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설미 집사, LA에서 북한 인권 실태 고발
채널A의 인기 프로그램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 고정 출연해 북한의 실상을 알려 온 윤설미 집사가 최근 LA 나성열린문교회에서 열린 간증집회에서 북한교화소의 인권 유린 실태를 고발하며 자유를 찾아나선 자신의 탈북 여정을 소개했다.
윤설미 집사는 김정은의 부인 리설주가 다닌 평양 금성학원 출신으로, 자식에게 물려줄 것은 재산이 아닌 ‘재간’임을 강조했던 아버지 덕에 9살부터 아코디언 연주를 시작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병환으로 가세가 기울자 집안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아버지의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중국으로 넘어갔다가 그곳에서 인신매매를 당한 그녀는, 중국인에게 팔려 강제로 결혼하게 됐고 젖먹이 딸을 출산했다. 마을 주민의 신고로 중국 공안에 잡힌 그녀는, 생후 1개월 된 딸을 남겨둔 채 강제로 북송됐다.
24살 꽃다운 나이에 전거리교화소에 입소한 그녀는, 짐승 같은 삶을 혹독하게 이어가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북한의 심각한 인권 현실을 마주했다. 1천 2백여 명이 수감된 여자 교화소에는 매일 사람들이 입소하지만 정원은 변함이 없을 만큼 매일같이 사람들이 죽어갔다. 8평 정도 되는 협소한 수감시설에서 100명이 생활했는데, 밤에는 과자처럼 서로 포개져 잠을 자야 했다. 위생이 열악하고 작은 공간에 사람들이 몰려 있으니, 전염병의 위험은 늘 따라다녔다.
최소한의 영양분도 공급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손도끼 하나로 산에서 나무를 자르고 운반하는 고강도의 노동이 요구되는 작업을 수행해야만 했다. 밥과 반찬은 기대할 수도 없었고, 가축들이 먹는 사료로 끼니를 때웠다. 일하는 데 거추장스러운 머리카락은 모두 짧게 깎아 버리고 머리에 수건을 씌워 일을 시켰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굶어 죽고, 맞아 죽고, 얼어 죽었다. 그녀의 체중도 35kg까지 줄었다. 매일 죽어나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녀도 언제가 그들과 같은 모습으로 교화소를 나가게 될까 두려웠다.
윤설미 집사는 “북한 교화소는 숨을 쉬기도 힘든 곳으로, 그곳에서 사람들은 인간 짐승 같은 모습이었다”며 “하루도 시체가 나가지 않는 날이 없을 정도로 인간이 만든 지옥이 바로 그곳이었다”고 회상했다.
탈북을 했다는 이유로 5년형을 선고 받아 교화소에서 복역하던 중, 그녀의 어머니가 면회를 왔다. 그리고 어머니의 손에서 자신의 젖먹이 딸 사진을 볼 수 있었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마저 빼앗긴 그곳에서, 그녀는 반드시 살아나가야만 하는 소망을 발견했다. 그녀는 죽기 전에 딸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때부터 그녀는 이를 악물고 눈에 보이는 무엇이든 먹기로 했다. 산에 올라 나무를 베는 일을 마치면 뱀을 잡아 먹었다. 감옥 안에서는 사람의 똥을 먹고 사는 쥐를 잡아 먹었다. 짐승 대우를 받으며 짐승처럼 살아가지만, 반드시 그곳에서 나가야만 했다. 삶을 향한 간절한 몸부림으로, 매일 사람들이 시체로 죽어나가는 교화소에서 그녀의 체중은 50kg까지 늘어날 수 있었다.
교화소에서 출소하기 얼마 전, 중국에서 예수님을 영접했다가 북송당해 교화소에서 복역하고 있던 여성 기독교인에게서 복음을 들었다. 길었던 5년의 복역 기간이 지나고 출소한 날 바로 탈북을 시도했다. 두만강을 넘어 중국에 있을 아이를 보던 가던 중 또다시 붙잡혀 강제북송을 당했다. 우여곡절 끝에 교화소를 벗어난 그녀는 망설임 없이 또 한 번의 탈북을 감행했고, 중국에 있던 딸을 만났다.
북한 인권의 비참한 참상을 경험한 그녀는 자유를 찾아 대한민국 땅을 밟았고, 그녀의 딸도 그녀의 뒤를 이어 한국으로 안전하게 올 수 있었다.
그토록 갈망하던 자유를 누리며 대한민국에서 안정된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그녀는 아직도 북한 주체사상 아래서 배고픔과 인권 유린으로 고생하는 주민들을 생각하면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해진다.
그녀의 꿈은 북한 전역에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다. 그녀는 “통일이 되면 트럭 5대에 초코파이를 가득 싣고 고향 마을에 가서 공짜로 나눠 주며 예수님을 전하고 싶다”며 “북한 전역에 예수님의 이름이 전파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날이 오길 간절히 원한다”는 소망을 전하고 간증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