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성록, 한 점의 그림] 렘브란트, ‘63세의 자화상’
자화상 90여 점이나 그린 렘브란트
대중 취향 벗어나 독특한 스타일로
내면의 눈으로 자신 바라보는 습관
사랑에 빚진 자로서의 겸손 드러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영국 내셔날 갤러리 <거장의 시선전> (2023. 6. 2-10. 9) 감상 후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1609)의 자화상은 17세기 미술이나 미술사 전체를 통틀어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현재 그의 자화상은 60여 점의 회화, 20여 점의 에칭, 10여 점의 드로잉을 합쳐 90여 점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렘브란트의 그림 전체에서 거의 10%를 차지하는 숫자이다. 이는 그가 매년 평균 두 점의 자화상을 그렸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의 자화상은 유사한 것이 거의 없다. 작품들은 시기별로 기법과 스타일 면에서 특징을 각각 달리하며, 이것은 그가 한 점 한 점의 자화상에 고유한 의미를 부여했음을 말해준다.
미술사학자 제이콥 로젠버그(Jacob Rosenberg)는 오랜 전통의 초상화 방면에서 기법의 능숙함, 관찰의 예리함, 특출난 재능 등 그에 필적할만한 화가가 없었다고 하였다.
내셔날 갤러리 소장 ‘63세의 자화상’은 그가 숨을 거두던 해에 제작된 것이며, 말년의 특징을 충실히 보여준다. 물감을 두껍게 바르는 방식으로 나이가 든 모습을 전달하였는데, 얼룩덜룩한 피부와 흰 머리털, 숱이 적어진 눈썹 그리고 입 주변 촘촘한 수염을 여과없이 그렸다.
얼굴이 선명하게 묘사된 것에 비해 옷과 배경은 얇게 칠하여 얼굴에 조명을 비추는 효과를 내고 있다. 수척한 표정과 주름진 얼굴은 당시 초상화를 그리는 화풍과 매우 차이 나는 것이었다.
호바르트 플링크(Govaert Flinck)와 반 데르 헬스트(van der Helst)와 같은 화가들이 추구했던 맵시 있는 화풍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의 화풍은 점점 더 대중적 취향에서 멀어지고 있었는데, 그렇게 된 데는 크게 두 가지 요인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불행한 사건이 연거푸 몰려옴에 따라, 본의 아니게 칩거 상태에 빠지게 된 것이다. 아내 사스키아의 사망, 외아들 티투스를 비롯하여 4명의 자녀를 모두 잃는 슬픔, 빚 독촉과 경제적 몰락, 인생의 내리막길….
마티아스 샤이츠(Matthius Scheits)의 기술처럼, 그는 “뛰어난 예술성으로 존경을 받았지만 말년에 이르면서 사람들의 기억에서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그는 예전처럼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했고 사람들과의 교제에 서툴렀다.
이러한 정황은 그가 거칠고 투박한 스타일로 그림을 그리게 된 배경이 되지 않았나 싶다. 비록 대중의 취향에서 벗어나 있지만, 그는 그만의 고집스러운 길을 찾아가고 있었던 셈이다.
둘째는 인생의 황혼기에 들어 내면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인물에 대한 관심은 초기에는 그 자신이 모델이 되어 언제든 그릴 수 있다는 편리성에서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이유만으로는 그의 자화상이 갖는 깊은 의미를 설명하기 어렵다. 인간 내면을 꿰뚫어보고 싶다면, 우선 자신부터 들여다보아야 한다고 느꼈을 가능성이 높다. 렘브란트는 다른 사람의 내면 못지않게 자신에 대해서도 강하게 이끌렸고, 그러한 내면의 성찰은 그의 영적이고 초월적인 것에 대한 그의 접근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이었다.
‘63세의 자화상’은 인생 끝자락에 와 있는 한 인간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림을 보면서 침울하다거나 무기력하다는 식의 인상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으로 세상 풍파를 다 거친 의연한 모습의 노인을 보고 있는 것 같다.
하나의 단어를 골라내기 곤란할 정도로 그 표정이 미묘한 것 또한 숨길 수 없다. 정면을 응시하는 그의 시선에는 삶을 함께 하였던 사람들에 대한 추억과 연민, 온화함, 밀물처럼 서서히 다가오는 외로움 같은 것을 느낄 수 있다.
X선 촬영 연구에 따르면, 렘브란트는 자신의 모습을 처음에는 붓을 들고 작업 중인 화가로 의도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그는 생각을 바꾸어, 점차 나이 든 얼굴의 색채와 주름진 피부에 집중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생각해 볼 수 있는 작품이 ‘두 개의 동그라미가 있는 자화상’(1665-1669)이다. 그림에서 렘브란트는 어떤 미화 없이 단지 파렛트와 붓을 들고 시선은 정면을 향하고 있다. 아마도 렘브란트가 ‘63세의 자화상’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완성시켰다면 이 같은 포즈를 취하지 않았을까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이 그림의 숨은 뜻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본다. 렘브란트는 붓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인물이다. 그림으로 시작하여 그림으로 자신의 인생을 파노라마같이 보여주었으니 말이다.
그의 작품을 보면 직업 이상의 진지함이 실려 있다. 즉 삶의 체계로서 신앙이 예술에서 근간을 이룬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여 신앙을 삶과 예술로 드러내는 것이 곧 본인의 소명임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가 사망하던 해 완성한 역작 ‘돌아온 탕자’는 그의 인생을 한 편의 영화처럼 보여준다. 죄로 물든 인간이 집으로 돌아올 때 이유를 불문하고 탕자를 받아주신 아버지를 통해 그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을 감격적으로 묘출하였다. 단지 성경의 내용을 그린 것을 넘어 그 자신을 탕자로 표현함으로써 인생의 구원자가 하나님이심을 고백하였다.
‘63세의 자화상’은 ‘돌아온 탕자’가 그려진 해에 제작된 것이다. 우리는 이 그림에서 예전에 보이던 당당함과 거만함 같은 것을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사랑에 빚진 자’로서의 감정이 묻어난다.
그의 이마에 내리쬐는 빛은 단순한 인공적인 조명이 아니라 죄악을 덮어주는 은혜의 빛이요 사랑의 빛이란 생각을 갖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리라.
서성록 명예교수(안동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