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성록, 한 점의 그림] 인물화의 두 차원
지난 편에 이어, 서성록 교수님의 국립중앙박물관 영국 내셔날 갤러리 ‘거장의 시선전(2023. 6. 2- 10. 9)’ 감상 후기입니다. -편집자 주
피테르 브뢰헬 <농민의 결혼 연회>
니콜라 푸생의 <바커스 양육> 비교
건강한 인간 인식, 예술 지평 넓혀
헬레니즘과 기독교 차이도 선명해
종교개혁은 교회 지형을 크게 바꾸어 놓는 데 그치지 않고, 문화 영역에도 영향을 미쳤다. 문화란 규제 없는 인간의 창조적 활동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설정하신 구조 내에서 인간의 창조력 발휘와 그 산물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현상은 회화 예술에서도 똑같이 목격된다.
과거에는 화가의 작품 활동이 선지자와 사도, 성인 등의 이상화된 모습을 묘출하는 것으로 제한되었다. 반(反)종교개혁을 표방한 트렌트 공의회(Council of Trent)에서는 미술가가 성경의 이야기나 전통적 이야기에 국한된 주제만을 다루도록 규제하였다. 천사들을 그릴 경우 반드시 ‘날개’를 달아야 하고, 성인들은 구별된 존재로 ‘후광’을 넣어야 한다는 등의 단서를 붙였다. 이에 따라 그림에서 성과 속의 구별은 더욱 분명해졌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크게 바뀐다. 종교개혁 이후 하나님께서 신분과 외모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은혜를 베푼다는 깨우침을 받게 되자, “화가들의 관심은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향하지 않고 모든 계층과 지위의 사람들을 주제로 하여 표현하기 시작했다(아브라함 카이퍼).” 인간을 인간답게 바라보게 된 것은 종교개혁으로 인해 새로운 통찰이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이 점을 보여주는 작품이 플랑드르 화가 피테르 브뢰헬(Pieter Brugel the elder)의 <농민의 결혼 연회>(The Peasant Wedding Banquet)(1568)이다. 소작농의 일상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는 브뢰헬은 16세기 농민의 결혼 풍습을 재현한 ‘장르 그림(풍속화)’을 제작한다.
연회는 어느 지주의 헛간에서 열리고 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동네 사람들이 식탁에 둘러앉아 결혼식 축하연에 참석하고 있다. 색 바랜 청록색 포대를 배경으로 신부가 다소곳하게 앉아있고, 화면 전면에는 일꾼들이 경첩을 떼어낸 문에 ‘레이스트파프’라는 향토 음식을 나르고 있다.
이 무렵 플랑드르 농민들이 주로 먹었던 것은 빵과 오트밀, 스프였는데, 여기에 포도주 또는 맥주가 더해져 한층 잔치 분위기를 더해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의 눈길을 끄는 인물이 한 명 있다. 연회에 흥을 북돋는 주요 역할을 맡은 화면 중경의 백파이프를 부는 악사이다. 전통 복장을 한 악사는 악기를 불다 말고 잠깐 딴청을 부리고 있다. 그의 시선은 음식으로 향하고 있는데, 그 역시 허기진 상태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이 그림에서는 거의 모든 인물들이 연회를 즐기는 중이다. 입에 음식물을 떠 넣는 장면을 그리지 않는 것은 당시 화가들의 불문율과 같았다. 이런 사실을 비웃기라도 하듯, 화면 속 인물들은 식사를 하는데 정신이 팔려 있다. 이같은 동작은 그림을 실제처럼 보이게 하고 활기차게 만든다.
플랑드르에서는 신랑이라 할지라도 하객들을 위해 음식 운반을 거들어야 했는데, 이 그림에서 신랑은 포도주 또는 맥주를 돌리며 이웃 주민과 친인척, 친구들을 대접하고 있다.
<농민의 결혼 연회>에서 브뢰헬은 신혼부부 축하연을 역동적 구성과 특징적 인물 배치로 보여주고 있다. 이 그림 왼쪽을 보면 새로운 손님들이 밀려드는데, 이 연회는 지금이 한창이 아니라 이제 막 시작됐음을 보여준다. 맛있는 음식과 유쾌한 음악 속에 잔치 분위기는 한층 무르익어가는 중이다.
물론 이와 대조적인 화가도 있었다. 대부분의 생애를 로마에서 보낸 프랑스의 니콜라 푸생(Nicholas Poussin)은 르네상스 인물주의 전통을 따르는 고전주의 화가였다. 일상적인 세상 너머에나 있을 법한 신화적 인물들을 주로 그렸는데 <바커스의 양육>(1628년경)도 그런 예에 속한다.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Ovidius Nas)의 『변신 이야기』에는 제우스의 아들 바커스(후일 디오니소스)가 바람을 피워 낳은 아이를 이모인 이노에게 맡겨 양육시켰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림에서 바커스는 이노의 남편 아타마스 왕에게 의지해 포도즙을 받아 마시고 있다. 파란 옷을 입고 있는 여성은 이노로 추정되고, 화면 오른쪽 날개 달린 아기 푸토가 한손으로 염소를 붙잡고 다른 손으로는 포도를 가리키는데, 이는 포도를 먹은 염소를 제물로 바치던 관례를 상징한다.
이 그림은 브뢰헬의 <농민의 결혼 연회>와 비교된다. 등장인물부터 작품 내용까지 차이점이 뚜렷하다. 브뢰헬이 천한 신분의 군상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푸생은 범접할 수조차 없는 신들의 세계에 초점을 맞추었다. 전자가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중점을 두었다면, 후자는 신화의 세계에 중점을 두었다.
앞의 작품이 어릴 적부터 보아오던 동네 젊은이들의 혼인을 축하하고 함께 즐거워하는 평민들의 일상을 그렸다면, 후자는 이노가 바커스를 사랑하는 것을 시기하여 나중에 헤라의 대리인을 시켜 이노와 아타마스를 미치광이로 만들어버리는 비정한 내용을 담고 있다.
라이너와 로즈 마리하겐에 따르면 “브뢰헬 이전의 어떤 화가도 감히 그러한 작품을 제작할 엄두조차 갖지 못했다. 동시대 미술은 일반적으로 농민을 어리석고 게걸스럽고 술에 취하고 폭력에 취약한 것으로 간주하여 조롱의 대상으로 여겼다.”
과거의 눈으로 보면 이 작품은 십중팔구 졸작으로 평가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브뢰헬은 그런 통념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브뢰헬은 프로테스탄트 정신에 따라, 농부들의 삶을 참다운 인간의 눈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예술적인 방식으로 실현해냈다.
푸생의 작품에는 인간이 꿈꾸었던 그럴듯한 가상적인 세계,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체계적이고 정연하게 수립된 헬레니즘 사상과 우주관이 스며들어 있으나, 브뢰헬의 작품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다. 브뢰헬은 우리가 눈을 뜨기만 하면 느낄 수 있는 실재의 충만함, 세상의 역동성에 시선을 맞추었다.
물론 브뢰헬도 그가 살고 있는 세상은 검은 구름이 한 점 없는 완전한 곳이 아님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세상 역시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영역임을 깨닫고, 세상과 그곳에 거주하는 이웃을 무척 사랑하였던 것 같다.
브뢰헬이 평범한 농부를 주제로 삼은 것은 종교개혁의 시대적 배경 안에서 가능했으며, 그가 농부들의 삶과 일상에 주목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 역시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인식 없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즉 인간을 바라보는 건강한 인식이 예술의 지평을 여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 셈이다.
서성록(안동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