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목자교회 담임 취임한 김다위 목사 (上)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삶’, ‘예수님의 사람 제자훈련, 예수동행 운동’ 등으로 한국교회에 큰 반향을 일으킨 선한목자교회 유기성 목사가 65세로 조기 은퇴했다. 유 목사는 교인들 간 분쟁을 겪던 교회에 2003년 부임해 빠르게 안정시켰을 뿐 아니라 5백여 명이던 교회를 20년 간 1만여 명으로 성장시켰고, 다수 형제교회들의 분립개척을 지원하기도 했다.
2022년 11월 마지막 주일 설교를 마친 유기성 목사와 지난 1년 반 가까이 함께 목회하며 배턴을 이어받은 이는 ‘빠른 80년생’ 김다위 목사다. 선한목자교회는 무려 7년간 후임 목사 청빙 과정을 거쳐 만장일치로 김 목사를 선정했다. 선한목자교회 부교역자였던 김 목사는 감신대와 대학원 졸업 후 미국 유학을 떠나 세인트폴신학대학에서 목회학 석사를 마치고 2021년 5월 듀크대에서 목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유학 시절인 2011년 7월 미국 UMC 부활의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했고, 캔자스 한인중앙연합감리교회로 옮겨 사역했다. 이 교회는 많은 어려움으로 20명도 채 모이지 않았으나, 부임 후 김 목사는 갈등을 수습하고 8년 후 200여 명이 모이는 교회가 됐다. 유기성 목사와 닮은꼴 여정인 셈.
지난 16일 취임예배에서 김다위 목사는 “예수님과 동행하고 예수님과 닮아가는 교회, 하나님 마음에 합한 교회, 넓은 문이 아니라 좁은 길을 걸으며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고 원수까지 사랑하는 교회, 이 세상의 절망 가운데 부활의 산 소망을 드러내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한다”고 말했다. 다음은 취임 직전인 지난 12일 선한목자교회 담임목사실에서 진행된 김다위 목사와의 인터뷰.
유기성 목사 후임 부담·무게감 커
초반 몇 년 잘 적응하고 계승할 것
선한목자 청빙, 감당할 수 없는 일
곧 하나님께서 하신 일임도 분명
왜 나를 부르셨을까, 겸손과 감사
부르셨기에, 감당할 힘도 주실 것
-취임을 앞두신 소감과 마음가짐이 어떠신가요.
“일단 유기성 목사님 후임으로 섬기는 것 자체에 대한 부담감과 무게감이 있습니다. (후임자로서) 선한목자교회에 온 지 1년 반 정도 지났지만, 정말 사람이 할 수 없음을 느낍니다. 물론 모든 목회가 그렇지만, 더욱 그런 부담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동시에 주님께서 부르셨기 때문에, 감당할 힘도 주신다는 믿음으로 감당하고 있습니다.
선한목자교회를 향한 많은 분들의 기대와 교회가 해오던 좋은 사역과 영향력들이 있기에, 잘 이어가는 것이 일단 가장 중요한 과제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초반 몇 년간은 교회에 잘 적응하고 어려움 없이 리더십을 승계하는 과정에 집중하고, 이후 잘 안정되면 새로운 사역들을 해나가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저를 부르신 주님께 너무 영광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좋으신 분들이 너무 많고 감당할 수 있는 분들이 참 많은데 왜 나를 부르셨을까 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그래서 겸손한 마음과 동시에 감사한 마음으로 서 있습니다.”
-8년 동안 계셨던 미국 사역지를 떠난다는 것도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미국에서 11년째 생활하고 있었고, 아이들도 첫째는 한두 살 때 미국에 가서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막내는 미국에서 태어났기에, ‘이제 미국에 남아야겠다’ 하는 마음으로 살다가 다시 돌아오게 됐습니다.
미국 교회도 8년 동안 너무 정이 들고 평생 목회한다는 마음이었기 때문에, 헤어지는 것도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목회는 교인들과 목회자가 결혼하는 것이라는 비유까지 들지 않습니까. 한편으로 미국에서도 주님께서 부르셨고, 가라고 하실 때는 어디든 언제든 가야 한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선한목자교회에서 청빙을 받았을 때도, 이건 말도 안 되고 제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분명하니까 하나님이 하신 일이 맞을 것 같았어요. 하나님께서 보내시면 하나님 뜻이 있으시겠다고 해서, 한국으로 돌아오기로 결정했습니다.
제 생각과 능력과 환경을 따졌으면 아마 오지 못했을 것 같고, 주님께서 부르셨다는 확신이 있어서 나오게 된 것 같아요. 한국에 들어올 때 아이들 적응이나 학업 등 여러 걱정은 많았지만, 그 모든 것조차 주님께서 다 예비하셨음을 믿고 나왔습니다.
가장 어려운 부분은 이전 교인들과의 관계였습니다. 마지막까지 저도 많이 울었고, 교인들은 축복해 주면서도 울었습니다. 시간이 흐른다고 잊힐 것 같진 않습니다. 여전히 마음의 빚이 있지요. 지금도 성도들을 생각하고 종종 기도합니다. 언젠가 방문하게 되면 꼭 다시 인사드리고 싶습니다. 또 교회가 잘 세워져서 너무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전에 사역하셨던 이민교회가 겪던 갈등을 어떻게 수습하셨는지 궁금합니다.
“내러티브 설교를 대중화시킨 유진 라우리(Eugene L. Lowry) 교수님께 배우고 싶어 미국 세인트폴 신학대학원에 공부하러 갔습니다. 그리고 근방 UMC 교회 중 가장 사역을 잘하는 ‘부활의교회’에서 배우고자 사역을 시작했는데, 목사님 두 분이 나가시면서 어려워진 캔자스 한인중앙연합감리교회에서 청빙 연락이 왔습니다.
처음엔 목회하러 온 게 아니고 유학 후 한국에 돌아가야 한다고 말씀드리면서 고사했는데, 그때 가정사가 있었어요. 뱃속 막내가 다운증후군으로 태어날 가능성이 있어 기도하던 차에, 이것도 함께 기도하기로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면 순종하겠다고 기도하다, 부임하게 됐습니다.
갔는데 성도 열두 분이 세 파로 나뉘어 싸우고 갈등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두 교회를 사랑하는 분들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다시 살리시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물론 제가 교회를 살릴 순 없습니다. 주님의 교회이니 주님이 살리시리라는 믿음으로, 제가 한 일은 하나님의 임재를 그분들이 느끼고 경험할 수 있도록 예배를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이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집중을 많이 했습니다.
설교학에서 ‘엿듣기’(Overhearing)라는 것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의 비유 같은 경우죠. 직접적으로 ‘회개하세요’ 하고 말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어, 내 이야기인데?’ 하고 듣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편하게 듣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 미워했구나. 용서하지 못했구나’ 하면서 치유와 화해가 일어날 수 있는,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사랑하신다’는 메시지를 계속 전했습니다.
그리고 기도회를 통해 서로 용납하고 용서하게 되면서 회복이 된 거예요. 그렇게 소문이 나면서 사람들이 다시 오게 되었습니다. 저희가 한 거는 그냥 예배 잘 드릴 수 있도록 한 것뿐입니다.”
이민교회 8년간 ‘성육신적 사역’
성도 ‘같은 부르심’ 제자 여기니
오히려 목회자들 더 세워주더라
하우어워스·윌리몬 교수에 수학
-다른 부분은 없었나요.
“또 한 가지는 목회자의 신뢰도가 워낙 바닥이었기에, 강단 메시지와 삶이 다르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민 사회는 다 알아요. 목회자의 삶을 다 알게 됩니다. 제게도 도전이었습니다. 강단에서는 목사인데, 내려와서 목사가 아니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결국 저 자신도 깨져야 됐던 부분이 있었어요. 한국에 있을 때는 비교적 큰 교회에 있다 보니 저도 모르게 섬김을 받는 데 익숙해져 있었어요. 하지만 이민교회 가면 모든 걸 다 섬겨야 합니다. 그래서 (목사) 가운을 벗고 성도들과 함께했습니다. 공항 라이드도 함께 하고, 어디든 함께 가고, 식사도 같이 하고, 누가 이사를 가면 같이 짐 나르고, 졸업식 같은 성도님들 가정사도 같이 축하해 줬습니다.
이러한 성육신적 사역이 중요하다고 믿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성도님들이 ‘목사가 그렇게 나쁘지는 않구나’ 생각했으리라 봅니다. 그러면서 메시지가 성도들에게 더 받아들여진 것 같습니다. 목회자에 대한 불신이 워낙 강했기에, 그들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는 데 한 4-5년 걸렸다고 느껴집니다. 그때부터 교회가 급성장하게 됐습니다.
‘나 목사인데’가 아니라, ‘당신도 나도 똑같이 하나님 자녀이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제자’라는 마음으로 함께했습니다. 그렇게 제 모든 권위를 다 내려놓으니, 오히려 성도님들이 목회자를 더 세워 주셨습니다. 여기서도 그 마음으로 목회하려 합니다.”
-박사 학위는 듀크대에서 스탠리 하우어워스와 윌리엄 윌리몬 교수 밑에서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Resident Aliens)>을 함께 쓴 유명한 학자들로 알고 있는데, 관련 주제로 논문도 쓰셨죠.
“듀크로 간 것은 두 분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하우어워스 교수님은 은퇴하셨고, 윌리몬 교수님도 감독직을 하셔서 수업을 맡지 않으셨지요. 알고 갔지만, 놀랍게도 2018년 가을 입학했을 때 윌리몬 교수님이 복귀하셔서 제 목회학 박사 디렉터이자 어드바이저가 돼 주셨어요. 참 놀라웠습니다.
하우어워스 교수님도 은퇴를 하셨지만, 박사 과정 리더십 수업을 하셨어요. 큰 기대 없이 갔는데 두 분 수업을 다 들을 수 있었습니다. 논문도 부탁드리고 싶었는데, 은퇴 후라 지도를 안 하신다는 거예요. 그래서 윌리몬 교수님께 섭외를 부탁드렸더니, 하우어워스 교수와 친하다면서 바로 이야기해 주셨어요. 하우어워스 교수님은 외국인(Aliens)임을 감안해 특별히 지도를 해주셨고, 격려도 많이 해주셨습니다.
윌리몬 교수님은 굉장히 유머가 많으신 분이예요. 하시는 말씀 중 50%는 다 농담입니다. 굉장히 여유가 있으신데, 그 위트 속에 통찰이 있어요. 설교도 그렇게 하셨지요. 제게는 많은 배려를 해주셨어요. 두 분에게 배운 것은 제게 굉장히 큰 은혜였죠.
에피소드가 있다면 하우어워스 교수님이 그 책에서 ‘식민지(colony)’라는 표현을 쓰셨어요. ‘하나님 나라의 식민지’라는 교수님 표현은 하나님 나라라는 대제국에 속한 도시로서 자부심을 가지라는 의미이지만, 우리 한국인 입장에서 ‘식민지’라는 표현은 그렇게 다가오지 않잖아요. 그 말씀을 드렸더니, ‘그럴 수 있겠다’면서 원래 의도를 다시 설명해 주셨어요.”
유기성 목사, 제 결정과 선택 존중
같은 본문으로 설교, 원고 공유도
많이 전할 수 없으니 ‘원 포인트’로
-청빙 후 유기성 목사님과 함께 목회하셨는데, 정말 소중한 경험일 것 같습니다. 어떤 점을 배우게 되셨나요.
“1년 반 동안 참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설교와 목회부터 리더십, 회의, 장로님들과의 관계, 그리고 행정적인 면들까지 말씀해 주셨어요. 먼저 말씀해 주신 것도 있지만, 제가 여쭤본 것들이 훨씬 많았죠.
굉장히 감사했던 부분은 후임자에게 절대 부담을 주지 않으려 하셨다는 것입니다. 후임자의 결정과 선택을 존중할 수 있는 방향을 유지하셨어요. ‘내가 이렇게 했으니 목사님도 이렇게 해야 합니다’가 아니라, ‘나는 이렇게 했는데 참고하세요’ 하는 관점으로 늘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제가 여쭤본 사안에 대해서는 상세히 다 말씀해 주셨습니다. 굉장히 마음이 편하게 해주셨습니다. 함께 목회하던 기간, 어떤 분들이 ‘왜 이렇게 살이 빠졌냐?’고 하셨어요. 정말 잘 지내는 것 맞느냐고요(웃음). 저는 정말 잘 지냈습니다.
같은 요한복음 본문으로 설교했는데, 처음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매일 목사님과 설교 원고 진행 상황을 주고받았습니다. 유 목사님이 월요일에 먼저 초안을 보내 주세요. 묵상 주제가 절반 정도는 같았어요. 그렇지만 그냥 교환만 했지, 원고에 대한 어떠한 이야기도 없었습니다. 그냥 서로의 원고를 참고했습니다.
보내 주신 설교 원고에서 교회 차원에서의 방향성은 맞춰가고, 포인트가 전혀 달라도 서로 존중했습니다. 성도님들은 같은 본문을 다르게 보면서도, 크게는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간들이 개인적으로 매우 유익했습니다.
4개월 정도를 그렇게 하고, 이후에는 굳이 설교 원고를 공유하진 않았습니다. 유 목사님과 제가 설교 준비하는 패턴이 좀 달랐거든요. 목사님은 월요일에 이미 원고의 약 50%를 쓰시고 하루씩 완성도를 점점 높여가는 스타일이라면, 저는 요리할 때 재료를 모으듯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는 재료를 계속 모으고, 금·토요일에 본격적으로 요리를 하는 스타일입니다. 어쨌든 설교 원고를 나누는 과정이 굉장한 도움이 됐습니다.”
-설교에 대해 강조하신 점이 있으셨을 것 같습니다.
“직접적으로 말씀하신 건 거의 없었고, 간접적으로 말씀하시거나 예수동행일기 때 말씀해 주십니다. 항상 이야기하시는 부분은 말씀을 준비하다 보니 전하고 싶은 말씀이 많지만, 결국 많이 전할 수 없으니 하나만 제대로 전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부목사님들과의 모임 때도 ‘원 포인트’, 하나를 제대로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항상 강조하십니다.
저도 원 포인트를 전하면서 기승전결이 있는 내러티브 스타일이고, 유 목사님은 원 포인트가 초반부터 나오고 예화 등으로 나머지를 풀어가는 스타일이십니다. 동일한 ‘원 포인트’이기에, 큰 이견이 없었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