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티, 열쇠는 문해력이다 1] 서먹함이 설레임으로 바뀌는 큐티
기본 못 배우고 무작정 스키 시작
주일 교회 예배에서 했던 다짐들
월요일 아침에 다 잊고 세상으로
어깨 너머로 배운 신앙 오래 못가
오도가도 못하고 슬로프에 어쩡한 자세로 서 있었다. 기본도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리프트를 타고 무작정 올라갔기 때문이다.
대학 3학년 때 일이다. 아버지가 스키를 가르쳐준다고 해서 따라나선 것이다. 아버지는 반대쪽 15도 정도를 가리키면서, 밑에는 쳐다보지 말고 거기만 쳐다보고 가라고 하셨다. 반대편까지는 어찌해서 무사히 갔는데, 턴을 할 수 없었다. 넘어질까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랬더니 아버지가 내게 옆으로 주저앉은 다음, 발을 하늘로 올려 스키 방향을 틀라고 하신다. 아버지는 스키는 즐기지만 다른 사람을 가르칠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게 스키를 배웠다.
그나마 초보자 코스에 올라갔기에 감사했다. 코스가 조금만 더 가팔랐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 운동신경이 둔한 나는 마음만 헤매다 스키를 벗어들고서 다시 리프트를 타고 내려왔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신앙생활도 이와 다르지 않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게 되면, 교회에 나가서 예배를 드린다. 설교를 통해 받은 하나님 말씀을 지키려고 다짐을 한다.
하지만 월요일 아침이 되면 그 다짐은 온데간데없고, 세상 일에 바쁘기만 한 게 우리다. 다시 주일이 돌아오면 예배당에 나가 주일예배에 참석해 제대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다짐한다.
왜 이런 루틴이 반복되는 것일까. 기초부터 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깨 너머로 배운 신앙생활이 오래가지 못하는 이유다.
통독해도 답답하면 큐티 시작해
쉽게 배울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
마주 대하는 성경 본문 이해 안돼
주일에만 신앙생활하는 게 지칠 때쯤, 신앙 선배들은 조언한다.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신앙생활이라고 말이다. 그래야 하나님의 사랑을 누릴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단 성경부터 붙잡고 무작정 읽기 시작한다. 성경 본문을 읽어도, 잘 이해가 안 된다. 그래도 끈기 있는 성도들은 1독하겠다는 목표만을 붙잡고 그 어려운 고비들을 넘겨, 끝내 요한계시록까지 마무리한다. 하지만 그게 끝이다. 머릿속에 남은 것은 성경 속 큰 사건 몇 가지뿐이다. 성경을 덮게 되는 이유다.
성경을 그냥 읽으면 전혀 이해가 안된다고 하소연하는 성도들이 꽤 된다. 그런 성도들은 통독보다는 큐티(성경묵상)를 권유받는다. 큐티를 하면 하나님 말씀대로 살게 된다는 신앙 선배의 말에 솔깃해진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해 보고 싶은 성도는 큐티를 배우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것도 쉽지 않다. 처음 큐티를 배울 때는 쉽게 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들어, 기분이 좋아진다. 열심히 큐티하는 방법을 익힌다. 하지만 실제로 큐티를 하면, 마주하는 성경 본문들을 이해할 수 없다. 배운 방법대로 큐티를 할 수 없다.
난감해진다. 수학 공식처럼 x값만 찾으면 풀릴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본문도 이해하지 못했는데, 거기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분이신지, 나에게 하시는 말씀은 무엇인지 찾아야 한단다. 머리에 쥐가 나기 시작한다.
스키장에 처음 간 초보자에게 곤돌라를 타고 정상에 올라가 최상급 코스부터 타야 한다고 말하면 어떻게 될까. 고개부터 절레절레 흔들 것이다. 잘 설득해서 곤돌라에 태워 올라가도, 깎아지른 듯한 급경사에 지레 겁을 먹게 된다. 아무리 신체운동 지능이 뛰어난 사람이라도 쉽지 않다. 운동신경까지 둔한 사람에게는 공포일 수도 있다.
넘어지고 구르면서 내려가는 방법밖에 없다면 어찌 될까. 다시 곤돌라를 타고 내려올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감사할 상황이다. 스키장 근처에 다시는 오지 않으려는 사람도 꽤 될 것이다. 막무가내로 이리 구르고 저리 굴러 슬로프를 내려왔다면, 스키는 추억이 아닌 트라우마가 된다. 다시 스키장에 발을 내딛기 어렵다.
무작정 큐티 시작? 성경은 이해
대신 그대로 믿으라는 편견 심어
큐티 전에 일단 성경과 친해져야
낯선 성경 언어부터 눈에 익히자
큐티가 바로 그렇다. 무작정 큐티에 도전하기 때문이다. 그런 무모한 시도는 우리에게 편견을 심어줄 뿐이다. 성경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편견 말이다. 무작정 큐티에 도전한 결과가 오히려 안티 세력을 만들 뿐이다.
그래서 성경 본문도 이해 못하는 성도에게 문제 풀이하듯 큐티를 하라고 들이대면 안 된다. 그렇게 하면 오히려 성경을 멀리 하라고 권장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억지로 떠밀면 두려움이 더해진다. 마치 넘어질까 두려워 스키를 즐길 수 없는 사람처럼 말이다.
스키를 배우려면 일단 스키라는 도구부터 사귀어야 한다. 눈을 즐기면서 평지에서 친해지는 시간이 필요한 이유다. 그렇게 배우다가 리프트를 타고 싶은 생각이 들면, 그 때 올라가면 된다. 우리는 국가대표가 되기 위해 스키를 배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눈을 즐기며 누리기 위해 입문한 것이다. 눈 위에서 꼼짝하지 않고 서 있어도 재미있다면, 그것으로 만족이다. 스키장의 풍광을 누리게 된다.
큐티도 마찬가지다. 일단 성경과 친해져야 한다. 평상시 사용하지 않는 낯선 성경 언어부터 눈에 익히자. 서먹하지 않아야 말이라도 건넬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큐티를 시작하면 된다.
국어 실력 없어, 큐티 못하는 것
1차 목표는, 문단 이해하기부터
이해가 되면 묵상도 가능해진다
낯선 본문, 내 안으로 쑥 들어와
필자는 성도들이 큐티를 못하는 이유는 ‘국어 실력(?)이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문장이 이해가 안 되는데,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를 찾으려니 ‘보물찾기’가 되기 때문이다.
문장을 이해하고 문단이 눈에 들어오면, 어떤 본문이든 묵상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까 큐티의 1차 목표는 ‘문단 이해하기’이다. 문단이 이해되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나에게 하시는 말씀은 무엇인지’ 묵상할 수 있게 된다.
본문이 이해되면, 성경과 친해지게 된다. 낯선 본문이 내 안에 들어오게 된다. 그렇게 서먹함이 설레임이 되어 일상에서 신앙생활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이제 차근차근 하나씩 큐티하는 방법을 알려드릴 예정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님들의 일상이 큐티로 풍성한 신앙생활을 누리게 되기를 소망한다.
이석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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