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저자가 펴낸 모차르트 평전
음악 신동? 평생 부지런히 노력
해가 갈수록, 음악 깊이 더해져
사랑과 자유, 유토피아 꿈 노래
프리메이슨 가입, 죽음 미궁 속
모차르트 평전
이채훈 | 혜다 | 808쪽 | 32,000원
“모차르트의 음악이 달콤하기 때문에 그를 ‘온실 속의 화초’로 여기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하지만 그의 길지 않은 35년 인생은 눈부신 성공과 쓰라린 좌절, 영광과 고통으로 가득했다.”
‘신이 내린 천재 음악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의 출생부터 사망까지 전 생애를 총망라에 한 권의 책에 담았다. 저자는 MBC 스페셜 2부작 <모차르트: 천 번의 입맞춤, 마술피리>를 제작한 방송사 다큐멘터리 PD 출신으로, 이 책은 한국인 저자가 쓴 첫 모차르트 전기인 셈.
모차르트는 잘 알려졌듯 종교음악도 다수 작곡했다. 가장 잘 알려진 마지막 작품이자 미완성곡인 레퀴엠(Requiem)을 비롯해 23세에 작곡한 ‘대관식 미사(Krönungsmesse)’ 등 15곡의 미사곡(예배곡)과 소프라노를 위한 모테트 ‘환호하라, 기뻐하라(Exsultate, Jubilate’ 등을 남겼다. 대부분 잘츠부르크 시절 탄생한 작품들이다.
책 맨 처음 유럽 각 나라의 ‘모차르트 당시의 화폐’ 단위부터 알려주며 범상치 않게 책을 시작하는 저자는 언론인 출신이라 그런지, 머리말에서 자신의 ‘게이트 키핑(Gage Keeping)’ 기준을 제시한다. 기존 평전들이 충분히 강조하지 않은 모차르트의 몇 가지 특징에 주목했다는 것.
첫째는 ‘음악 신동’으로부터 시작해 평생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그의 뒤에 가려진 ‘부지런히 노력한 음악가’로서의 면모다. 그는 “내가 쉽게 곡을 쓴다고 생각하면 오해”라며 “고금의 중요한 작곡가 중 내가 철저히 공부하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다”고 밝혔다고 한다.
둘째는 모차르트의 음악이 짧은 35년의 생애 가운데서도 끊임없이 ‘무르익어갔다’는 점이다. 모차르트는 어린 시절부터 경이로운 재능을 보였는데, 해가 갈수록 음악의 깊이가 더해갔다. 대부분의 작곡가들이 나이가 들수록 원숙한 곡을 쓰지만, 모차르트는 천부적 재능 때문에 그 사실이 잊혀진다는 것이다.
셋째와 넷째는 모차르트가 ‘사랑’ 그리고 ‘자유’ 없이 살 수 없는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그의 음악에는 동요부터 아리아까지 사랑이 넘쳤고, 모든 사람이 존중받는 유토피아의 꿈을 노래하면서 자유와 평등과 형제애의 시대정신을 오페라에 담아냈다.
위에서 소개한 슈바이처의 <바흐 평전>과 다르게 작품 분석보다는 모차르트라는 인간의 생애에 방점을 뒀다. 저자는 음악 비전공자라는 전공을 살려, 악보라는 ‘텍스트’보다 역사적 맥락인 ‘콘텍스트’를 파고들었다. 이에 성장 과정에서 아버지의 역할, 아내 콘스탄체와의 사랑, 빈 시절의 경제 상황, 때이른 죽음의 원인 등 더 탐구해야 할 영역들을 기존 연구 성과에 더해 나름의 해석을 붙였다.
‘프리메이슨’이라는 제목으로 한 장을 할애한 것도 흥미롭다. 그는 ‘자유·평등·형제애’라는 이념에 공감해 1784년 12월 5일 프리메이슨 ‘선행’ 지부에 가입했다. 기독교인들에게는 의혹 투성이로 보이는 프리메이슨은 모차르트가 살던 도시 빈에도 여러 지부가 있었다. 음모론과 자주 엮이는 일루미나티 영향이 짙었던 ‘참된 화합’, 신비주의적 경향이 강했던 ‘아시아 형제’ 등이다.
당시 프리메이슨 지부는 정치적 성격이 강했고, 모차르트는 일반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정치의식이 높았다. 그의 성악곡에서는 프리메이슨 영향을 보여주는 대목들이 적지 않고, 프리메이슨 집회를 위해 많은 음악을 작곡하기도 했다.
그의 오페라 <후궁 탈출>, <피가로의 결혼>, <돈 조반니>, <여자는 다 그래>, <마술피리> 등에는 예외 없이 프리메이슨의 이상이 담겨 있다. 심지어 서양음악사(史) 최대 의문사(死)로 남은 그의 사인(死因) 중 독살설에도 살리에리와 함께 프리메이슨이 등장한다.
저자는 “모차르트가 프리메이슨에 가입한다고 해서 종교를 바꿀 필요는 없었다. 가톨릭 성직자 중에도 회원이 많았다”며 “교황청은 1738년과 1751년 프리메이슨을 이단으로 규정했지만, 교황의 명령은 빈에서 이렇다 할 효력이 없었다. 그는 정치 이슈를 주의깊게 관찰하고,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오페라와 가곡에 담았다”고 설명했다.
‘프리메이슨’ 바로 앞장 ‘대미사 C단조’에서는 모차르트의 종교가 소개된다. “모차르트의 종교는 물론 가톨릭이었다. 하지만 그는 교회의 권위를 추종하고 의례를 중시하기보다는 진실된 내면의 신앙을 더 중요시했다. 그는 가톨릭의 기득권을 제한하고 허례허식을 폐지한 요제프 2세의 개혁을 지지했다.”
모차르트가 ‘바흐’를 언급한 부분도 눈에 띈다. 그런데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가 아닌, 그의 둘째 아들 ‘요한 엠마누엘 바흐(Carl Philipp Emanuel Bach, 1714-1788)’를 지칭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모차르트는 동시대 음악가였던 하이든에게 “엠마누엘 바흐는 아버지이고 우리는 모두 그의 자식들”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엠마누엘 바흐는 ‘북독일의 바흐’로 불리며 당대에 아버지 바흐를 능가하는 명성을 누리고 있었다. 우리는 지금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를 ‘음악의 아버지’로 부르는데, 모차르트는 그의 아들 엠마누엘 바흐를 ‘(음악의) 아버지’로 지칭하고 있다.
저자는 알려진 자료들과 함께 모차르트가 가족이나 친구와 주고받은 편지들을 통해 그의 짧고도 긴 35년간의 삶을 유려하게 풀어낸 후 말한다. “인간은 따뜻한 체온이 있기에 차가운 기계와 구별된다. 200여 년 전 세상에 나온 모차르트 음악은 우리가 결코 잃어서는 안 될 인간의 온기를 되살려준다.”
의사 슈바이처가 엄청난 바흐 평전을 썼듯, 위대한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은 모차르트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모차르트 음악은 너무나 순수해서 우주에 언제나 존재했던 것처럼 보인다. … 내게 죽음이란 모차르트의 음악을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