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성록, 한 점의 그림]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생명의 소망’
암울한 사람들에 소망 주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
부활이 온 인류 함께할 축제라면
부활 메시지 각 공동체에 알려야
렘브란트 판 레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에 대한 평가 가운데 하나는 “네덜란드뿐 아니라 온 세계가 낳은 유일하고 위대한 성경 화가(Visser't Hooft)”라는 말이다.
이 같은 탁월함에 대한 평가는 그의 작품 제작 태도에서 찾을 수 있으리라 본다. 렘브란트가 그림을 그릴 때 무엇보다 중요시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자 하는 그의 경건한 마음가짐이었다.
그러므로 그에게 하나님의 뜻이 계시된 성경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보여주는 생생한 증언이자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개인적 취향을 앞세우기보다 성경에 담긴 내용을 잘 전달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점은 ‘다시 사실 그리스도’를 테마로 한 작품에서도 찾을 수 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뒤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제자들은 자신도 예수님처럼 죽지 않을까 커다란 두려움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예수와 함께 엠마오 길을 걸어감>(소묘, 1655)에서 보듯 두 제자도 두려움과 상실감에 휩싸여 예루살렘에서 고향 엠마오로 가던 중 어떤 사람을 만난다. 그리고 그 분으로부터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아 영광에 들어감으로써 구약의 예언을 이루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들이 만난 사람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으나, 예수님과 식사를 할 때 자신들을 축복하시고 떡을 나누어주시는 것을 보고 비로소 예수님임을 깨달았다(눅 24:13-32).
<엠마오에서의 식사>(유화, 1648)는 두 제자가 예수님을 알아보는 바로 그 순간을 옮긴 것이다. 화가는 불필요한 곳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게끔 배경을 단순하게 처리하였다. 대신 네 인물이 등장하는데, 화면 중앙에 예수님을 비롯하여 좌우에 각각 제자 한 명씩, 그리고 시중드는 인물이 눈에 띈다.
그들은 떡을 떼는 순간 심령이 밝아져, 떡을 데는 인물이 그들이 따르던 예수님을 알아차렸다. 왼편의 제자는 손을 얼굴에 갖다대며 짐짓 놀라는 기색이고, 오른편의 제자는 몸을 뒤로 젖히며 움찔하고 있다.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 순간의 놀라움을 동시에 전달해 준다.
미술사학자 크리스티안 튐펠(Christian Tümpel)이 주장하기를 화면에서 벽감과 식탁은 교회 예배당과 제단, 초대교회 성만찬을 연상시킨다고 분석하였다. 그의 말이 옳다면 이 식사는 음식을 나눔으로써 주님의 만찬을 시연하는 초기 기독교의 성례를 알려준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고(행 2:42)”,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는(행 2:46)” 의식을 자주 행했다.
그림에서 보다시피 예수님은 유대인 가정의 주인이 안식일과 휴일에 그랬던 것처럼 ‘브레이드 샬라(braided challah)’ 빵을 제자들에게 떼어주고 있다. 렘브란트는 성경의 이해는 물론이고, 유대인의 생활방식에 대한 통찰을 가지고 그림을 제작하였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 그림에서 렘브란트는 예수님을 매우 겸손하고 온유한 분으로 그리고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을 과장 없이 재현하기를 원했던 탓도 있다. 성경에 기록된 것처럼 예수님을 “연한 순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게(사 53:2)” 묘사하기를 원했던 것 같다.
짧은 수염, 수척한 얼굴, 둥그런 눈, 갈색의 머리카락, 야윈 몸…, 렘브란트가 품고 있었던 예수님의 이미지가 너무나 평범하다는 사실에 우리는 놀라게 된다.
렘브란트는 예수님을 인간적으로만 묘출하는데 그쳤을까? 그렇지는 않다. 예수님을 인자로 그렸던 것은 예수님을 사실 그대로 전달하기 위한 의도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분은 인간의 옷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셨다. 예수의 뒤쪽에 드리운 빛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우리의 구주가 되신다는 표시로 읽힌다.
몇 년이 지나 렘브란트는 <엠마오에서 식사>(에칭과 드라이포인트, 1654)를 다시 그리지만, 앞의 유화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중앙의 예수님을 중심으로 제자들의 동작이 눈에 띄게 커졌고 시중을 드는 인물은 예수님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감상자의 시선이 예수님에게만 집중하도록 계획되었다.
이 소묘에서 가장 주목할 부분은 역시 예수님으로부터 나오는 빛의 유출이다. 종전에 보던 동그란 후광 대신 렘브란트는 빛을 사용하여 그분의 신성을 나타내고자 했다.
이 점은 <사도들에게 나타난 그리스도>(에칭, 1656)에서도 똑같이 발견된다. 이 판화 작품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열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기록(눅 24:36-39)에 근거하여 제작된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이 나타나셨을 때 제자들은 놀라고 무서워하여 쉽게 믿으려 하지 않았다. 렘브란트는 예수님께서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눅 24:39)”고 말씀하시는 장면을 그렸다.
이 그림에서 단연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예수님 주위의 빛줄기이다. 후광을 빛으로 대신함으로써 그 분이 부활하신 구세주요 만군의 왕임을 암시하고 있다. <엠마오에서의 식사(그림 1)>가 젊은 예수를 표현했다면, <엠마오에서 식사(그림 2)와 <사도들에게 나타난 그리스도(그림 3)는 좀더 위용 있게 그리스도를 표현하였다. 그것은 당연하게도, 십자가에 처연하게 달리신 예수께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무너뜨리시고 다시 살아나신 주님의 권능을 나타내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네덜란드 학자 휴고 흐로티우스(Hugo Grotius)는 많은 목격자들이 경험한 예수님의 부활 기적이 기독교 전파와 신앙 심화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고 했는데, 렘브란트가 앞에서 보았듯 여러 점의 부활 그림을 그리게 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김영한 교수가 지적했듯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여 고통 가운데 살아가는 인간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가히 충격적이면서 또한 경이로운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인간의 죄와 사망의 고리를 끊어내시고 ‘진정한 생명의 소망’을 보여준 실로 엄청난 사건이었다.
렘브란트의 그림이 주는 메시지도 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분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무거운 굴레에 묶여 암울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소망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안타깝게도 여전히 갈등은 거대하지만 희망은 보잘것없어 보이는 시대 속에 살고 있다. 세상에는 절망적인 일들로 넘쳐나며 하루라도 바람 잘 날이 없다.
포스트 코로나의 후유증으로 육체적·경제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 전쟁의 참화로 슬픔에 빠진 우크라이나 국민들, 지진으로 가족을 잃은 튀르키예 국민들, 식량난과 가혹한 인권 유린으로 신음하는 북한 동포들, 날로 높아가는 생태 위기의 신호 등.
예수님의 부활이 기독교인들뿐 아니라 인류가 함께 해야 할 축제라면, 부활의 메시지가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도 널리 알려져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의 소망’을 품을 수 있도록 기도하며 힘을 모아야 하지 않을까?
서성록 명예교수(안동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