적으로 나일강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나일강 없는 애굽은 상상할 수조차 없습니다. 따라서 애굽에서의 종교는 나일강과 절대적으로 연관을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국토의 95% 이상이 사막으로 구성된 애굽에서 찬란한 문명을 자랑하던 애굽 고대왕국이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나일강 때문입니다. 비가 전혀 내리지 않는 이 지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유지하는 정도가 아니라, 역사에 유례가 없을 정도로 풍족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나일강 홍수 덕분입니다.
대부분 지역에서 홍수는 그 파괴적 성격으로 부정적 이미지를 갖고 있지만 애굽에서는 홍수가 없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긍정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일강 홍수는 매년 에티오피아로부터 비옥한 검은 토양을 날라주기 때문에 나일 계곡을 ‘여호와의 동산(창 13:10)’에 비교할 정도로 풍요로운 땅으로 만들어 줍니다.
따라서 애굽의 홍수는 ‘적은 노동력으로 최고의 수확을 약속하는 신의 선물’이 됐고, 따라서 애굽은 쉬엄쉬엄 일해도 식량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농부들의 천국’이라 불러도 손색 없을 정도였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애굽처럼 여가를 즐기며 농사를 짓고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있었던 적은 없습니다. 더구나 나일강 홍수는 매년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지역으로만 오기 때문에 홍수로 인한 피해는 전혀 없었습니다.
이렇게 이롭기만 한 애굽 홍수이기 때문에, 애굽인들은 나일강 홍수를 ‘신의 선물’로 여겼습니다. 따라서 홍수가 시작하는 매년 7월 15일을 신년으로 삼고, 올해도 홍수가 어김없이 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며 축제를 벌렸습니다.
나일강 홍수는 애굽인들의 삶에 절대적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나일강의 홍수가 시작되는 시점이 신년 출발점이 됐습니다. 애굽 달력은 1년을 세 부분으로 나누는데 홍수기(7-10월), 파종기(11-2월), 수확기(3-6월)가 그것입니다.
홍수기에는 농사를 지을 수 없기 때문에 농부들은 이 기간을 이용하여 여행을 하고, 집을 수리하고 또 나일강에서 물고기나 새를 사냥하는 등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나일강 홍수는 이처럼 단순히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뿐 아니라 애굽인들의 세계관을 형성하는 데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애굽인들은 ‘신이 애굽인들에게 나일강의 홍수라는 최고의 자연 환경을 준 것은 애굽인들을 선택하여 영생의 기회를 주기 위한 것’이라 믿었습니다. 장례 문서(Coffin Texts) 1130에 따르면, 창조 신은 애굽인들이 영생을 추구하는 것을 돕기 위해 다음과 같은 네 가지 환경을 제공했습니다.
첫째, 사람이 호흡하며 살 수 있도록 사방에 바람(공기)를 만들었습니다.
둘째, 매년 나일강 홍수를 보내 풍족하게 먹고 살 수 있도록 했습니다.
셋째, 모든 사람이 균등한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넷째, 모든 사람이 항상 사후 세계를 기억하며 살도록 만들었습니다.
창조 신이 애굽인들에게 나일강 홍수를 보내준 것은 단순히 애굽인들을 잘 먹고 잘 살게 하기 위한 선물이 아니라 사후 세계까지도 추구할 수 있도록 한 신의 배려라고 애굽인들은 믿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애굽인들이 신년 절기를 지키는 것은 일년 중 가장 중요한 행사로 단순한 물질적 축복에 대한 감사뿐 아니라 미래 사후 세계에도 참여하고 싶은 애굽인들의 소망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고대 그리스 역사학자인 헤로도토스는 애굽인들을 ‘세계의 어느 나라보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종교적인 민족’이라고 했습니다.
애굽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지하 세계로 들어가는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 이 땅에서 매우 도덕적인 삶을 추구하였는데, 그들은 지하 세계 왕인 오시리스 앞에서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는 삶을 살기를 원하였습니다.
“나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누구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나는 무뚝뚝하게 굴지 않았습니다.
나는 누구도 울리지 않았습니다.
나는 유부녀와 관계를 맺지 않았습니다.” <계속>
류관석 교수
대한신대 신약신학
서울대 철학과(B.A.), 서강대 언론대학원(M.A.), 미국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M. Div.),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 (Th. M. 구약 / M. A. 수료), Loyola University Chicago(Ph. D., 신약학)
미국에서 Loyola University Chicago 외 다수 대학 외래 교수
저서 <구약성경 문화 배경사>, <산상강화(마태복음 5-7장)>, <기적의 장(마태복음 8-9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