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성록, 한 점의 그림] 정물화가 장 시메옹 샤르댕
기물들 바라보는 애정 어린 시선
일상 반복과 권태 반영된 실내에
고유한 색 입히고 긴 잠에서 깨워
잠시 발걸음 늦추고 자세히 보기
일상의 소소한 것, 반복적이고 무미건조한 것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볼 때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정물화가 장 샤르댕(Jean Siméon Chardin, 1699-1779)의 그림이 주는 교훈이다.
샤르댕은 그의 활동 기간 동안 정물화를 중점적으로 그렸고, 그 정물화의 대부분은 가정용 냄비, 그릇, 그리고 부엌 도구들을 묘사하였다. 동일한 냄비와 그릇들은 때로 양파나 계란, 한 덩어리의 빵과 함께 또다시 등장하기도 했다.
정제된 그의 화풍은 동시대 화가들의 화풍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는데, 그 시대를 풍미했던 로코코 화풍은 그의 평범한 소재와 검소한 컬러와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그를 종종 파울로 베로네세(Paolo Veronese)나 반 다이크(Anthony van Dyck)와 비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기물들의 성격이나 구성은 제인 포세이(Jane Forsey)가 말한 것처럼 ‘풍요의 소요’를 반박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18세기 프랑스에서 태어난 샤르댕은 평생 고향 파리를 떠나지 않았다. 발군의 실력으로 그는 20대 후반 왕립 미술원에 가입했다. 그때 미술 주류는 고급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선호하던 역사화(신화·역사·종교)가 가장 으뜸의 위계에 위치했고, 정물화는 아무나 보면 알 수 있는 것으로 되어 가장 낮은 위계에 속한 장르로 분류되어 있었는데, 왕립미술원이 그런 정물화가인 샤르댕을 입회시켰다는 것은 그의 기량이 어떠했는지 가늠케 해준다.
그는 왕립미술원의 재정 담당자로 살림을 도맡았으면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을 뿐 아니라, 국왕 루이 15세로부터 루브르 궁내에 관사와 스튜디오를 하사받는 등 영화를 누리기도 했다. 그가 말년에 시력이 악화되어 파스텔 매체를 이용한 초상화를 제작하다 생을 마감한 곳도 루브르 궁이었다. 이런 면에서 보면 그는 화가로서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여기서 언급하고자 하는 부분은 그의 예술 세계이다. 그의 명성과는 대조적으로 그의 그림은 단순하고 평이하다. 뜻밖에도 그의 화면은 가정집 부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로 채워져 있다. 그런데도 그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혹자는 그의 그림이 어떤 알레고리나 메타포를 갖지 않은 점에 주목하면서 어떤 윤리적·종교적 교훈도 제시하지 않는다(Frédéric Ogée)는 점을 들거나, 인간이 사물에 부여하는 의미를 차단하고 인간 중요성의 규모를 깨뜨렸다(Bryson)고 주장하기도 한다.
샤르댕 연구의 권위자인 피에르 로젠버그(Rosenberg)는 친숙한 부엌용기가 지닌 질감과 색채, 그리고 이들이 반사하는 빛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이를 재현해낸 것이 최대 성과였다고 진단하였다. 그런가 하면 제인 포세이는 그의 작품이 가지는 ‘무시간성’과 ‘고요함’은 우리를 알 수 없는 더 완전한 상태로 인도한다고 보았다.
샤르댕 작품을 높이 평가한 사람은 많이 있지만, 필자는 그중에서도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1922)의 시각이 제일 정확하다고 본다. 소설가로 알려져 있지만 미술평론가로도 활약했던 프루스트는 그림에도 정통한 지식을 지녔다. 그에 따르면 그림의 아름다움을 결정하는 것은 그안의 표현된 소재의 거대함이나 화려함이 아니라, 소박한 정물을 아름답다고 본 화가의 시선이다.
샤르댕의 그림을 보면 커피포트와 물잔, 시든 꽃과 마늘 세 쪽이 놓여 있다. 전체 색조는 갈색의 모노톤으로 채색되어 있고, 보이지 않는 창문으로부터 내려온 빛이 물 잔과 커피포트 위에 살포시 내려와 앉아 있다. 샤르댕은 일상의 향기가 가득한 기물 속에서 그것이 선사하는 기쁨을 표출하고자 했던 셈이다.
프로스트는 거실, 부엌, 찻잔이 그려진 그림이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는 이유는 샤르댕이 이러한 것들을 대면했을 때 순간을 포착하고 일시성을 제거하여 그것들에 깊이와 항구성을 부여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만약 며칠 동안 샤르댕의 그림들이 하는 말을 귀 기울여 듣는다면 당신은 일상에 매료될 것이며, 회화의 삶을 이해하고 더불어 삶의 아름다움을 쟁취하게 될 것이다(샤르댕과 렘브란트)”.
마르셀 프루스트가 일상의 반복과 권태가 반영되는 것만으로 인식되는 실내에 샤르댕이 마치 한줄기 빛처럼 각각의 사물에 고유한 색을 갖게 하고 긴 밤에서 정물들을 깨어나게 했다고 보는 것은, 우리 일상에 대해 새롭게 눈을 뜨게 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나태주 시인은 <풀꽃>(2002)이란 시에서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고 했다. 우리는 과거의 방식대로 인식하고 대면하는 것에 익숙해 있다. 즉 시선의 ‘관성적 처리(시인 빈섬)’가 ‘자세히 보는 것’을 훨씬 능가한다.
세상의 아름다움을 더 많이, 자주 체험하기 위해서는 잠시 발걸음을 늦추고 자세를 낮추어 ‘자세히 보아야 한다.’ 그러면 그것이 이름없는 들풀이건 평범한 물건이건 아름답게 보일 수 있다. 빠르게 달려가는 것에 집중하는 사람에게 풀꽃이 눈에 띌 리 없다. 샤르댕이 정물에 몰두할 수 있었던 것은 나태주 시인의 애정 어린 시선과 맞닿아 있다.
기독교 미학에서 ‘바라보기’의 미적 행위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 분의 모든 창조물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는 기쁨이 충일한 성향을 일컫는다. 인간은 창조주의 사랑과 기쁨을 반영하고 있으므로 이웃과 피조세계 속에서 그러한 사랑과 기쁨을 느껴볼 수 있다.
샤르댕의 그림이 일깨워주는 지점은 바로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는 것이다. 그럴 때 긴 잠에서 깨어난 공주처럼, 우리는 그것들과 대화를 나누게 될 것이다.
서성록 명예교수(안동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