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 조형으로 공동체에 관한 비전을 표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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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록, 한 점의 그림] 이명의, 정도를 걷다

화려한 무대 대신 조용히 지내며
맑은 심성을 유지하며 예술의 길
사람과 예술 사랑하며 부드러운
음성과 온화함으로 한평생 살아

▲이명의, 소망, 65x53cm, 캔버스에 유채, 1989.

▲이명의, 소망, 65x53cm, 캔버스에 유채, 1989.

이명의(1925-2014)는 오랜 미술 교직 생활, 일선에서 입시교육을 맡아온 탓에 그를 작가라기보다 교육가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런 이미지에 가려 정작 그의 작품세계가 어떠했는지는 상대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현대미술가협회전>(1957)과 <현대작가초대전>(1958, 1959, 1960)에 참여하는 등 일찍이 촉망받는 미술가로 떠올랐다. 그러나 이후 어쩐 일인지 그의 작품 활동은 뜸해진다.

아마 그의 신앙이 깊어지면서 크리스천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다지는 일에 주력한 것이 주요 요인이 된 것 같다. 삶의 의미와 목적, 조건 없이 주어진 은혜, 미래의 소망 등과 같은 이슈가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혹자는 그가 ‘미술계의 변방’에 머물렀다고 하는데, 이는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용기를 내 정도(正道)를 걷는 것을 불사했다는 말로 수정해야 할 것이다.

그의 기독교 미술단체 활동이 본격화된 것은 1960년대 초로 소급된다. 1963년 전국기독교육대회 기간 중에 열린 <기독교미술가 초대전>에 참여한 것을 비롯해, 한국기독교미술인협회 창립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한국기독교미술인협회는 1965년 1월 창립대회를 개최한 뒤 1966년 ‘미술인 상호의 친선과 협조를 목적으로’ 향린미술원에서 창립총회를 열었다. 총회에서는 회장에 이연호, 부회장에 홍종명이 투표로 선출되었고, 총무에 이명의가 선출되었다.

창립회원 김영재는 이명의가 ‘옥동자의 산파 역할’을 맡았다고 했고, 협회 고문인 이정수는 선배 화가 이명의가 향린미술원을 회의 장소 및 작품 보관소로 내놓는 등 그가 협회의 살림을 도맡았다고 회고하였다.

이후 이명의는 <현대크리스천 미술전>(1968), <아시아기독교미술전>(1978),<기독교원로작가 초대전>(1893),<한국기독교 100주년 기념 국제기독교미술전>(1985) 등 기독교 관련 전시에 출품하면서 기독 문화의 확산 및 심화에 힘을 쏟았다. 오늘날 크리스천 미술이 있기까지는, 이명의처럼 확고한 철학을 지닌 작가가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명의, 사랑이야기 93-06, 40x30cm, 캔버스에 유채, 1993.

▲이명의, 사랑이야기 93-06, 40x30cm, 캔버스에 유채, 1993.

그의 작품 세계는 신구약 내러티브를 조형적 언어로 풀이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단순한 해석을 넘어 그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구원의 기쁨과 감격을 놓치지 않았다.

느린 듯 하지만 중단없이 그의 작품 발표가 이어지다 그의 작품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은 1989년 서울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 때였다. 이 전시에는 <창세기 1장>, <광야의 유혹>, <벧엘의 야곱>, <영광의 그리스도>, <순례자>, <의인의 길>,<십자가>, <겟세마네의 기도>, <순교자의 성>, <문>, <부활절>, <새벽기도> 등 20대부터 60대까지 그의 작품 세계 전반을 아우르는 작품들을 출품하였다.

출품작들은 그가 경주해온 화풍의 기조대로 추상적이거나 반추상적인 작품들이 주종을 이루었다. <광야의 유혹>은 시험받는 그리스도를 몇 개의 필선을 빌어 표현하였는가 하면, <벧엘의 야곱>은 굵은 필선으로 인체를 형용하고 배경 역시 가로의 색띠로 구성된 간결한 작품이다.

그런가 하면 <십자가>와 <겟세마네의 기도>는 이보다 훨씬 단순하다. <십자가>는 십자가 이미지만 희미하게 보일 뿐, 화면 전체에는 낮은 채도의 갈색과 청색으로 덮여 있다. 그리고 그 위에 회오리 바람같은 이미지를 넣어 고난당하신 그리스도를 표현하고 있다.

<겟세마네의 기도>는 인체 이미지조차 발견되지 않는다. 위험스럽고 절박한 분위기의 붉은 색조가 주조색으로 사용되었으며, 어둔 밤을 배경으로 한 것으로 미루어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신 예수님을 표현하였다.

그는 외형적 사실에 집착하기보다는 심연의 의미, 주제가 어떻게 작가의 가슴에 와 닿고 전달되었는지에 집중하였다. “단지 대상을 묘사하는 것만으로는 그림이 될 수 없습니다. 이때 눈은 이미 눈의 구실을 잃고 렌즈로 전락한 것입니다. … 비록 선과 점은 한 장의 종이 위에서 평면적인 이동을 할 수밖에 없지만 예술가의 눈은 깊이에서 깊이로 이동해야 합니다(이명의, ‘예술가의 눈’, 새가정, 1972.4).”

작가는 관념적 유희로서 추상의 양식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 속에 구원의 감격이나 고난 속에 준비되었던 하나님의 은혜를 피력하였던 셈이다.

동료였던 홍종명이 밝혔듯 “이명의 선생은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불치의 상태에서 신앙의 힘으로 기적으로 소생한 이후 스스로 남은 생을 ‘덤’으로 간주하고 교회에 봉사하고 남에게 나타내지 않는 신앙심을 키웠다”고 말했는데, 고난의 체험이 그의 삶을 크게 바꾸었을 뿐 아니라 화풍까지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화려한 무대 대신 조용히 지내면서 늘 자신의 맑은 심성을 유지하며 예술의 길을 갔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사람과 예술을 사랑하며 부드러운 음성과 온화함으로 한 평생을 살아왔다”고 했다.

이런 성품은 후반기 작품에서 잘 나타났다. 이때의 작품은 훨씬 온화해진 화풍을 선보였다. 그의 <사랑 이야기>는 사람과 사람 또는 형상과 형상 사이의 관계에 초점을 모아 유기적이고 친밀한 관계성을 강조하였다.

저음조의 색조가 밝고 화사한 고음조의 색조로 변모하며 화목과 평강으로 수놓은 은혜로운 세계를 표현하였다. 추상과 반추상을 기조로 했던 데서 기호의 이미지나 기하학적 도형을 기용하는 새로운 면모도 발견된다.

이명의 작가는 원숙의 경지에 접어들면서 아름다운 공동체를 향한 바람을 예술 속에 담아내는데 힘썼다. 개인 신앙의 고백에서 공동체에 대한 바람으로 관심이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상징적 표현을 매개로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가 회복되는 비전을 실어냈다.

이명의는 다른 작가에게는 발견할 수 없는 분명한 그 무엇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이 그를 한층 돋보이게 만든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눈으로 우리의 깨어진 세상을 보고 이를 치유하고 회복하고자 힘썼다는 사실이다. 작품을 통해 전해지는 세상에 대한 애통이 우리의 귓가에 맴도는 것 같다.

▲서성록 교수.

▲서성록 교수.

서성록 명예교수(안동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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