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원 칼럼] 기독교, ‘자유’의 종교
그리스인, 운명 피할 수 없다 믿어
예방조치도 신탁의 징검다리일 뿐
유대인, 운명 정해진 것 아님 믿어
미래는 인간 자유의지로 바뀌는 것
한국 기독교 비관적 전망 쏟아지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 가능해
2023년부터 고대근동과 구약 성경 권위자인 단국대 김구원 교수님의 칼럼을 월 2회 연재합니다. 바벨탑 이야기에 이어, 이번에는 엘리야 이야기입니다. 김구원 교수님은 서울대 철학과를 거쳐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목회학 석사 학위, 시카고대 고대근동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각각 취득하고 개신대에서 가르쳤으며, 현재 단국대 사학과에 재직 중이십니다. 일반인과 평신도에게 구약과 고대근동 문화를 소개하는 일에 관심이 많은 김 교수님과 함께, 구약과 고대근동의 렌즈로 보는 신앙의 세계로 함께 들어가 봅시다. -편집자 주
그리스인들과 유대인들의 문화적 차이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는 것이 운명에 대한 태도이다.
그리스인들은 운명(μοῖρα)을 믿었다. 델피(Delphi)의 신탁이 이집트 테베의 왕에게 아들이 그를 죽일 것이라고 예언했을 때, 왕은 그 일이 발생하지 못하도록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한다.
그는 갓 태어난 아들을 바위에 매달아 죽게 버려 두었다. 하지만 지나가던 목동이 아직 숨이 붙어있는 아이를 살렸고, 그 아이는 나중에 고린도의 왕과 왕비에게 입양된다. 이 일로 영구적 기형의 발을 가진 그는 후에 오이디푸스(오이단 ‘붓다’ + 푸스 ‘발’ = ‘부은 발’)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오이디푸스가 후에 그의 아버지를 죽이고 왕이 된 일은 매우 잘 알려진 일화이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신탁이 내다 본 미래는 절대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떤 예방조치를 취해도 그것이 그 신탁을 이루는 징검다리가 될 뿐이다. 신탁을 통해 한 번 운명이 결정되면 그 운명을 피하려는 노력은 부질없다.
유대인들은 그리스인들과 달리 결정된 운명을 믿지 않는다. 즉 유대인들에게는 한 번 정해지면 반드시 발생해야 하는 운명이라는 개념이 없다. 그들에게 인간의 미래는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미래는 인간의 현재적 선택으로 창조되는 것이다. 즉 인간에게는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의지’가 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구약의 예언 개념이다. 구약에서 예언은 바뀌지 않는 운명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를 촉구하는 교훈과 경고이다.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선지자 이사야가 하나님의 뜻을 왕에게 전한다: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집을 정리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왕상 20:1)”.
이 예언을 들은 히스기야는 면벽(面壁)하고 여호와께 눈물로 기도했다. 그 때 하나님 말씀이 다시 히스기야에게 내려진다. 선지자 이사야는 왕에게 돌아가 그 말씀을 전한다: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 일 만에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겠고(왕하 20:5)”.
이사야 선지자가 히스기야 왕에게 그가 죽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히스기야는 죽지 않았다. 그 후 15년을 더 살았다. 히스기야가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을 때, 하나님이 그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구약 선지자의 예언(豫言)과 델피의 신탁 사이의 차이가 있다. 피상적으로 판단하면, 절대 변하지 않고 반드시 성취되는 델피의 신탁이 하나님의 바뀌는 예언보다 우월해 보이지만, 둘은 완전히 다른 세계관을 반영한다. 운명적 결정론에 바탕을 둔 델피 신탁과 달리, 구약의 예언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기댄 회개 촉구이다.
따라서 구약 예언의 성공 여부는 예언 성취 여부에 따라 기계적으로 판단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구약 선지자들이 받은 사명은 백성들을 회개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구약 선지자들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믿고, 그들이 듣고 자발적으로 회개하도록 그들에게 하나님의 경고를 전달하는 사람들이다.
21세기 인류의 지식은 대단하다. 하늘 너머 우주 공간에서 수조 개의 별을 가진 은하계를 수억 개나 발견했고, 수십조 개의 세포를 가진 인간의 몸을 탐구하고 인간 유전자 지도를 정확히 그려냈다. 이런 엄청난 지식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인간이 모르는 것, 앞으로도 절대 모를 것이 있다. 그것은 인간의 미래이다.
아무리 발달된 인공지능이 개발돼도 인간의 미래를 예측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존재는 예상대로 행동하지 않는다. 늘 변화한다. 이 때문에 첨단과학 시대에도 사람의 행동을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인간의 자유나 변화 가능성을 의심하는 과학자들도 많다. 그들은 인간 의식이 과거와 현재의 자극에 의해 발생된 두뇌 파장의 기계적 산물이라 주장한다. 그들에 따르면 인간은 환경이나 조건을 초월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마음의 개념(The Concept of Mind)>을 저술한 과학자 리타 카터(Rita Carter)는 자의식을 형성하는 내용들, 예를 들어 기억, 언어, 감각, 이성 등이 두뇌 어느 부분에 저장되는지를 밝혀냈다. 그리고 ‘마음’은 두뇌의 진화적 작용에 불과하며, ‘자유의지’는 환상이라고 결론 내린다.
어느 의학전문기자도 “수많은 선택의 연속이 인생인데, 각 선택이 모두 우리의 의식보다 앞선, 우리가 모르는 조건에 의해 좌우된다”며 인간은 선택하는 존재가 아니라 선택 당하는 존재일지 모른다고 이야기 한다. 하지만 과학이 인간의 자유 의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해서,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자유의지야말로 인간 속에 있는 신의 성품들 중 하나이다.
세상은 오래 전부터 신앙인들을 적대시하려는 성향을 가진다. 이스라엘에 대한 최초 역사 기록도 그렇게 시작한다. 지금으로부터 3,300년 전 이집트 왕 메르넵타(Merneptah, 1213-1203 BCE)는 “이스라엘은 파괴되었다. 이스라엘의 미래는 더 이상 없다”고 선언했다. 신앙의 공동체를 파괴하려는 세속 권력의 역사가 이 때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후 역사는 신앙인들이 세상의 편견, 저주에 좌절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자유로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과정이었다. 기독교는 운명의 종교가 아니라 변화의 종교이며, 기독교인은 죄의 노예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은 사람이다.
지금 한국 기독교를 향한 비관적 전망이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다. 기독교인들 중에도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녀도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교회 다닌다고 더 이타적이거나 도덕적 삶을 사는 것은 아니라고 한탄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의 위대한 점은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한 자유의지로 더 나은 ‘새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다음은 우리가 되새길 필요가 있는 함석헌 선생의 말이다. 한국 기독교인들이 세상 사람들의 비관적 전망을 넘어, 이 땅에 선한 역사를 다시 쓸 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
“새 프로테스탄트가 나와야 한다. 종교개혁이 다시 나와야 한다. 어느 종교나 종파만이 아니라 통히 종교 그것이 새로워져야 한다. 먼저 왔던 것이 다 제때에는 제 할 일을 했지만 제때가 지나간 다음에도 그냥 서 있으면 이제는 도둑이요 강도다. 그러므로 그들을 내쫒고 새 말씀을 외쳐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새 역사 이해를 가져야 한다. … 그들(새 프로테스탄트)의 사명은 진리를 현대 속에 살리는 데 있다. 시대착오의 낡은 제도 속에서 질식되려는 진리를 구하는 것이 그들(새 프로테스탄트)의 일이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 한길사, 37쪽)
김구원 교수
단국대 사학과 고대문명연구소
저서 통독주석 <사무엘상>과 <사무엘하>, <김구원 교수의 구약 꿀팁>, <쉬운 구약 개론(공저, 이상 이상 홍성사)>, <가장 아름다운 노래> 등
역서 <하나님 나라의 서막>, <이스라엘의 종교>, <이스라엘의 성경적 역사>, <고대 근동 역사>, <고대 근동 문학 선집(공역, 이상 CLC)>, <구약 성서로 철학하기>, <에스더서로 고찰하는 하나님과 정치>, <출애굽 게임(이상 홍성사)>, <책의 민족(교양인)>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