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 베푸신 은혜의 경험과, 베푸실 은혜의 소망 사이에서
성경 속에는 질문이 적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자칫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질문들의 배경과 의미들을 찾아보는 칼럼 ‘20 Questions in Old Testament’를 시작합니다. -편집자 주
1.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הֲתַ֥חַת אֱלֹהִ֖ים אָֽנִי׃, 창세기 50:19
창세기 마지막과 출애굽기 초반의 사이에서, 오늘 우리 자신과 시대를 투영해 볼 수 있다. 창세기 50장의 요셉이 깨달았던 자신의 인생에 대한 통찰을 통하여 오늘 21세기의 우리를 들여다볼 수 있고, 창조로 시작하여 죽음으로 끝나는 50장의 끝에 서서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새로운 창조를 행하시는 출애굽기 1장을 거쳐 거기에 두 가지의 질문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모세의 ‘내가 누구이기에?(출 3:11)’와 바로의 ‘여호와가 누구이기에?(출 5:2) ’의 메아리 속에서, 출애굽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자신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역사(일하심, working)을 깊이 통찰하여 그 인생을 재해석한 요셉을 만나보자.
아버지의 이름으로
창세기 50장 15-17절을 보면, 야곱이 죽고 난 후 요셉의 형들은 요셉의 보복이 두려워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신 말을 꺼내며 요셉에게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고 간청한다.
마치 에서가 동생 야곱을 미워하여 아버지가 죽을 때가 다 되었으니 ‘죽고 나면 야곱을 죽이리라’하는 것처럼(창 27:41), 형들의 생각에는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는 자신들에게 잘해 주었지만 아버지가 죽고 난 후 자신들을 해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요셉에게 나아온 것이다. 그러면서 또 요셉 앞에 엎드려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18절)”라며 두려움의 말을 쏟아낸다.
요셉의 눈물
요셉은 그들의 이 말에 “울었더라”고 한다. 그의 눈물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요셉이 총리가 된 후 ‘온 지면에 기근이 있으매(41:56)’ 요셉의 형들도 와서 곡물을 사려고 애굽에 내려왔다(42:7). 처음에는 요셉이 자기를 드러내지 않았지만, ‘너희는 안심하라(שָׁלוֹם, 샬롬, 43:23)’며 결국 자신을 밝힌다.
그 때 요셉은 아주 대단히 놀라운 말을 한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45:5,7,8a)”.
그는 형들을 만나는 순간, 형들에 대한 용서를 넘어 인생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의 단련을 통해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나, 바로 이 순간을 위해 요셉을 종으로 팔리게 하시어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던 것이다(시 105:16-19). 요셉은 자신의 인생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이었던 ‘왜?’에 대한 답을 얻게 된 것이다.
그러한 요셉의 신앙고백적 인생에 대한 통찰을 통해 용서함을 형들에게 진심으로 베풀었음에도, 다시 ‘아버지의 이름으로’ 찾아온 형들을 보며 요셉은 울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눈물은 형들의 악행이 다시 생각나서 우는 눈물도 아니었고, 용서에 대한 진정성을 알아주지 못해 우는 눈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용서를 넘어 생명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와 자신의 사랑에 대해 모르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의 눈물이었으리라.
참된 용서의 자유함을 모르면, 다시 두려움이 엄습해 온다. 주님의 십자가를 통한 참된 용서는 두려움을 떨쳐버리게 하고 우리에게 참된 자유함의 기쁨과 평강이 우리 속에 스며 온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הֲתַ֥חַת אֱלֹהִ֖ים אָֽנִי׃
두려워하며 엎드려 비는 형들을 향한 요셉의 단 한 마디는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였다.
70인역에서는 이를 μὴ φοβεῖσθε τοῦ γὰρ θεοῦ εἰμι ἐγώ (Do not be afraid, for I am God’s)로 번역하는데, 질문 형식의 반어적인 표현으로 ‘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를 강하게 표현한다. 이것은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이 모든 것을 주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의 첫 번째 고백은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I am nothing)”이다. 이것이 인간을 바라보는 출발점이다. 현 포스트모던 시대는 하나님을 대체하려는 모습들이 수없이 일어나고 있다. 그 출발점은 ‘나는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I can do anything what I want)’이다. 출발점이 전혀 다르다.
인간이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향해 조금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요셉의 이 말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그 자리에서 모든 인생과 사물을 바라본다는 신앙의 고백이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개입과 섭리를 인정하며 인식하는 것이다.
상처받은 치유자: ~했을지라도
The Wounded Healer
요셉은 그 자리에서 끝나지 않는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50:20a)”라며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50:21)”고 증거한다.
형들에게 엄청난 상처를 입은 그가 오히려 형들을 위로하는 치유자가 되었다. 요셉은 형들에게 그들이 죄인이라는 것을 확신시키기 위해 말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의 죄가 용서함 받았다는 사실을 확신시키고 위로를 거듭해서 반복한다(cf. 45:8).
하나님께서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그 놀라운 은혜와 섭리를 말함으로써, 자신이 받은 상처뿐 아니라 상처를 주었던 그 두려움을 뒤로 넘기는 치유와 위로의 요셉을 발견한다.
요셉의 이러한 모습의 근원은 ‘해하려 했을지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다’는 확신에서 출발한다. 이것이 얼마나 큰 인내를 요구하는지 모른다.
17세에 팔려 30세가 되어 총리가 되고 풍년 7년과 흉년 2년이 지나는 22년의 인고의 세월 동안 수많은 아픔과 고통을 통해 뼛속 깊은 곳까지 상처가 배여 있었지만, 그는 그 상처를 딛고 품으며 오히려 치유자의 모습으로 나아온다. 그는 그 형들과 자녀들까지 돌보겠다고 약속하며 위로하였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다(히 11:38).
이민자의 삶 속에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쓰라림과 아픔의 가슴에 저미는 일이 쓰나미처럼 항상 밀려온다. 그래서 상처입은 영혼들이 많다. 남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고 내 말만 들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여, 사람을 만나면 두세 시간 동안 온갖 말을 쏟아 놓는다. 이민 목회의 가장 중요한 사역이 ‘들어줌’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포인트이다.
이상한 한 마디만 들어도 온갖 상상을 다하며 남을 공격하기에 바쁘다. 눈앞에 닥치는 조그마한 경제적 손실이나 마음 상함을 전혀 참고 견디지 못한다. 하지만 그 억울함 속에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그 뜻과 섭리를 바라보고 기다릴 수 있는 것이 믿음이다. 특별히 요셉을 통해 이것을 배워야 한다.
진정한 우리의 상처입은 치유자는 누구인가? 이사야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라고 증거한다.
용서받을 수 없는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시기 위해 모든 찔림과 상함을 안고 우리에게 나음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상처입은 치유자이시다. 그분의 상처가 우리의 치유가 되었다. 주님의 십자가는 진정한 치유의 현장이다.
자기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적 해석
21절을 다시 읽어 보자.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앞서 요셉은 이미 하나님께서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을 먼저 보내셨다고 진술했다(45:5-8). 그리고 다시 하나님께서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시려” 한다고 언급한다(50:20).
자신의 모든 고난과 고통을 지나 그 지나간 시간들을 돌아보니, 모든 것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따른 인도였음을 그는 확신한다. 자신의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과 섭리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가지고 있다.
45장의 구원은 ‘당신들’이란 표현으로 보아 가족들에 한정해 언급하고 있다고 본다면, 50장의 생명의 구원은 ‘많은 백성(עַם־רָֽב )’, 곧 ‘수많은 백성들’과 연결된 자신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적 일하심에 대한 통찰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요셉은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라(50:25)”는 유언과 더불어 후손들의 가나안 땅으로의 복귀를 소망하며, 자신의 인생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선한 손길을 밝히 드러내고 있다.
요셉은 그 형제들에게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50:24)”라며 죽음을 뛰어넘는 믿음, 곧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래서 시인은 “주의 팔로 주의 백성 곧 야곱과 요셉의 자손을 속량하셨나이다(시 77:15)”고 증언한다.
1995년 신학교에 들어간 후 2001년에 미국에 유학 와서 9년 정도 학업을 한 뒤 지금까지 이민교회에서 사역하고 있다. 그 시간 동안 하나님께 가장 많이 했던 질문이 “하나님, 저를 향한 주님의 뜻이 무엇입니까?”였다. 그 정확한 답은 하나님 나라에 가서나 알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근래에 희미하지만 한 가지 답을 주셨다. 이삭이나 야곱, 요셉처럼 그들 인생의 단면들도 의미가 있었지만,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조력자로 보는 것이다. 또한 요셉이 장차 일어날 출애굽과 이스라엘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의 인생이 그것을 위하여 사용된 것처럼, 필자의 인생도 두 아들을 통하여 혹은 그 후손들을 통하여 행하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위한 한 조력자의 삶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두 아이를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전 세계를 품는 사람으로 양성하기 위해 저를 먼저 이곳에 보내셨고(실제로 가족들은 6년 뒤에 왔다), 그 주님의 사역을 위해 예비하심이 아닌가 하는 강력한 마음이 일어난다.
비록 장차 보지는 못하겠지만, 주님의 구원 사역을 위한 인생으로 쓰임받도록 더욱 간절히 기도하며 신앙인으로 양성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한다.
애굽과 가나안, 이미와 아직, 세상과 하나님 나라의 두 사이에는 긴장이 있다. 그 긴장 사이에서 우리의 삶은 언약의 성취를 바라보는 것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그래서 우리는 이제 이 말씀을 이해하게 된다. 길 위의 인생이지만, 나그네의 삶은 방랑자의 삶이 아니라 상속자의 삶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을 자를 위해 애굽을 사용하신다.
과거 믿음의 선조들 삶 속에서 베푸신 하나님 은혜의 경험과, 미래 우리와 자손들의 삶 속에서 베풀어 주실 은혜의 소망 사이에서,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기억하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김문봉 목사
체리힐 동산장로교회(Dongsan Presbyterian Church of Cherry Hill)
부산대,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및 대학원,
미국 Liberty Theological Seminary(현 Calvin Theological Seminary), Luther Seminary 등 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