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규 칼럼] 정필도 목사의 설교 (上)
부산 수영로교회를 37년 간 담임했던 정필도 목사의 1주기를 기념해 지난 3월 20일 수영로교회에서 열린 추모 학술대회에서 이상규 교수님(백석대 석좌교수)가 발표하신 ‘정필도 목사의 설교와 선교’ 중 설교 부분을 요약 정리한 부분을 소개합니다. 각주는 생략하였습니다. -편집자 주
시작하면서
정필도(鄭弼禱, 1941-2022) 목사는 우리 시대 한국을 대표하는 목회자이자 설교자로서, 부산 수영로교회에서 37년간 사역하고 2011년 정년 은퇴했고, 2012년 3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는 부산 교계에 큰 영향을 끼친 지도자로서 그의 삶의 여정과 기도, 목회와 설교에 대해 정리해 두는 일은 소중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제목이 암시하는 바처럼 이 글에서는 정필도 목사가 남긴 여러 문헌을 중심으로 그의 설교가 어떠했던가를 정리해 두고자 한다.
필자는 정필도 목사의 오랜 목회 활동과 그의 설교 세계를 다 헤아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을 자인하면서,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위한 그 분의 거룩한 역정(歷程)의 일부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 글은 여러 가지 면에서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필자의 부견(膚見)에 지나지 않지만, 후일 정필도 목사 연구에 작은 토대가 되기를 기대한다.
1. 설교자 정필도 목사
1941년 10월 13일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107번지에서 출생하신 정필도 목사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친구 이범호의 전도로 창신교회에 출석하면서 신앙생활을 시작하였고, 창신초등학교와 경기중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에서 종교학을 공부한 후(1962. 3-1966. 2) 총회신학교에서 목회자 교육을 받았다(1966-1969).
창신교회에 출석하던 그는 서울 서대문구 대현동 소재 신현교회에서 전도사 강도사를 거쳐 1970년 경기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장충교회로 옮겨 사역하던 중(1971-1972), 1972년 공군 군목으로 입대하여 3년간 복무하고 1975년 4월 예편했다.
그해 4월 15일 정해찬 장로의 요청을 받고 부산으로 와 교회 개척을 시작하게 된다. 즉 정필도 목사는 1975년 6월 1일 정해찬 장로의 태창목재 구내식당에서 교회 설립예배를 드렸는데, 이것이 오늘의 수영로교회의 시작이었다. 첫 교회 명칭은 ‘선교교회’였다. 이때부터 2011년 은퇴하기까지 36년간 담임목사로 일했다.
수영로교회 개척 10년이 안 된 1984년에는 광안리에 교회당을 건축하였고, 2001년 해운대구 우3동에 현재의 수영로교회당을 건축하는 등 교회 성장을 이루었고, 교회는 2005년 출석 성도 2만 명에 달하는 대형교회로 성장했다. 서울 영락교회가 우리나라 첫 대형교회였다면, 수영로교회는 부산 지방 첫 대형교회였다고 할 수 있다.
2011년 정년 은퇴와 함께 원로목사로 추대된 정필도 목사는 수영로교회 매주 다섯 차례 예배 중 1부 예배 설교를 담당하였고, 해외선교에 열중하여 외국을 다니며 설교하고 가르치며 선교했다. 그러던 증 코로나19가 유행하게 되자 국내에 체류하여 활동하던 중 2022년 3월 21일 수영로교회에서 46년 간의 목회생활, 82년 간의 지상에서의 삶을 마감하고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소천 되기 5주 전인 2022년 2월 13일 주일 수영로교회에서의 설교가 지상에서의 마지막 설교가 되었고, “적당히 살지 말고 믿음으로 살라”는 유언을 남기고 본향으로 돌아가셨다. 그는 수영로교회에서의 목회 활동 외에도 부산성시화운동본부장, 부산기독교총연합회 회장, 부산세계선교협의회 이사장, 부산 CTS 이사장 및 극동방송 고문 등으로 봉사했다.
설교자로서 그의 삶은 1967년부터 시작되지만 1969년 3월 총회신학교를 졸업하면서 강도(講道) 자격을 얻었고, 1970년 4월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 경기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이후 서울 신현교회 부목사를 시작으로 서울 장충교회(1971-1972)를 거쳐 공군 군목으로 봉사하였고, 1975년 예편이후 수영로교회를 설립하여 일생동안 설교자로 활동했다.
이렇게 볼 때 그는 55년간 설교자로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공식예배인 주일 낮, 주일 오후나 저녁, 그리고 수요일, 곧 일주일에 3번씩 설교한 것으로 산정하면 그는 52년간 8,580회 설교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주일 공식 예배 외에도 각종 집회 등을 고려하면 1만 회 이상 설교했음을 알 수 있다. 새벽기도 설교까지 계상하면 상당한 횟수가 될 것이다.
정필도 목사는 1988년부터 매 주일 분배된 설교문을 묶어 ‘수영로편지’라는 이름으로 합본호를 발간했는데, 2010년까지 24권을 발간했다. 그 외에도 여러 책을 출판했는데 주로 설교 모음집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문헌을 중심으로 하여 정필도 목사의 설교가 어떠했는가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2. 정필도 목사의 설교관
설교는 교회의 고유한 직무라고 할 수 있고, 목사의 수행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의무인 동시에 특권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 책임 또한 중시된다. 이런 점에서 칼빈은 설교를 “교회의 중추신경이자, 그 영혼”이라고 불렀다. 따라서 목회자의 업무 중 우선순위를 두어야 하는데, 정필도 목사는 설교야 말로 그의 사역의 중심이었다. 그렇다면 정필도 목사의 설교관는 어떠했을까?
1) 은혜로운 설교
정필도 목사의 설교관을 보여주는 중심 개념은 ‘설교는 은혜로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은혜로운 설교는 다른 어떤 것보다 우선하는 가치였다. 그는 은혜로운 설교가 행해질 때 교회가 성장한다고 확신했다.
그렇다면 은혜로운 설교는 어떤 설교인가? 은혜란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가 말하는 ‘은혜로운’이란 말을 객관적으로 정의하기 어렵지만, 선포되는 성경말씀에 대한 신앙적 동의와 공감, 이로 인해 주어지는 내적인 감흥이나 감동이 일어날 때 은혜로운 설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은혜로운 설교는 로고스나 에토스적 측면보다 파토스적인 측면이 중시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필도 목사는 목회자는 직무상 어느 한 순간도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로서, “목회 현장에 은혜의 샘이 흘러야 그곳에 목마른 양떼들이 와서 물을 마시고 힘을 얻을 수 있다. 그것이 부흥이다. 그러므로 부흥을 원한다면 은혜가 채워져야 한다”고 말하면서, 은혜 없는 심방, 은혜 없는 성경공부, 은혜 없는 설교에는 소망이 없다고 말한다. 은혜로운 설교는 그가 지향했던 이상적인 설교였다.
이 점은 외적으로도 확인된 바 있다. 수영로교회 성장의 가장 중요한 요인은 정필도 목사의 은혜로운 설교 때문으로 인식했다. 수영로교회는 1975년 6월 교회 설립 후 수적으로 급성장하는데, 1975년 당시 77명이었으나 1977년 말 장년 246명, 주일학생 288명으로 성장했다.
교인 수는 계속 증가하여 설립 4주년이 되는 1979년 출석성도 1,000명으로 성장했다. 1985년 출석성도 1,500명으로, 주일학생 수는 1980년 700명에서 1981년에는 1,000명으로, 1983년 3월에는 1,200명으로 성장했다. 1986년부터 1990년까지 5년은 급성장기로 볼 수 있는데, 1985년 1,500명 모이던 성도가 1986년에는 3,000명으로 성장했는데, 이때 총동원 전도주일 행사가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1992년에는 출석성도가 4,000명으로 증가되었고, 1995년에는 4,400명, 2000년에는 5,328명으로, 2005년 출석성도 1만 2천 명으로 성장했다. 그 이후 교회는 계속 성장해 2011년 정필도 목사가 은퇴할 당시 출석 성도는 2만 명에 달했고, 이런 성장 추세는 후임인 이규현 목사 부임 이후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1985년 당시 수영로교회 성장 원인이 무엇인가에 대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 313명 중 300명이 정필도 목사의 ‘은혜로운 설교’라고 답했다. 이는 응답자의 95.8%에 달했다. 그 외에 정필도 목사의 영적 지도력, 신앙 인격, 체계적인 교인 관리 등이라고 지적했다.
정필도 목사는 설교는 은혜로워야 한다고 보았고, 은혜로운 설교를 위해 항상 노력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는 수영로교회 개척 때부터 말씀 중심의 교회, 은혜중심의 교회, 선교중심의 교회를 지향해 왔다고 말하고 있다.
2) 그리스도의 대사로서의 설교자
정필도 목사는 설교자를 그리스도의 대사(大使) 혹은 대리자로 인식했다. 대사란 보냄을 받은 자요 임무가 부과된 자인데, 그는 항상 자신을 하나님의 대언자라는 인식했다. 따라서 정필도 목사는 설교자에게 메시지를 위탁하신 이는 하나님이라는 분명한 인식을 하고 있었다. 설교자는 자신의 어떤 생각이나 주장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인 기독교의 가르침에 대한 사변적인 추론이나 결론을 말하려고 하지 않고 순수하게 오직 성경의 말씀만 강해하고 선포하려고 노력했다. 이런 점에서 정필도 목사는 설교자를 ‘하나님의 나팔을 대신 부는 자(trumpeter of God)’로 인식했던 존 낙스(John Knox, 1515-1572)와 견해를 같이 한다.
그래서 그의 설교는 항상 진지했고, 세속적 이야기나 여담(餘談), 혹은 농담(弄談)이나 인간적 여흥을 의도하지 않았다. 오늘의 설교가 지나치게 대중영합적이라는 비판이 있고, 말씀에 대한 진지한 추적보다는 인간적 여흥을 의도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경우는 비단 우리나라만이 아니다.
이미 1988년 1월 캐나다 교회사학자인 스탠포드 리드(Stanford Reid)는 “오늘의 예배가 하나님을 향한 예배인가 인간적 여흥인가(The Church Service, Worship or Entertainment)?”라고 묻고 이런 풍조를 개탄한 일이 있다. 그러나 정필도 목사는 청중의 기호를 추수하거나 청중의 요구에 부응하려 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그런 세류를 엿보는 여유로움이 없었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자’였고,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대언자로서,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였다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흔히 설교에서 커뮤니케이션을 중시하여 설교를 설교자와 청중 사이의 상호작용이라고 말하는데, 정필도 목사는 이 점을 완전히 무시한 것은 아니지만 설교의 선포적 기능을 보다 중시했고, 청중의 관점에서 접근하지 않았다.
이런 설교관 때문에 정필도 목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설교를 하도록 부름 받은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설교자는 소명을 받고 훈련을 받은 목사의 직무로 본 것이다. 그래서 그는 각종 기록에서 초등학교 6학년 때 이미 말씀의 사역자로 부름 받았다는 사실을 말하면서 그 이후 목회자로서의 삶을 준비해 왔음을 밝히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이른바 ‘평신도 설교’라고 말하는 현대적 경향을 거부한다. 역사적으로 말할 때 평신도 설교는 반성직주의(反聖職主義)와 관련되어 있고, 교파적으로는 감리교적 환경에서 대두되었다. 특히 성직제도를 거부하는 형제교회(Plymouth Brethren)나 퀘이커(Quakers) 등이 선호한다. 목사가 부재중인 예외적인 상황에서는 평신도가 설교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그것이 일상적인 활동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이런 평신도의 설교 경향에 동의하지 않는 것은 설교자의 소명 문제가 완전히 배제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정필도 목사는 설교자의 내적, 그리고 외적 소명을 중시하는 개혁교회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3) 설교는 지식이나 정보의 전달이 아니라 구원과 성화를 위한 사역
정필도 목사는 설교의 참된 기능은 단순히 성경지식이나 새로운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도리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진리의 영광스럽고 감동적인 말씀을 전달하는 자리라고 보았다. 즉 설교란 구원, 생명, 영적 성숙, 신앙적 삶을 위한 심각한 사역으로 인식했다.
그래서 그의 설교는 언제나 진지하고 앞에서 언급했지만 강단에서 유머를 사용하는 일에 매우 신중했다. 그는 강단에 설 때마다 무거운 마음으로 섰고, 말씀의 선포에서 인간적인 기교(技巧)를 멀리했다.
설교에서 ‘은혜’는 지식이나 정보의 전달로 얻어지는 지적인 동의가 아니라 성령을 통해 말씀하는 진리의 말씀에 대한 주관적 수용과 수긍이었다.
즉 설교의 기본이자 첫째 되는 목표는 성경에 대한 지식이나 신학정보나 신학 이론의 전달이 아니라 청중들로 하여금 살아계신 하나님을 대면하게 하고 그 말씀 앞에 자신의 부끄러운 현실을 인식하게 하고 성화된 삶을 살게 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하나님과의 실존적인 만남을 이루게 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
4) 설교와 설교자의 경건한 생활 중시
그는 설교자와 설교자의 삶을 구분하지 않았다. 설교자는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부름받은 자이며, 보냄을 받은 자이자, 임무가 부과된 자이며, 하나님의 말씀의 대언자라고 인식했기 때문에 설교자에게는 이런 소명에 합당한 삶이 요구된다고 보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택하여 부르시고 사명을 주시면, 그에 맞는 훈련을 시키십니다. 그 과정에서 제자가 되고, 선생이 되고, 목회자가 됩니다. 설교자는 탁월한 지식이 있어야 하지만, 먼저 제대로 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목회하면서 늘 깨닫는 것은 사람됨의 여부, 즉 인격의 거룩함과 진정성이 뒷받침되지 못하면 어떤 사역에서도 좋은 열매를 거둘 수 없다는 점입니다. 그런 면에서 목회자인 동시에 설교자인 목사는 강단에서 외치는 소리와 강단 아래의 삶이 일치하지 않으면 그의 설교는 허공을 치는 메아리에 불과합니다.”
그가 말하는 ‘제대로 된 사람’이란 신앙인격을 구비한 설교자를 의미하는데, 그 설교자의 삶이 설교에 능력을 더 한다고 말하고 있다. 법률가는 법조문을 가지고 사안을 판단하기 때문에 법률가에게 반드시 도덕적 순결을 요구할 수 없지만, 설교자에게는 선포하는 설교에 부합하는 삶의 모범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이럴 때 설교가 권위를 지니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미국의 성공회 설교자 필립스 브룩스(Philips Brooks, 1835-1893)는 ‘설교는 인격을 통과한 진리’여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신앙인격을 갖춘 설교자의 삶을 정필도 목사는 ‘경건’이라고 말하고 있다. 경건(敬虔)을 라틴어로는 피에타스(pietas)라고 하는데, 종교개혁자들은 중세에 흔히 사용되던 ‘헌신(devotio)’이라는 말을 ‘경건’으로 대체하였다.
그래서 개혁자들은 경건이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과 그 실천”으로 이해했는데, 칼빈은 하나님의 은총을 알도록 깨우쳐 주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결합된 경외심을 경건이라고 불렀다. 칼빈은 부연하여, 경건이란 하나님을 여호와와 아버지로 인식하고 그를 고귀하게 여기고 그의 명령을 헤아리고 그의 위엄을 바라보고 그에게 영광을 더하도록 마음을 쓰고 그의 명령에 순종하는 삶이라고 말하고 있다.
정필도 목사가 말하는 경건도 이와 다르지 않다, 일상의 삶에서 기도와 말씀으로 무장하고 그 말씀 가운데서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고자 하는 의지를 경건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교역자가 경건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성령도 떠나지만 성도들의 존경도 떠나게 되어 있다. … 교역자를 빛나게 해 주는 힘은 역시 경건이다. 경건의 힘과 능력만이 목회의 진정한 파워를 만들어낸다.”
또 그는 교역자에게는 경건이 생명이라고 말하면서, “경건을 잃어버린 건 그냥 죽은 것이다. 죽은 사람은 소망이 없고 생명이 없고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 경건을 잃어버린 것은 생명을 잃어버린 것과 같다. 얼마나 경건하냐에 따라서 그 목회에 그만큼 파워가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종은 다른 것은 부족해도 경건만은 사수해야 된다. 말을 좀 잘 못하고, 설교를 신통치 못하게 하고, 뭐 학벌도 보잘 것 없고, 인물도 못났고 그렇다 할지라도 아주 경건한 삶을 살면 그거 하나 때문에 얼마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정필도 목사는, 설교자가 경건하게 살지 않으면 은혜로운 설교를 할 수 없다고 보았다. 실제로 정필도 목사는 분명한 윤리적 표준을 가지고 살며 가르쳤고, 물질에 취심하거나 탐하지도 않았다. 외부 집회 후 받은 사례금은 전액 교회에 헌금하여 모범을 보였다고 한다. 그는 일용할 양식을 살았다. 이것이 그의 경건한 삶이었다. 이런 삶의 태도가 자신의 설교를 더욱 은혜롭게 만들어주는 토대가 되었다.
이상과 같이 정필도 목사는 설교가 무엇인가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설교에 대한 잘못된 개념은 결과적으로 잘못된 설교를 행하기 때문에 참된 교회 건설과 교회 부흥을 위해서는 바른 설교관을 정립해야 한다고 보았다. <계속>
이상규 박사
고신대학교 신학과(ThB), 신학대학원(MDiv), 대학원(ThM)
호주 장로교신학대학(PTC) 수학
호주신학대학(ACT) 신학박사(ThD)
고신대학교 신학과 교수(1983-2018)
현 백석대학교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