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은 김일성이 주도하고 스탈린과 마우쩌둥의 원조 아래 일어난 국제적 침략전쟁이다.
대한민국은 미국과 방위조약을 튼튼히 하면서 일본과 협력하여 한미일 공조로 북핵과 중러 위협을 돌파해 나가야 한다.
올해는 6.25전쟁 73주년이 되는 해이다. 6.25전쟁 73주년 행사를 하면서 우리는 6.25전쟁이 왜 일어났는지는 분명하게 인식해야 하겠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한다. 그만큼 과거의 사건을 통해 올바른 교훈을 깨닫지 못하고 망각하는 민족에게는 과거의 불행이 되풀이된다는 준엄한 경고의 말이다. 우리가 6.25전쟁 73주년 행사를 하면서 대한민국이 낙동강 전선의 존망의 위기에 몰렸다가 유엔군의 도움으로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지켜낸 6.25전쟁의 뼈아픈 교훈을 가슴에 깊이 새기고 우리나라의 장래를 공산주의의 침략으로부터 지키겠다는 다짐을 해야 하겠다. 6.25전쟁은 북한의 김일성이 소련의 스탈린과 중국의 마오쩌둥의 도움을 받아 한반도를 공산화하려고 일으킨 국제적인 침략전쟁이다. 과거에는 6.25사변이라고 불렀으나, 최근에는 6.25전쟁이라고 부르고, 일부 학자들은 한국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샬롬나비는 6.25전쟁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하고자 6.25전쟁의 성격에 대해 다음과 같은 새로운 논평을 발표한다.
1. 1980년대 이전에는 북한이 남한에 대한 기습적 남침설이 6.25전쟁에 대한 전통적 설명이지배했다.
6.25전쟁은 1980년대 이전에는 팽창주의적인 공산주의 소련이 북한을 조종하여 대한민국을 침략하여 일으킨 남침전쟁이라는 외인론에 입각하여 설명되었다. 당시 대한민국은 북한의 침략을 막아낼 군사적인 준비가 거의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는데, 북한은 다량의 소련제 무기를 공급받은 상태에서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에 기습적으로 남침을 감행하였다. 당시 북한군은 20만 명의 병력에 소련제 T-34 탱크 242대와 170여 기의 전투기를 포함하여 200대에 달하는 공군기를 가지고 있었지만, 한국군은 10만 명의 병력에 20대의 훈련기와 연습기가 전부였으며, 탱크와 전투기는 전무하여 북한의 침략을 막아낼 수가 없었다. 이와같이 6.25전쟁에 대한 전통적인 시각은 6.25전쟁이 소련의 팽창정책에 의해 조종받은 북한의 기습적인 남침이라고 설명하였다.
2. 1981년에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 전쟁의 기원』이 수정주의 이론을 탄생시켰다.
1981년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 1943-)의 『한국전쟁의 기원』(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1981, 김자동 역, 일월서각, 1986)이란 책이 저술된 후에 6.25전쟁에 대한 소위 수정주의설이 대두되었다.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에서 내적 요인을 강조하였다. 그는 6.25전쟁을 일제 강점기 이후부터 해방정국까지 지속된 한국 안에서의 계급적 갈등의 연장선상에서 남한을 해방시키고자 일어난 내전 성격의 전쟁이라고 보았으며 미국은 전쟁 유발의 책임이 있다고 보았다. 커밍스는 한반도에서의 좌익과 우익, 지주와 농민, 자본가와 노동자 간의 무력충돌이 빈번했으며, 대구 10.1 폭동사건, 여수‧순천 반란사건, 제주 4.3 사건, 38선 지역에서의 크고 작은 국지전 등을 감안하면 1945년부터 전쟁은 이미 진행되고 있었던 것과 다름이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먼저 발포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는 논지를 펼쳤다. 6.25전쟁에서 북한의 남침의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고 남한의 좌우투쟁이 마침내 남북의 직접대결의 내전으로 발전했다고 주장하는 브루스 커밍스의 이러한 입장을 수정주의라고 부른다.
3. 1980년 후반부터 우리나라 좌파 학자들과 운동권은 수정주의 이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우리나라의 좌파 학자들과 운동권 진영에서는 이러한 브루스 커밍스의 수정주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이들은 해방공간에서 남한에서 좌파 세력이 우세했다고 주장하면서 브루스 커밍스의 남한에서의 좌우투쟁설과 그로 인한 김일성의 남침 유도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면서 북한의 침략의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1980년대 후반에 전쟁의 원인으로 일제하 사회경제적 모순 기원설, 미국의 남침유도설, 남한의 소규모 북침설 등이 유행하면서 좌파 운동권에서 퍼뜨린 민족해방을 위한 내전이라는 6.25전쟁에 대한 인식이 한국사회에서 확산되었다. 특히 강정구는 6.25전쟁을 북한 지도부에 의한 통일전쟁이라고 주장하였다
4. 1991년 소련 붕괴후 공개된 소련의 6.25전쟁 관련 극비문서는 6.25전쟁이 김일성이 주도하고 소련과 중국이 원조한 전쟁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밝혀주고 있다.
이러한 수정주의는 1991년 소련 붕괴 후에 6.25전쟁에 관한 소련의 극비문서가 해제되면서 허구라는 것이 밝혀졌다. 김일성은 1948년 9월에 북한헌법에서 북한의 수도를 서울로 정하여 적화통일의 야욕을 드러내고 있으며, 38선에서 일어나는 소규모 충돌을 빌미로 소련으로부터 소련으로부터 대량의 현대식 무기를 획득하였다. 그리고 스탈린에게 남침의 허락을 요청했으나 소련은 미국의 개입 가능성을 거론하며 거절하였다. 그러나 스탈린은 1949년 10월 중국이 공산화되고 1950년 1월 12일 미국의 극동방위선에서 한국을 제외한 애치슨라인이 발표되자, 지금까지 거부했던 김일성의 남침 계획을 1950년 1월 30일에 공식적으로 승인하였다.
마우쩌둥이 2월 15일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스탈린은 마우쩌둥에게 의견을 물었고 모택동은 “우리는 당연히 김일성을 도와야 한다”라고 대답하였다. 마우쩌둥은 3월 20일에 중국 인민해방군 소속이던 조선인 병사들 가운데 14,000명을 집결시켜 독립 15사단으로 개편하여 북한으로 파병하였으며 3월 말에 원산에 도착했다. 이 부대는 6.25 전쟁시에 인민군 제12사단이 되어 북한의 동부전선 남침공격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5. 김일성은 1950년 4월 10일 소련을 방문하여 스탈린의 최종 승인을 얻었다.
김일성은 1950년 4월 10일, 박헌영과 같이 모스크바를 비밀리에 방문하여 스탈린을 만났다. 이때 박헌영은 남한에 있는 20만 명의 공산당원들이 북측의 첫 신호에 맞춰 봉기할 준비를 이미 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김일성은 미군의 전쟁 참전 여부에 관련해서 네 가지 이유를 들어 미국이 참전할 수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첫째, 기습적인 공격으로 3일 이내 승리를 확보할 수 있다. 둘째, 20만 명의 남조선 공산당원의 봉기가 있을 것이다. 셋째, 남한 각도의 유격대가 조선인민군을 지원할 것이다. 넷째, 미국은 참전을 준비할 시간이 없다. 이러한 설명을 들은 스탈린은 4월 10일 김일성의 군사적 공격을 최종 승인하였다. 그 후에 소련은 2차 대전에 사용되었던 무기들을 대량으로 북한에 보냈다.
6. 미국은 6.25전쟁 이전에는 대한민국에 무기를 지원하지 않았고 전쟁 발발하자 유엔을 통한 적극적인 전쟁 지원을 시행하였다.
미국은 대한민국에 대한 방위가치를 낮게 평가하여 1949년 6월 30일까지 미군을 완전 철수하였다. 더 나아가, 북진통일을 호언하는 이승만을 견제하기 위하여 한국군 건설에 필요한 무기조차 전혀 지원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 한국군은 탱크를 비롯한 한국을 방어할 무기들을 전혀 보유하지 못하였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유엔 안보리는 당일에 신속하게 이 문제를 논의하여 찬성 9, 기권 1(유고), 불참석 1(소련)로 결의문 제82호를 채택하였다. 즉 안보리는 결의문에서 “북한군의 대한민국에 대한 무력공격에 대하여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고,” 적대행위의 즉각적인 중지와 북한 당국이 그 군대를 38선 이북으로 철수할 것을 촉구하였다.
북한의 반응이 없자 6월 27일 안보리는 다시 결의문 제 83호를 채택하고, "무력공격의 격퇴와 그 지역에서의 국제평화 및 안전의 회복을 위해 한국에 대해 필요한 원조를 할 것을 회원국에 권고"하였다. 이 결의문들은 유엔 헌장에 따른 집단안보를 발동한 것으로 유엔의 6.25전쟁 개입은 이러한 집단안보제도가 본격적으로 그리고 전형적으로 적용된 최초의 사례가 되었다. 유엔결의안 하에서 유엔회원국의 군사적 참여가 전쟁발발 즉시 이루어지기 시작했는바, 6월 27일 미군을 시작으로 연합군의 참전이 시작되었다.
유엔은 유엔의 결의로 건국되었고 한반도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했던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하여 16개국에서 34만 1천명의 유엔군이 참전하였고, 미군 36,492명을 포함하여 40,869명의 유엔군이 전사하였다. 이 외에 의료지원국 5개국, 물자나 재정지원국 39개 등 총 62개국이 우리나라를 지원하였다. 우리나라는 이들의 지원에 감사하고 기념하기 위하여 부산에 유엔기념공원을 조성하여 전몰유엔군들을 안치하고 있다. “죽으면 부산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긴 프랑스 참전 용사 레몽 베르나르씨를 시작으로 2015년 5월부터 최근까지 19명이 사후 안장되었다. 1974년부터 11국 주한대사들이 공동관리하고 있다.
7. 이승만 대통령은 한반도 전쟁을 막고 평화보전을 위해 한미방위조약을 체결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협정이 체결되는 과정에서 한반도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미국과의 군사적 동맹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인식하였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이 문제에 대하여 미온적이었다. 그러므로 이승만은 반공포로석방을 비롯한 다양한 압력수단과 외교정책을 병행하여 마침내 한미방위조약을 체결하였다. 1954년 10월에 한미방위조약이 발효된 이후에 한국은 지난 70년간 장기적인 평화를 누리는 가운데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이룰 수가 있었다.
8. 우리는 6.25전쟁의 성격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3가지 큰 교훈을 얻어야 하겠다.
6.25전쟁은 북한이 소련과 중국의 도움을 얻어 남한을 공산화하고자 침략한 국제적 침략전쟁이다. 그래서 북한에서는 6.25전쟁을 조국해방전쟁이라고 부르고 중국은 항미원조전쟁이라고 부른다. 미국에 항전하고 조선(북한)을 원조한 전쟁이라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이러한 침략전쟁에 맞서 유엔군의 원조를 받아 나라를 수호한 방어전쟁에서 승리하여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켰다. 그러므로 6.25전쟁은 국민의 연합된 힘과 유엔군의 도움으로 대한민국의 방어에 성공한 전쟁이요, 자유민주주의 체제 수호전쟁에서 승리한 전쟁으로 기억되어야 하겠다.
우리는 6.25전쟁에서 다음의 세 가지 큰 교훈을 얻어야 한다.
첫째 평화를 담보하기 위해서는 북한침략을 저지할 수 있는 확실한 군사력과 나라를 지키려는 국민들의 담합된 의지가 필요하다.
둘째 미국과의 방위동맹을 통한 확실한 전쟁 억지력의 준비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의 확산이 절실하다. 이승만 대통령은 6.25전쟁 전에 미국으로부터 전쟁억지력을 확보하지 못한 상황에서 북진통일을 주장하여 미국의 미국 원조를 받지 못한 것이 6.25전쟁 초기의 비참한 패배의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므로 오늘날 북핵의 위협이 증대되고 고도화되는 시점에서 우리나라는 미국, 더 나아가 일본과 연합하여 북핵에 대한 확실한 전쟁억지력을 확보해야 한다.
셋째 6.25전쟁에 대한 올바른 실상을 국민들에게 지속적으로 알리면서 전쟁을 막고 평화의 길을 확보해야 하겠다.
2023년 6월 23일
샬롬을 꿈꾸는 나비행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