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로 보는 세계역사> 김동주 교수
“골고다의 십자가는 카타콤의 십자가가 되었다가 이후 광야의 십자가로, 황궁의 십자가로, 라테란의 십자가로, 초원의 십자가로, 마을의 십자가로, 빌딩의 십자가로 옮겨져 왔다. 현대에는 귀고리의 십자가로 세워져 버렸다. 기독교는 긍정과 부정의 두 얼굴을 가지고 인류 역사의 중심에서 예수의 영원한 말씀들을 전해 왔으며, 많은 인물들은 그 교훈에 기대어 새 생명을 얻고 이기적 세상에 도전하는 숭고한 삶을 보여주었다.
역사는 하나의 거룩한 희극과 세속적 비극의 거대한 만남이다. 사망과 증오와 혼동의 강을 건너 이제 생명과 용서와 평화의 ‘약속의 땅’까지 도달해야 하는 것은 우리들의 과제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고결한 가치들을 목말 태워 보석으로 빛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게 한다는 사실이다.”
<기독교로 보는 세계역사>는 복잡한 세계 역사를 쉽고 명료하게 기술하고, 세계사 속에서 기독교의 역할과 공헌을 논술하며, 세계사에서 기독교가 성장해온 길을 명료히 진술하는 데 뜻을 두고 편찬된 1천 쪽 넘는 대작이다. 세계사 책도 기독교 역사 책도 이미 많지만, 이 책은 기독교 관점에서 세계사를 통찰하는 독보적 관점으로 기술됐다.
저자 김동주 교수는 서울신대(B.A.)와 연세대 대학원(Th.M.) 졸업 후 미국 보스턴대학교에서 중세사 및 종교개혁을 전공해 석사(S.T.M.)와 철학박사(Ph.D.)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호서대학교 인문대학 기독교학부 교수 및 연합신학전문대학원 원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다음은 개정판 출간을 맞아 김동주 교수와 진행한 인터뷰.
중세는 하나님 향한 갈망의 시대
종교개혁, 하나님의 갈망 재발견
전세계 역사 핵심 기둥은 기독교
-<기독교로 보는 세계역사> 저술 동기와 과정에 대해 설명 부탁드립니다.
“세계 역사책은 여러 잘 쓰여진 책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로 보는’ 세계 역사책은 제가 알기로는 제 책이 아마 유일하지 않나 싶어요. 미국 보스턴대학교에서 석·박사 과정 9년 동안 역사신학을 하면서 ‘세계사 속 기독교의 공헌’을 공부했습니다.
교수님이 그런 부분을 많이 강조하셨어요. 예를 들면 ‘종교개혁’의 경우 종교를 개혁한 것으로만 아는데, ‘종교개혁은 넓게는 종교가 온 세상을 개혁한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종교개혁은 프리 스피릿(Free Spirit).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유로운 신앙과 정신을 가져다 줘 사람들이 ‘해방’을 맞이했습니다. 예배의 해방, 문서의 해방, 사상의 해방, 정치적 권력으로부터의 해방 등입니다. 그래서 청교도 혁명이 일어나고, 명예혁명도 일어나게 됐어요. 미국에서는 칼빈주의 기독교 신앙에 기초한 민주주의가 싹틉니다. 하나님의 계명 앞에서는 왕이든 누구든 다 동등하잖아요. 그러니까 어떤 면에서도 해방된 거죠.
또 종교개혁은 중세의 단선율 음악을 끝내고 바로크 음악 시대를 맞이하게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흐와 헨델, 파헬벨 등이 모두 당시 루터교 신앙 아래 새로운 음악의 세계를 열었습니다. 그들이 천재라서 그런 부분도 있지만, 그들의 ‘프리 스피릿’이 어디서 왔겠습니까? 우리도 성장할 때 환경이 지대한 영향을 끼치지 않았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갈망의 시대’가 중세죠. 이것도 좋지만, 종교개혁이 이를 뒤집었습니다. 우리의 갈망은 기독교의 한 부분일 뿐이고, 진짜 기독교의 본질은 우리의 갈망이 아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오셔서 모든 것을 주셨다는 사실이잖아요? 이를 발견한 것입니다.
종교개혁으로 기독교는 우리가 하나님을 일방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풍성한 선물을 누리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중세 때는 구원을 얻기 위해 인간이 노력해야 했는데, 종교개혁으로 구원을 선물로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선물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하겠죠. 여기서 모든 것이 바뀝니다. 내가 어느 나라 시민권이 필요해서 열심히 일하는 것과, 이미 그 나라 시민권을 가진 사람으로서 자랑스럽게 일하는 것은 완전히 다르지 않을까요?
저는 그런 측면에서 단순히 세계 역사를 서술한다기보다, 기독교적 시각에서 세계 역사를 다뤄보고 싶었어요. 2천 년 세계 역사의 가장 핵심적인 지성사적 기둥은 바로 기독교입니다. 사람들 이름만 해도, 기독교에서 비롯된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영어권에서 가장 유명한 이름이 요한(John)이고, 톰 크루즈라는 배우의 이름은 도마(Thomas) 아닙니까? 피터(Peter)는 베드로이고요. 이처럼 기독교는 인류 지성사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다음으로, 흔히 ‘교회사’라고 부르는 분야가 있습니다. 기독교 교회가 어떻게 탄생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이 어떻게 확장되고, 세계사와 어떻게 상호작용을 일으키며 여기까지 왔는지 공부하면서 오랜 기간 관심을 기울여 왔습니다. 그래서 집필이 오래 걸리진 않았고, 시대별 분량 균형을 맞추는 데 오래 걸렸습니다.
그리고 책에 있는 내용들의 원 출처(citation)를 다 표기했습니다. 예를 들어 ‘네로 황제의 기독교 박해’라면, 후대의 교회사 책이 아니라 첫 출처, <타키투스의 연대기>로 써놓았습니다. 학문성을 위해 2천 년 역사 속 중요 사건들에 대한 원 출처를 표기했습니다.”
기독교 없는 세계 존재할 수 없어
그리스도 오신 후 만든 신앙 체계
인간의 삶과 세계 역사 모두 바꿔
-의미 없는 가정이겠지만, 지구상에 기독교가 없었다면 역사는 어땠을까요.
“필요 없는 이야기가 아니라, 온 우주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 아닐까요? 기독(基督)이라는 이름 자체가 그리스도의 음역어(한자식 표기)입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으로부터,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 교훈으로부터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나왔고, 그들이 세상을 구성했습니다. ‘부모 없이 자녀가 있을 수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기독교 없는 세상은 상상도 할 수 없죠.
오늘날 세계도 기독교 없이는 정말로 존재할 수 없어요. 그리스도가 오셔서 만든 신앙 체계가 인간의 삶을 바꿨고, 세계 역사를 변화시켰습니다. 그 결정체가 바로 우리입니다.
올해가 2023년인데, 이 연도(年度) 표기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기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었다면, 나라마다 다른 연대 표기법이 있겠죠? 또 유대교의 한 분파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만 알려졌겠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교훈과 십자가의 도 대신, 이기고 정복하는 로마 사상이나 스스로 지혜를 찾아 떠나는 헬레니즘만 있을 것 아닙니까?
고린도전서 1장에서 바울은 헬라인이 지혜를 구한다고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지금 다 지혜와 지식을 좇는 헬라식 교육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로마인은 명예와 용기, 높은 수준의 성공을 찾습니다. 이를 위해 죽음도 불사하죠. 또 유대인은 하늘의 표적을 구하죠.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구합니다. 그 십자가가 주는 의미라는 것은 상상 이상입니다. 그 희생을 모델로 지금 이 세계가 자리잡았죠. 세계의 변화를 가져온 인물들, 페스탈로치나 나이팅게일 등은 사람이 착하거나 직업정신으로 사람들을 돌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본래 나에게 주신 사명은 어려운 사람을 돌보는 것’임을 사명으로 인식한 크리스천들입니다.
로마 제국도 기독교를 공인한 후 사형 제도를 정비하고, 사람을 죽이는 검투사 경기도 중지시키고, 문화를 장려하면서 세계 역사가 바뀌어 갔습니다. 중세의 평화와 르네상스를 가져온 위대한 황제 샤를마뉴도 크리스천이었습니다.”
-의미 없는 가정은 아니네요.
“만약 기독교가 없었다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도,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상’과 ‘천지창조’도, 바흐의 아름다운 클래식 ‘예수, 인간의 소망과 기쁨(칸타타 BWV 147)’도, 파헬벨의 캐논(Canon)도 없게 되겠죠. ‘캐논’은 파헬벨이 교회 성가대 지휘자로서 만든, 전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곡 중 하나입니다.
이런 문화적 요소보다 중요한 것은, 기독교가 없었다면 ‘인류의 구원 방법’이 없다는 점입니다. 인류는 그야말로 멸망하는 것이죠. 그리스도가 없으니까요. 역사는 시간인데, 시간 안에서 그리스도가 뿌린 씨앗이 어떻게 세계 역사의 각 부분에서, 각 나라와 각 민족에 영향을 끼쳤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구원이 없고, 출구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가장 자랑할 수 있는 부분은 그리스도 아니겠습니까?
질문에 곧 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가 없었다면 세계 역사는 어떻게 됐을까요? 말 그대로 ‘세계의 역사’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역사는 시간과 인간이잖아요. 그런데 기독교는 시간이나 인간이 아니에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러 오셨어요. ‘영원(zoe), 생명(aionios)’, 영원한 생명은 사람에게 없습니다.
성 어거스틴(Augustine)이 정말 위대한 것은 <고백록>이 아니라 영원이라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놀라운 비밀을 깨달아서 알려 줬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은 영원에 속하시고, 우리는 3차원적인 시간 속의 존재로 태어났어요. 그런데 4차원도, 5차원도 아닌 모든 인간의 차원을 뛰어넘으신 영원의 존재가 우리에게 개입했다는 것이 기독교잖아요.”
기독교 없는 역사, 시간에 갇힌 것
기독교의 가치, 시간 아닌 영원에
하나님, 비기독교인들도 사용하셔
-심오한 대답입니다.
“그리스도교가 없으면 그냥 시간에 갇힌 역사일 뿐이에요. 역사는 결코 영원을 이루지 못하죠. 땅에서 뱅뱅뱅 돌고, 시간의 굴레 속에서 뱅뱅뱅 돌 뿐이죠. 빠져나올 방법도 구원하는 방법도 없고, 십자가를 통한 부활도 모르겠죠.
그저 헬라인처럼 지혜를 추구하는 세상, 로마인처럼 성공만 추구하는 세상이 됐겠죠. 아르키메데스처럼 ‘유레카’ 하고 깨닫지 못하면 뒤처진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예전 로마 제국이 수많은 민족을 노예로 삼았던 것처럼 약육강식의 세계가 당연한 가치관이 될 것입니다.
아담의 후손으로서 인간의 세계 역사는 이기심의 발로를 통해 계속 나아갔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부터 믿음과 인내와 연단의 삶을 강조하시고, 아브라함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를 만인의 머리로 세우십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의 삶과 순종, 십자가와 부활,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는 삶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기독교는 그렇게 세워졌습니다.
기독교의 가치는 역사와 시간이 아니라, 영원에 있습니다. 모든 것을 뛰어넘어, 지금 살아있는 실제에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자부심을 가져야 해요.
실제적인 면에서도 그렇습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계사 속에 엄청난 기여를 하면서 역사의 물꼬를 바꿨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도,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도 사용하십니다.
성경을 보면,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을 부리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느부갓네살이 처음부터 하나님을 잘 믿었던 사람이 아니에요. 세계 역사는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주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저는 세계 역사를 바라볼 때, 시간과 영혼의 관점에서 이렇게 봤습니다. 시간 안에서 뱅뱅 도는 우리가 기독교를 통해 영원과 하늘을 소망하고, 십자가와 부활을 소망하게 됐습니다.
부활은 새로운 생명이잖아요. 내가 쭉 사는 게 부활이 아니잖아요. 십자가를 거쳐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선물이죠. 또 십자가만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이것이 역사 속에서 제가 보고 싶었던 기본적 관점입니다.”
-하지만 세속사는 기독교의 영향력이 꾸준히 감소하는 방향으로 흘러 왔습니다.
“정말 훌륭한 질문입니다. 세속화 문제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저는 기본적으로 기독교의 영향력은 줄어들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에베소서 1장 4절 ‘창세 전에’, 세상을 만들기도 전에 하나님의 뜻과 정하심이 있었습니다. 이를 예정(豫定)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 하나님의 정하심은 표현된 만물보다 실제적입니다. 표현된 만물이 진짜가 아니라, 하나님 뜻이 진짜잖아요. 우리는 잠깐 있다 사라지는 안개일 뿐이고, 양자물리학적으로도 다 전자 현상일 뿐입니다. 보이는 것들은 잠깐인데, 진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역사야말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기독교적 요소 이상으로 세계사 속에 충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계시록에 말들이 나오잖아요. 전쟁의 말도, 붉은 말도, 죽음의 말도, 검은 말도, 회색 말도, 나옵니다. 경제적인 위기와 격변, 생태학적 재난들도 나옵니다. 그런데 ‘흰 말’, 곧 그리스도의 복음이 나옵니다. 저는 세계 모든 사건들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시기 위한 하나님의 움직임으로 보기 때문에, 우리 시각으로 볼 때 종교적 요소가 줄어들 수는 있지만 그것이 결코 줄어드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크리스천은 법칙을 뛰어넘은 삶을 살기에, ‘에너지 총량의 법칙’을 따라 산다고 할 수 없습니다. 법칙에 매이지 않는 삶을 주님께서 주셨습니다. 지금 기독교는 한쪽 면에서 줄어드는 것처럼 보이고, 에너지가 보이지 않지만, 그것이 아니라 내재화되고 잠재돼 있습니다. 다시 불을 켜야 하겠죠. 우리가 부흥이라고 부르는 것이 불이라면, 잠재된 연료가 있는 것이죠. 여기에 누가 불을 붙이느냐에 달렸다고 봅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셔서 각 대륙을 다 사용하시기에, 오늘 우리 환경에서는 잘 안 보일 수도 있습니다. 북한에 사는 사람에게 기독교는 없는 것이죠. 하지만 분명히 지하에 존재하죠. 우리 교회는 지상에 있지만, 지하에 없죠. 지하에 없는 것도 일종의 비극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하에도, 숨어 있을 때도 그리스도인이어야 하잖아요. 하지만 지금 우리는 ‘보이는 기독교인’에 익숙해져 있잖아요.
그래서 저는 기독교가 한 면에서 외적으로 약해진 것 같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 준비시키시는, 앞으로 몰고 오실 엄청난 일들에 대해 2천 년 전체의 시각으로 볼 때 그렇게까지 절망스러운 상황은 아니라고 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를 나타내시기 위해 이 역사를 여전히 주관하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