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성록, 한 점의 그림] 조혜경 작가
아픈 사연 껴안고 사는 세상에서
슬픔과 고뇌를 보듬고 치유하는
하늘의 터치 묵상하며 작품 제작
인간이란, 하나님의 만지심 없이
한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 존재들
구속하신 예수 사랑 크고 놀라워
조혜경은 세상의 아픔과 상처, 그리고 위로를 전달하는 작가이다. 그는 ‘터치(그림1)’라는 작품을 통해, 인간을 찾아오신 그리스도와 그 분의 사랑을 묘출한다.
작품에 등장하는 형상의 아웃라인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가 사랑했던 한 여성과 관련이 있다. 반 고흐는 벨기에 보리나주 광산에서 선교사 활동을 마치고, 미술가로서 새 출발을 결심한 무렵 삼촌 안톤 모베(Anton Mouve)가 활동하던 헤이그로 그림을 배우러 갔다가 시엔을 만났다.
‘시엔’으로 알려진 클라시나(Clasina Maria Hoornik, 1850-1904)는 가난한 집안의 10남매 중 장녀로 태어나 살림을 도맡았는데, 가족은 공공 급식소와 교회 자선단체의 도움에 의존하여 살았다. 가족을 떠맡은 그녀는 종국에 매춘까지 해야 하는 상황까지 내몰렸다.
고흐가 시엔을 만났을 때 그녀는 알콜 중독에다 임신한 미혼모였다. 고흐는 그녀를 모델로 썼다가 나중에는 “그녀와 아이를 굶주림과 추위로부터 보호해주기 위해” 자기 집으로 데려왔다. 그렇게 그들의 동거는 시작되었다. “인생이 아무리 어둡다고 해도 평범한 여자를 사랑하고 또 그녀에게 사랑받는 사람은 행복하다(1882. 6. 1-2).”
고흐는 환경을 뛰어넘어 시엔을 사랑했던 것 같다. 고흐는 시엔을 ‘짐을 나누어 짊어진 동반자’로 불렀다. 보통 사람이라면 창기를 사귀는 것을 비난했겠지만, 빈센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시엔과 가족을 모델로 한 60여 점의 빈센트의 드로잉 수채화 중 ‘슬픔(Sorrow, 1882, 그림2)’이라는 작품이 있다. 여성의 이미지는 우리가 고전 명화에서 즐겨 보던 우아한 여성의 모습과 거리가 멀다. 늘어진 피부, 주름진 얼굴에 가슴은 처져 있고, 배는 나와 있다. 외형적 요소를 미의 기준으로 삼지 않았던 반 고흐는 여인이 처한 위기가 눈에 띄었다. 이것은 조혜경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조혜경은 “이 누드 형상의 실루엣이 우리의 슬픔을 담기도 하고, 마치 우리가 웅크리고 기도하는 모습인 것 같기도 해서 이것을 차용하게 됐다. 고흐도 그림을 그리며 아픈 이웃을 섬기기 위해 노력을 했다. 나도 그래서 주위 아픔을 당하고 있는 이웃을 섬기고 싶다. 그런데 먼저는 주님의 은혜를 받아야 이것을 흘려보낼 수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이렇게 위로부터 ‘영적 내리흐름’의 모습을 표현했다”고 말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녹록치 않듯, 조혜경의 화면 역시 곳곳이 패이거나 상처가 나 있다. 작가는 우리 세상이 험지이고 위험에 노출돼 있음을 암시한다. 우리는 이런 곳에서 암초를 만나 넘어지고 일어나기를 반복한다. 그러던 어느 날 눈에 잘 띄지 않는 구석진 곳에 앉아 있는 인물을 만난다. 그 사람이 바로 시엔이다.
‘슬픔’을 그리기 몇 달 전, 고흐는 세찬 바람에 뿌리가 절반쯤 뽑힌 ‘뿌리(Root, 1882, 그림3)’를 제작했다. 이 작품이 인간의 ‘고뇌’와 ‘고뇌’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면, <슬픔>은 나무를 통해 살고자 하는 여인의 ‘몸부림’을 절실하게 표현한 것이다.
이 작품에서 조혜경은 인간의 슬픔은 끝나지 않았다고 보았다. 조혜경은 그림을 그릴 때 고흐가 헤이그에서 만난 여인이 시엔이 아닌 현존 인물, 곧 우리 이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조혜경의 ‘터치’는 사랑과 신뢰가 멀리 있다고 생각할 때, 꿈이 표류할 때 이 고통스런 질문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파커 J. 파머(Parker J. Palmer)의 말대로 어떤 사람이 인생의 깊은 골짜기에 진입하여 큰 슬픔으로 절망에 빠지며 더 이상 살아갈 가치가 없다고 확신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다양한 내면 활동을 통해 마음이 더 커지고 자비로워졌음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이 말은 받아들이긴 어렵지만 설득력은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처음 받은 슬픔에 잠겨 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사람이 나와 비슷한 상황에 처했을 때 동병상련의 마음을 품게 되기 때문이다. 상실감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 상실감 때문에 타인의 슬픔과 기쁨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더 커지는 셈이다.
조혜경은 이런 일들이 ‘나와 너, 우리’ 사이에 실현되기를 바란다. “우리라는 연대를 통해 고통을 공감하고 함께 나가는 것, … 우리가 서 있는 삶의 자리, 바로 그곳이 하나님이 현존하시는 자리임을 알고 상처 입은 자들과 함께 하며 그들을 홀로가 아님을 드러내보고자 한다(작가노트).”
시엔의 이미지 곁에 이전에는 볼 수 없던 화사한 색채가 가미된다. 그것은 화면의 조화를 위한 단순한 색채대비가 아니라 새로운 희망을 향한 표시이다(그림4).
그의 그림에서 어둠과 빛, 쇠락과 생명, 슬픔과 희망은 대립물이 아니다. 이들은 서로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으며 현실의 중심에서 신비한 통합을 이루고 함께 창조한다. 더 깊이 생각하면 이것들은 온전함을 위해 서로를 필요로 하는 것 같다.
우리 가운데는 인생의 봄만을 원하는 사람들, 그러니까 어둠 없는 빛, 고통 없이 삶의 쾌락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지만, 그것은 결코 우리에게 진실한 생기를 주지 못한다. 역경의 시간을 갖지 못한다면 유연한 마음을 키울 기회나 자비로운 마음을 부양할 시간을 갖지 못하는 것과 같다.
파커 J. 파머가 ‘역설적 무도(舞蹈)’라고 명명한 이 대립적 요소의 공모는, 놀랍게도 우리를 내적으로 자라게 하고 성숙하게 만들어 준다.
<터치>는 가슴 아픈 사연들을 껴안고 사는 세상에서 인간의 슬픔과 고뇌를 보듬고 치유해주는 하늘의 터치를 묵상하며 제작한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만지심 없이는 하루도, 한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 존재들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 슬픔과 고뇌를 불행으로 인식하기보다, 새로운 삶의 씨앗들이 파종되는 순간으로 받아들이고 함께 부를 새벽의 노래를 준비하는 것이리라. 조혜경의 작품은 우리를 구속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알려준다.
서성록(안동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