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옥 박사 기독문학세계] 한 날의 생각
죽음, 두려움 동반하고 무거워
거대한 단절과 공포스런 상실감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떼 놓아
이후 세계 말하지 못해 더 공포
모든 인간에게 똑같이 적용되고
어느 누구도 뛰어넘지 못한다
“… 저승길에는 주막도 없다지. 내 술 한 잔 받어. 쭉 마시고 떠나게.”
이 문장은 친한 선배가 친구의 죽음을 맞아 쓴 조사의 마지막 부분이다. 두 사람은 고향 친구, 대학 동창으로 전공이 같은 분야의 의사였다. 친구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을 ‘한 잔 술’로 가볍게 맺었지만, 나는 선배의 슬픔과 상실감과 허망함을 짐작하고도 남았다. 마음이 아파왔다.
“… 고인이 된 친구 분께 칵테일 한 잔 올릴게요. … 막걸리보다는 과즙과 향미를 혼합하여 얻은 음료가 하늘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가볍게 하지 않을까 해서요. … 가주는 레드 와인으로 하고 오렌지 큐라소와 크레나덴 시럽을 조금만 넣을께요. 장식은 슬리스 오렌지로 하고 큰 잔에 얼음을 가득 채울게요. …”
내 카카오톡을 받은 선배는 곧 답을 보내왔다. “슬픔이 향기 속으로 사라져 가는구나….”
순간 이건 아닌데…,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나는 죽음의 문제를 깊이 생각하지 않았나(그 때는 소천하신 팀 켈러(Tim Keller) 목사님에 대하여 추모 마음을 품고 있던 시기였다). 이렇게 변덕스러워도 되는 것일까. 아무렇지도 않게 죽음을 희화화하고 있다니….
죽음은 두려움을 동반하는 참으로 무거운 주제이다. 죽음이 두려운 것은 거대한 단절과 공포스런 상실감 때문이다. 죽음은 나로부터 사랑하는 사람들을 떼어 놓는다. 내가 추구하던 모든 가치들을 빼앗아 간다.
문학이 예찬한 위대한 인간은 죽음 앞에서 어떻게 되던가. 태도 가치도, 창조와 경험 가치도 죽음 앞에서는 모두 쓸모가 없어진다. 이 ‘없어짐’은 죽음 이후의 세계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더 큰 공포심을 일으킨다. 모든 인간에게 똑같이 적용되고 어느 누구도 뛰어넘지 않는 죽음….
셰익스피어를 공부하던 학기에 나는 셰익스피어의 고향 마을 스트래드퍼드 어폰 에이번에 있었다. 에이번 강가의 한 숙소에 머물면서, 그의 문학의 순례길에 올랐다. 어느 날 국립 셰익스피어 극장에서 <햄릿> 공연 중, 햄릿의 인간 예찬 앞에 엄청난 감동으로 내 숨이 멎는 듯 했다. 바로 주인공 햄릿이 아버지의 사망과 후계자 문제에 대한 고민 중 나오는 2막 2장의 대사이다. 인간은 얼마나 위대한 걸작인가?
“How noble in reason, how infinite in faculty,
In form and moving how express and admirable,
In action how like an angel, in apprehension how like a god!“
(인간은 얼마나 고귀하고 능력이 무한한가.
형상과 동작은 명확하고 훌륭하다.
행동은 천사와 같고 이해력은 신과 같다.)
다음 날 오후엔 셰익스피어의 무덤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수많은 작품 속에 나오는 ‘죽음’이라는 주제를 깊이 되돌아 보았다.
셰익스피어만큼 죽음을 다양한 시각과 의미로 다루어 인간의 삶과 죽음의 복잡성을 탐구한 작가도 드물 것이다. 유구한 세월이 흐른 지금도 그는 살아 있어 독자들에게 죽음을 사색하고 고찰하도록 유도한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을 통해 인간의 육체적 한계와 무능력을 강조함으로서, 모든 인물들을 동기화하여 신을 향해 나아가도록 만들고 있다.
그러나 정작 셰익스피어는 죽음을 정의 하지도 않았고,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하여도 정확하게 말하지 못했다.
그 날 셰익스피어 무덤 앞에서 내 마음에 닿은 구절은 아이러니하게도, 한국 어느 시인이 쓴 셰익스피어의 죽음에 대한 시 구절이었다.
“머물지어다 지나가는 이여
어찌 그리 빨리 지나가느뇨
읽을 줄 알진대 읽을지어다
심술궂은 죽음이 무덤 속에
넣어놓은 그 사람 셰익스피어를”.
나는 알고 있었다. 아무리 셰익스피어를 읽어도 죽음의 정의나 그 이후 세계에 대하여 답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지금도 셰익스피어를 사랑하는 온 세계 사람들은 찬탄한다. 셰익스피어, 그의 판단은 네스트와 같고 천재는 소크라테스와 같고 예술은 버질과 같은 사람이라고.
그러나 대지는 그를 덮었고, 사람들은 이를 곡하고 올림푸스는 이를 소유하였다. 그의 문학이 죽음에 답을 주지 못한다는 것은 비극이다. 그가 죽을 때, 산 대자연도 같이 죽었다. 세상에 남긴 업적과 그의 영향력을 아무리 감탄하고 추모하여도, 죽음에 대한 답은 얻지 못할 듯 하다.
냉장고에 있는 재료로 레드 아이(Red Eye)를 만들었다. 토마토 주스를 텀블러에 따르고 맥주를 채운 다음, 휘핑 스푼으로 가볍게 저으면서 서재로 들어왔다.
여기서 나는 팀 켈러 목사님에 대한 추모의 마음으로 다시 돌아가려 한다. 그래서 나는 죽음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가. 죽음 이후 세계에 대하여 답할 수 있는가 등을 물어보고 싶다.
송영옥 교수
영문학 박사, 기독문학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