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문화선교회 신바람힐링강사진 일동
주님!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믿음을 주소서.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를
이해하기보다는 이해하고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며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님!
그러나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사방이 나를 삼키려 하고
시험에 빠뜨려 넘어지게 하고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유혹에
빠지게 하는 일들이
어찌 그리 많은 지요.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주님의 사랑으로만 가능함을 고백합니다.
위로가 평안이 화평을 기쁨을
주님의 은혜로 서게 하소서
오늘도 하루를 온전히 드리게 하소서.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것은 두 시각 장애인이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께 외친 피 맺힌 절규입니다.
온 몸이 멀쩡한 사람은 소위 자존심과 체면 때문에 문제가 있어도 쉽게 “도와 달라”고 말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자존심과 체면은 인간 관계나 사회 생활에서 자신을 보호하는 수단이 될지는 몰라도 하나님 앞에선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사람은 주님 앞에 나아가 자신이 구원받아야 할 죄인임을 고백할 때에, 비로소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사람은 주님 앞에서 자신의 죄와 허물의 껍질을 벗고 정직해질 때에라야 참된 사람이 됩니다.
절망이란, 사람이 진정으로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할 때에 생기는 부정적인 모습입니다. 보아야 할 것을 못 보는 사람은 곧 시각 장애인일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독일의 아우슈비츠에서 많은 사람이 절망감으로 스스로 죽어갈 때에 한 젊은이가 수용소 벽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나는 빛을 볼 수 없을지라도 태양이 있음을 믿노라. 나는 사랑을 느낄 수 없을지라도 사랑이 있음을 믿노라. 나는 하나님을 볼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믿노라.”
참으로 위대한 신앙고백입니다.
두 시각장애인이 부르짖자 예수님은 그들 앞에서 머물러 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자신을 절실히 필요해 부르짖는 사람 곁에 머물러 있습니다. 주님은 당신을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쳐 부르는 사람 곁에 머물러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긍휼을 구하는 사람 곁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 시각 장애인들이 피를 토하듯 온 몸으로, 한 번밖에 기회가 없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저 분만이 우리의 눈을 뜨게 해주실 수 있다는 확신으로 부르짖는 소리를, 주님께서 못 들으실 리가 없습니다.
가장 위대하고도 확실한 기도는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입니다. 이런 소망과 믿음의 기도 때문에 여러분 곁에 주님께서 머물러 서실 수 있게 되시기 바랍니다.
길을 걷다 돌부리에 걸리면 이것은 걸림돌이 되지만, 냇가를 건널 때 물가에 놓인 돌은 고마운 디딤돌이 됩니다.
우리들의 인생 길도 모든 사람들에게 디딤돌이 되어주는 삶이 되었으면 하는 소박한 마음 갖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