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 위해 자신의 피 뽑은 의사
가장 좋은 가운데 토막 하나님께
잘나가던 병원 닫고 의료 선교
30여 년간 제3세계 돌며 봉사해
영화 <소명 3>의 실제 주인공인 ‘히말라야의 슈바이처’ 강원희 선교사(姜元熙·89)가 지난 26일 오후 4시 경 노환으로 소천받았다.
함경북도 성진에서 태어난 강원희 선교사는 6.25 전쟁 당시 전쟁의 비참함을 체험했다. 그는 당시에 대해 “한국은 1950년 6·25 사변 때 다 망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외국의 많은 젊은이들이 목숨을 걸고 싸운 희생 덕분에 지금 넉넉한 삶을 살고 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세브란스(현 연세대) 의대에 입학한 강 선교사는 슈바이처 박사의 전기를 읽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의대에 다닐 때부터 무의촌 의료봉사에 힘썼던 그는 1961년 연세대 의대 졸업 후 1970년 말 무의촌이나 다름없던 강원 간성에 이어 속초에 병원을 개업해 10여 년간 운영했다.
다른 도시에서도 찾아올 만큼 유능한 외과의사였지만, 간신히 목숨을 건진 교통사고를 비롯해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일들을 겪으면서 이전에 품었던 의료 선교에 대한 부담을 다시 품게 되었다.
은혜를 갚겠다는 마음으로 병원을 정리한 후 선교사가 됐다. 고1·2 자녀를 두고 선교사가 되려는 그를 가족이 말리자 “인생을 하나님께 바치고 싶은데, 생선에 비유하면 머리와 꼬리가 아니라 가장 좋은 가운데 토막을 바치고 싶다”고 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1976년 속초를 방문한 한경직 목사의 권유로 간호사 출신 아내 최화순 권사와 49세 때인 1982년 세브란스 출신 1호 의료선교사로서 네팔로 떠난다. 당시 최빈국이라 의료 등 모든 면이 낙후돼 있던 네팔 히말라야로 선교의 첫발을 내딛은 것.
당시 네팔은 공산당이 득세했고, 서점에는 김일성 책 천지였다. 그는 매 주말 산동네를 찾아다니며 중병에 걸리거나 다쳐도 병원에 올 수 없는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고쳤다. 출산부터 중환자 수술까지 거의 모든 환자를 돌봐야 했다. 하루 15-16시간을 걸어 환자를 만날 때도 있었다.
환자들은 “이상하게 닥터 강이 치료하면 염증도 안 생기고 잘 낫는다”고들 했다. 이에 대해 그는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낮에는 환자들을 돌보고 밤에는 잘 시간을 쪼개가면서 현지 언어도 익혔다고 한다. 틈나는 대로 귀국해 국내 대형 병원에서 새로운 의료 기술을 익히는 일에도 힘썼다. 실력이 없으면 환자를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
네팔에서 10여 년 외에도 방글라데시·스리랑카·에티오피아 등 의료 환경이 열악한 지역을 찾아다니며 30여 년 간 의료선교사로 봉사했다.
자신의 피로 환자를 살린 이야기도 유명하다. 그가 51세이던 1985년, 응급실로 배 전체에 염증이 퍼진 환자가 실려 왔다. 수술에 들어갔지만 수혈하겠다던 환자 아들들이 도망쳐 버려, 그냥 두면 죽을 수 있었다.
응급실장이던 그는 팔을 걷어서 자신의 피를 뽑기 시작했다. 200cc 혈액 2병을 뽑았고, 병원장의 제지로 거기서 그쳤다. 네팔 현지인들은 이런 그를 ‘바제’, 네팔말로 할아버지라 부르며 친할아버지처럼 따랐다.
1999년부터 2002년까지 국내 안동성소병원장을 맡았지만, 병원이 안정되자 다시 에티오피아로 떠나 7년간 의료봉사를 진행했다.
2011년 자전 에세이 <히말라야의 슈바이처>를 냈고, 그해 다큐멘터리 영화 <소명 3: 히말라야의 슈바이처>도 개봉됐다.
이러한 공로로 보령의료봉사상(1990), 일가상(1996), 연세의학대상 봉사상(2000), 연세를 빛낸 동문상(2012), 아산상 의료봉사상(2012), 국민훈장 동백장(2014), 서재필 의학상(2020) 등을 수상했다.
유족은 부인 최화순 권사와 아들 강근표(이경혜), 딸 강은주(김철수) 등이 있다. 빈소는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특2호실이며, 발인은 29일 오전 7시, 장지는 강원도 양양군 선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