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원 칼럼] 고대 이집트의 마지막 통치자, 클레오파트라 이야기 3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와 투쟁
안토니우스, 이집트에 지원 요청
클레오파트라, 안토니우스와 임신
안토니우스와는 이름 다르게 지어
3. 카이사르 사후
카이사르는 유언장에 카이사리온을 자신의 후계자로 지정하지 않았다. 그의 조카 옥타비아누스(주전 63- 주후 14)가 카이사르의 후계자가 된다.
하지만 곧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사이에 권력 다툼이 벌어진다. 안토니우스는 권력 다툼에서 이기기 위해 이집트의 재정 지원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이집트의 곡물은 로마 경제의 엔진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클레오파트라에게 타르수스(Tarsus, 현 터키 남부 도시, 바울의 출생지)에서 만나자고 긴급 요청한다. 하지만 클레오파트라는 서두를 이유가 없다. 화려한 배를 타고 느리게 타르수스로 건너간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그 배는 떠다니는 궁전이었다. 보좌, 테이블, 그릇 등은 모두 금으로 되었고 노 젓는 사람들도 모두 천사처럼 분장하고 있었다고 한다. 클레오파트라는 이렇게 화려한 배를 타고 나타난다.
로마 장군 안토니우스는 그런 배를 전에 본 적이 없다. 그리고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를 선상 연회에 초대한다. 그들은 화려한 가구에 앉아 황금 접시, 포크 등을 사용하며 파티를 즐긴다. 그리고 진주를 포도주에 담가 녹여 그것을 마셨다고 한다.
실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얼마나 화려한 파티였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선상 연회에 참여한 로마 손님들에게 원하는 물건을 가져가도록 허락했을 정도로, 클레오파트라는 그 연회를 통해 자신의 부와 영광을 과시하기 원했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화려함에 매료당한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보다는 거칠고 교육받지 못한 로마 군인이다. 그리고 욕망도 가졌다. 재미있는 것은 클레오파트라에게도 그런 측면이 있었다는 것이다.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는 이집트로 돌아가서 ‘흉내 낼 수 없는 간(inimitable Livers·肝)’이라 불리는 비밀 연회를 즐겼다. 형식상으로는 그리스 주신 디오니소스를 위한 종교 모임이지만, 그곳에서 그들은 친구들과 방탕한 파티를 즐겼다.
곧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의 쌍둥이를 임신한다. 카이사르의 아이를 임신했을 당시, 그녀는 아이의 이름을 카이사리온 즉 ‘작은 카이사르’로 명명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그녀는 쌍둥이를 안토니우스를 따라 이름 짓지 않는다. 남자 아이는 알렉산더 헬리오스(태양)으로, 여자 아이는 클레오파트라 셀레네(달)로 이름 짓는다. 그녀는 안토니우스를 사랑했을지 모르지만, 그가 영웅이 아닌 별 볼 일 없는 평범한 사내라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
클레오파트라, 알렉산더의 꿈 좇아
안토니우스, 버렸다가 다시 호출
동방 원정 승리, 로마 이집트 경계
옥타비아누스, 이집트 침공 나서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의 진짜 영웅인 알렉산더 대왕을 기억하기 원했다. 그녀의 자녀들이 알렉산더 대왕의 꿈을 이어 가길 원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가는 마케도니아 왕들의 후예 아닌가? 그녀의 자녀들이 로마인 아버지를 닮기를 원치 않았다.
또 권력을 위해 형제 죽이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프톨레마이오스의 선왕들도 닮기를 원치 않았다. 그녀의 영웅 알렉산더 대왕을 닮기 원했다.
한편, 안토니우스는 로마로 돌아가 옥타비아누스의 여동생과 결혼한다. 물론 이것은 정략 결혼이다. 하지만 이 소식을 들은 클레오파트라는 다시 한 번 버림받았다고 느낀다. 세 명의 자녀를 기르고 있는 여자가 다시 한 번 남편이라고 믿었던 남자로부터 버림받았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는 여전히 이집트의 왕이다. 그녀에게는 여전히 큰 힘이 있다. 3년 후, 안토니우스가 동방 원정을 나온다. 그리고 이 전쟁을 위한 재정 지원을 얻기 위해 3년 전 버린 클레오파트라에게 다시 연락한다.
“우리, 이야기 좀 할까?”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마음 같았으면 거절하겠지만,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의 왕권이 로마의 지지에 크게 의존함을 잘 알고 있다. 클레오파트라는 시리아에서 안토니우스를 만나기로 약속한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다. 다시 당할 바보가 아니다.
그녀는 안토니우스와 일종의 협상을 한다. 클레오파트라가 전쟁 재원을 공급하면 안토니우스는 그녀와 결혼해야 하며, 전쟁에 승리하면 그가 얻은 땅의 대부분을 클레오파트라에게 양도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클레오파트라는 시나이 반도, 유다, 키프루스 섬, 아라비아 반도를 얻게 될 것이다.
반면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남편이지만 이집트의 왕은 되지 못할 것이고, 여전히 카이사리온이 이집트의 왕으로 남을 것이다. 이쯤 되면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갑을 관계는 완전히 역전된 듯 하다.
이렇게 시작된 동방 원정에서 안토니우스의 군대는 고전한다. 그때 클레오파트라는 군대를 보내 그를 돕는다. 안토니우스의 로마인 아내 옥타비아도 전쟁을 돕겠다고 왔으나, 안토니우스는 그녀와 이혼하고 그녀를 로마로 돌려보낸다(주전 32년). 이로서 클레오파트라가 안토니우스를 독점하게 된 것이다.
그 후 안토니우스 군대는 동방 원정에서 승리하고 그것을 기념하는 축제를 알렉산드리아에서 열었다. 그때 클레오파트라는 이시스로 분장하고, 그녀의 자녀들은 다양한 지역의 왕들의 모습으로 출연했다.
그 자리에서 안토니우스는 약속한 땅들을 클레오파트라 일가에게 공식적으로 양도하였다. 장남 카이사리온은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이집트를 다스리고, 알렉산더 헬리오스는 아르메니아와 폰투스 지방을 얻고, 클레오파트라 셀레네는 리비아를 받고, 프톨레마이오스 소테르(클레오포타르와 안토니우스 사이에 태어난 세 번째 아들)는 페니키아와 북부 시리아를 얻게 됐다.
로마, 클레오파트라에게 선전포고
악티움 전투 패배, 이집트 돌아가
안토니우스 넘기라는 제안 거절해
생포됐지만 독사 통해 목숨 끊어
이로서 클레오파트라의 자녀들은 땅을 받아, 미래의 안정을 보장받았다. 이 모든 것은 어머니 클레오파트라가 각본을 쓰고 직접 감독하여 모두 현실로 만들어 낸 것이다.
이때부터 로마는 안토니우스가 아닌 클레오파트라를 두려워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로마 장군 안토니우스를 홀려서 마땅히 로마에게 돌아가야 할 땅과 영광을 가로챘다. 그리고 옥타비아누스가 이 모든 상황을 끝내기 위한 전쟁을 선포한다. 그는 안토니우스가 아니라 클레오파트라에게 선전포고를 한다.
주전 31년 9월 2일 악티움에서 전투가 벌어진다. 이 전투에서 안토니우스-이집트 연합 군대가 패배한다. 클레오파트라는 선상에서 전쟁을 지켜보다, 패색이 짙어지자 이집트로 돌아간다. 안토니우스도 침몰하는 배를 몰고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왔다.
옥타비아누스는 알렉산드리아를 포위하고 클레오파트라와 협상한다. 안토니우스를 넘겨주면 휴전하겠다고 제안한다. 하지만 클레오파트라는 이것을 거부한다.
왜 그랬을까? 지금까지 클레오파트라는 로마 정부에 한 번도 저항한 적이 없다. 이집트를 버릴 정도로 안토니우스를 사랑했을까? 그것이 아니라면 왜 옥타비아누스의 제안을 거절했을까?
여하튼 옥타비아누스는 군대를 데리고 도시 안으로 진입한다. 클레오파트라는 자살을 준비한다. 그녀는 절대 포로로 살지 않을 것이다. 앞서 그녀의 여동생 아르시누에가 쇠사슬에 매여 조롱당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안토니우스에게 자신이 죽었다는 가짜 뉴스를 전한다. 그 소식을 들은 안토니우스는 자살을 시도하지만 실패한다. 클레오파트라가 그 소식을 듣고 그를 데려오고, 안토니우스는 그녀의 품에서 죽는다.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를 생포해 로마로 데려가기 원했다. 하지만 그녀는 독사를 몰래 들여와 자신의 몸종들과 함께 죽는다. 이 소식을 들은 옥타비아누스는 매우 분노했지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해진다. “나는 이집트를 로마인들의 제국에 편입시켰다.” 이렇게 고대 이집트 문명이 대장정의 막을 내린다.
김구원 교수
단국대 사학과 고대문명연구소 연구원
저서 통독주석 <사무엘상>과 <사무엘하>, <김구원 교수의 구약 꿀팁>, <쉬운 구약 개론(공저, 이상 이상 홍성사)>, <가장 아름다운 노래> 등
역서 <하나님 나라의 서막>, <이스라엘의 종교>, <이스라엘의 성경적 역사>, <고대 근동 역사>, <고대 근동 문학 선집(공역, 이상 CLC)>, <구약 성서로 철학하기>, <에스더서로 고찰하는 하나님과 정치>, <출애굽 게임(이상 홍성사)>, <책의 민족(교양인)>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