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성록, 한 점의 그림] 들풀의 아름다움
피조물 지으시고 돌보시는 하나님
기후변화로 피조물 위협하는 인류
17C 네덜란드 화가, 풍경화 창안
자연, 하나님 작품으로 봤기 때문
들꽃과 들풀에, 사랑스러운 눈빛을
창조 세계 이해는 못해도 돌보자
필자가 집 가까이에 있는 베르네천을 자주 찾는 이유는 일과 중 하나인 산책 때문이지만, 이곳에서 벌어지는 ‘작은 소동’ 때문이기도 하다.
얼마 전에는 야생오리가 새끼를 낳아 어미가 네 마리 새끼를 데리고 먹이 사냥에 나섰다. 갓 태어난 새끼 오리였다. 물론 왜가리나 백로도 종종 볼 수 있지만, 도심에서 야생오리를 볼 수 있다는 것이 마음을 설레게 한다.
물 표면에서 먹이를 부리로 쓸어담듯 주어먹는 동작이 진기하게 여겨졌고, 그런 새끼들을 옆에서 기다려주는 어미의 모습도 사랑스러웠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다시 찾았을 때는 어미의 모습도, 두 마리 새끼도 보이지 않았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살펴보았으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어미는 두 마리 새끼들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마음이 썩 좋지 않았다.
그로부터 며칠이 흐른 후 색다른 광경을 보았다. 어미 보호 없이 ‘마실’에 나선 남은 두 마리 오리 새끼들을 만난 것이다. 아직 어미의 보살핌이 필요한 시기일텐데, 벌써 독립한 것일까.
그런 생각도 잠시뿐, 전혀 다른 모습을 목격하게 되었다. 열심히 물밑을 훑던 두 마리 오리는 무언가에 놀랐는지 후다닥 날아가 버렸는데,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날아간 곳을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불과 몇 개월도 되지 않았는데 성체로 커서 독립 생활을 한다는 사실이 대견스러웠다.
베르네천에서는 물고기와 야생오리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거기서는 무수한 꽃들과 들풀을 만날 수 있다. 산책을 하면서 느끼는 또 다른 즐거움은 야생화와 들풀과의 만남이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 하나하나의 모양과 형태, 그리고 꽃을 피우는 시기가 다르다는 것에 눈길이 갔다.
게다가 그것들은 저마다 이름을 갖고 있다. 종려방동사니, 익모초, 댑싸리, 방아깨비, 절굿대, 원추리, 씀바귀, 자주 개자리, 골담초, 강아지풀, 붉은 토끼풀, 억새풀, 쇠뜨기, 금계국 등. 얼마 전에는 하천 모퉁이에 지자체에서 코스모스 씨앗을 수천 아니 수만 개를 뿌려놓았는데, 벌써부터 가을의 찬란한 스펙터클을 기대하게 만든다.
베르네천은 전에 ‘오염된 하천’으로 불렸던 곳이나, ‘생태 하천’으로 거듭난 곳이다. 주민들은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곳을 산책하며 살아있는 생태를 즐기지만 이곳은 인근에 있는 부천식물원과 비교할 바가 못 된다. 볼거리가 풍부할 뿐 아니라 훨씬 좋은 환경을 갖춘 그곳보다, 필자가 자주 찾는 곳은 특별한 스토리를 갖고 있는 베르네천이다. 이곳은 굴곡진 사연을 갖고 있기에 더욱 애착이 가는지 모른다.
베르네 생태하천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어떻게 생태환경이 갖추어질 수 있었는지 궁금해졌다. 물론 여기 식물들은 거의가 다른 데서 옮겨온 것이거나 파종된 것이며 공원 직원의 친절한 관리를 받은 것들이지만, 그들의 역할은 아무래도 제한적이다.
식물들은 날씨와 온도 등 외부적 영향을 받으며 성장할 수밖에 없다. 스스로 자신의 종을 선택할 수도 없다. 그것은 모두 외부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최고의 상상력을 지닌 누군가에 의해 정교하게 디자인된 것들이다.
성경에선 하나님께서 이 식물들을 지으셨고 보존하시며 돌보신다고 기술한다. 계절의 순환 속에서도 동네 개천의 식물뿐 아니라 남태평양 무인도에 핀 각종 열대 식물까지, 지구상 모든 식물들이 그분의 창조력과 솜씨로 지어졌다는 것을 상상하면 놀라움을 금치 못할 뿐이다.
어떻게 그 많은 것을 보존하시고 돌보시는지, 우리의 머리로는 지레짐작조차 할 수 없다. 자연의 오묘함 속에 신성의 흔적을 발견하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다.
그런데 이런 피조계가 기로에 처했다는 신호가 여러 곳에서 들려온다. 지구과학자 E. G. 니스벳(E. G. Nisbet)의 지적처럼 “지구는 상처를 입고 있으며, 그 상처는 더 심각해질 것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증거는 명백하다”고 단언한다. 삼림 파괴, 물 부족과 오염, 땅의 황폐화, 늘어나는 쓰레기, 에너지 소비 증가, 산성비, 지구의 기후변화, 자연의 남획과 기아 등은 인류와 동식물의 안녕을 위협할 수준까지 그 심각성이 치닫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어쩌다 이같은 혼돈에 빠지게 되었을까? 우리가 지속적으로 자연을 망가뜨린 이유를 어떻게 해명할 수 있을까?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셨을 때 “새벽 별들이 기뻐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뻐 소리를 질렀다(욥 38:7)”고 했는데, 잊어버린 기쁨과 환희를 어떻게 되찾을 수 있을까? 여러 질문들을 품게 된다.
17세기 네덜란드 화가들은 자연의 존재와 아름다움을 신의 계시로 여기고 과거에는 전무하였던 초유의 그림 형태, 즉 ‘풍경화’를 창안해 냈다. 네덜란드 미술가들 중 유독 풍경화가 많은 것은 그들이 자연을 ‘하나님의 작품’이요, ‘하나님의 선하심’을 그속에서 찾은 것과도 연관이 있다. 매일 접하는 것들을 주의 깊게 바라봄으로써 우리의 세상을 새롭고도 경이롭게 만들어주는 것이 예술가들의 역할 중 하나다.
존 매쿼리(John Macquarrie)는 예술을 ‘계시와 같은 어떤 것’으로 보며 “드러난 것은 항상 거기에 있었으나 우리의 단조로운 일상 경험 속에 묻혀버렸다. 예술가의 감성은 이것을 조명해서 우리로 하여금 사물들을 처음으로 인식할 수 있게 해준다”고 했다.
습관이 성품을 만든다고 한다. 좋은 성품을 형성하려면, 선하고 아름다운 일을 내재화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체화시키지 못하면 쓸모가 없다.
잠깐 짬을 내서라도, 오늘은 들꽃과 들풀을 바라보며 사랑스러운 눈빛을 보내주면 어떨까. 이런 눈빛들을 자주 교환하다 보면 우리 속에 아름다워지고자 하는 마음이 커지고, 자연에 대한 우리의 시각도 달라지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우리는 창조세계를 하나님 은혜의 구현, 곧 땅과 하늘, 언덕과 골짜기, 나무와 꽃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지 않을까? 우리에게 감각을 주셔서 들풀과 들꽃의 아름다움을 보게 하신 것에 감사하지 않을까?
복잡하고 경이로운 체계로 이루어진 창조 세계의 신비를 낱낱이 이해하지는 못해도, 그것을 돌보는 일은 우리가 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사랑하고 섬기는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의 표현이기도 하다.
서성록 명예교수(안동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