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재 선교사의 ‘아프리카에서 온 편지’ (3)
선교 현장 만만치 않고, 현실은
‘파인애플 이야기’와 전혀 달라
선교는 낭만 아닌 현실, 장밋빛
드림 아닌 매일 죽어야 하는 현실
절망의 광야 현실로 딛고 불확실
미래 향해 나가는 매일 겪는 고통
오래 전 읽은 책 중에 <파인애플 스토리>가 있다. 네덜란드령 뉴기니에서 선교사가 겪은 실화를 바탕으로 쓴 책이다.
그가 어느날 원주민을 고용하여 파인애플 100그루를 심었다. 3년이 지난 후, 열매를 따려고 밭에 갔는데, 아무 열매도 없었다. 원주민들이 훔쳐갔기 때문이다.
왜 그랬느냐고 묻자 원주민들은 자기들의 문화는 자기들이 심은 것을 자기들이 먹는 것이라 대답했다. 황당했지만 선교사는 3년을 더 기다렸다. 그리고 다시 열매를 따려고 밭에 갔는데, 이번에도 열매가 없었다.
참다 못한 선교사는 밭에 무서운 개를 풀어 놓았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경고의 표시로 운영하는 병원 문도 닫아 버렸다. 그런데도 그들의 나쁜 버릇은 고쳐지지 않았다.
고민하던 어느 날 사람들이 떠난 텅빈 마당에서, 선교사는 문득 밭의 주인은 자신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리고 주인이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드리기로 결심했다. 그러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원주민들은 선교사를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 믿기 시작했고, 파인애플이 하나님의 것이라 훔치는 일도 없어졌다.
이것이 이야기의 내용이다. 하나님의 소유권에 대한 이보다 좋은 이야기는 없다. 나도 여러 번 이 이야기를 설교 예화에 사용하곤 했다. 그러나 선교 현장에서 이 이야기를 다시 읽을 때, 이야기의 실제와 메시지 사이에 많은 괴리가 있음을 알았다.
이야기의 분위기는 대체로 비슷하지만 동기와 이유는 생각보다 달랐고, 해법도 만만치 않음을 알았다.
몇 년 전 코로나가 끝나고 다시 학교 문을 열었다. 학교 문이 닫힌 지 꼭 1년 만이었다. 많은 기대를 가지고 도착했는데, 도착하자마자 들은 소식은 기숙사 매트리스가 많이 없어졌다는 것이었다.
나는 학생들을 위해 스무 개의 이층 침대를 맞추고 매트리스도 새로 구입해 모기장과 함께 기숙사에 들여 놓았었다. 사무원의 이야기를 듣고 기숙사를 살폈는데, 침대마다 모기장도 없어지고 매트리스도 일곱 개나 없어져 있었다.
돌아와서 도서관도 살폈는데, 왠지 책장이 휑한 것 같았다. 캄팔라 헌책방을 뒤적여 300여 권의 신학서적을 사서 작은 도서관을 만들었는데, 누군가 책을 훔쳐간 것이 분명했다. 서가에 꽂아놓은 내 책도 없었다. 이어 컴퓨터를 점검했는데, 두 대가 고장나 있었다. 누군가 손을 댄 것이 분명했다.
며칠 후 남수단에서 선교하는 후배 선교사가 잠시 우간다에 내려왔다. 그는 10년 이상 수단 내전 때부터 전쟁과 피난, 가난, 질병의 위험 속에서 남수단을 지켜온 기독교의 이태석과 같은 선교사다. 그런 그가 길게 한숨을 쉬면서 하는 말은 그동안 그를 짓누른 가장 큰 고통이 사람, 특히 그의 제자들로부터 당한 배신의 고통이라고 했다.
그중 아들처럼 사랑으로 키운 제자가 있었다고 한다. 너무 기대하고 사랑하여 영성훈련 센터로 보내 1년 이상 성경과 기도로 훈련받게 했고 이제는 됐다 싶어 케냐 모 신학교로 유학을 보내려고 경비를 마련했다. 그리고 그것을 그에게 쥐어 주면서 잘가라고 기도했는데, 얼마후 들린 소문은 그가 그 돈을 어떤 여자와 함께 튀었다는 것이다.
너무 충격은 받은 부부는 인간에 대한 심각한 회의와 선교에 대한 절망으로 우울증까지 앓았다는 것이다. 과연 하나님은 살아계시는가? 내가 과연 이런 선교를 계속 해야 하는가? 그는 묻고 또 물었다고 한다.
정글보다 깊은 인간 죄성 참아야
선교, 본질적 싸움 견디지 못하면
하루아침의 아름다운 환상일 뿐
한 순간 영광 기다리는 산고 시간
문제는 선교지의 이러한 모습이 ‘파인애플 이야기’처럼 문화 때문은 아니라는 점이다. 선교사가 모범을 보이지 않아서 그런 것도 아니다. 선교 현장의 문제는 ‘파인애플 이야기’보다 훨씬 복잡하고 신학적이다. 그것이 차라리 문화의 문제라면 배우거나 기다리거나 체념하면 되지만, 그 뿌리가 인간의 깊은 죄의 본성에 나오기 때문에 쉽지 않다.
어떤 선교사는 자신이 가르친 학생에게 고소를 당하고, 어떤 선교사는 자기 집에서 일하던 일꾼에 의해 집안이 털리고, 어떤 선교사는 장학금 한 번 안준다고 몇 년을 가르친 학생들이 인사도 없이 우르르 떠나는 것을 맥없이 바라 보아야 한다.
‘파인애플 이야기’에서는 선교사가 파인애플 밭을 하나님께 드리자 다음과 같이 반응이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그 파인애플 밭이 하나님의 것이라면 더 이상 훔치지 말아야겠어요.” 그들은 하나님을 정말로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몇 년 동안 이곳 원주민들은 나를 지켜봐 왔고 내가 하는 말을 들어 왔다. 그동안 그들은 나의 행동과 말이 일치하지 않음을 보았다. 그러나 내가 변화되었을 때, 그들도 변했다. 오래지 않아 많은 원주민들은 자진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아, 정말 선교 현장이 이렇게 변한다만 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선교 현장은 만만치 않고, 선교의 현실은 ‘파인애플 이야기’와 다르다. 선교는 낭만이 아니고 현실이며, 장밋빛 드림(dream)이 아니라 매일 당하는 죽음의 현실이다. 선교는 절망의 광야를 현실로 딛고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나가는 매일 겪는 고통의 현실이다.
누구나 한순간의 결단과 호기로 아프리카로 가는 설레이는 비행기를 탈 수 있으나, 아프리카에 도착하면 정글보다 깊은 인간의 죄성이 기다린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길고 긴 본질적 싸움에서 견디지 못하면, 선교는 하루아침의 아름다운 환상이 된다. 선교는 비전으로 포장된 호기도 낙관도 아닌, 언제 올지 모르는 한순간의 영광을 기다리는 길고 긴 산고의 시간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그래서 나는 학생들에게 몇 가지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3회 이상 결석하고 남의 물건이나 이성과 성적 이탈을 할 때는 퇴학시키는 것이 그 중 하나였다. 그런데 한 학생이 연속 2주를 결석했다. 사람을 보내도 나오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학교에서 몇 가지가 분실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여러 정황으로 볼 때 그가 일을 저지르고 학교를 안나오는 것이 분명했다. 3주째 또 사람을 보냈지만 학교에 나오지 않았고, 나는 그를 규칙에 따라 퇴학시켰다.
그후 코로나가 시작되자 학생들을 가르칠 다른 방법이 없어, 내가 쓰고 있는 글을 번역해 학생들에게 보내기 시작했다. 모두 35주를 보냈다. 퇴학한 학생에게도 매주 안부와 함께 빠짐없이 글을 보냈다. 그런데 얼마 후 사무원이 나에게 편지를 내밀었다. 겉봉을 뜯어보니 퇴학당한 학생의 편지였다. 내용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닥터, 그동안 많이 자책하고 많이 회개했습니다. 저의 잘못을 깨닫는 데 코로나는 크게 유익을 주었습니다. 이제라도 저의 잘못을 용서해주시면 다시 공부를 시작하고 싶습니다. 부디 허락해 주십시오.”
비록 죄를 짓고 학교를 떠났지만, 매주 그에게 보내진 편지를 통해 하나님은 그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의 잘못으로 어쩔 수 없는 벌을 받았지만(그래서 벌이 필요하지만), 벌이 사람을 바꾸지는 않았다. 나는 그의 편지를 받고 내가 그에게 내린 처벌이 정말 그를 회개로 이끌었는지 물었다. 그가 나에게 용서를 구한 것이 정말 하나님께 돌아온 회심이었일까도 물었다.
다만 ‘회심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됨의 긴 과정(루이스 람보)’이라면, 그의 오늘의 돌아옴이 하나님께 돌아가는 긴 괴정의 시작이 되기를 기도했다. 그리고 앞으로 그가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해도 나는 놀라지 않을 결심을 해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그렇다. 우리가 목회하고 선교하는 이유는, 우리가 잘한 만큼 사람들도 잘하고 우리가 변한 만큼 사람들도 변하기 때문이 아니다. 현실은 그 보다 훨씬 깊고 심각하다. 선교지의 문제는 단순한 관습과 문화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다만 문화속으로 들어가고 문화를 이해하고 문화와 공존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선교학자 Hirsh의 표현한대로 ‘Beyond-in the midst(초월적 성육신)’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다. 선교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지만(In the midst), 또한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Beyond).
선교의 문제는 그들과 함께 사는 것과 함께, 그들이 다르게 살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선교의 본질이 죄로 인해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 본성에서 오기 때문이다.
선교의 현장은 곧 신학의 문제요
선교의 현실은 곧 로마서의 문제
언제나 속을 결심, 버림받을 각오,
배신당할 다짐을… 다른 길 없어
선교의 현장은 곧 신학의 문제요, 선교의 현실은 곧 로마서의 문제다. 모든 인간은 죄를 범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잃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 돌아와야 한다. 이것이 개인적 회심 없이는 선교가 아니라는 에카르트 쉬나벨(Paul, the Missionary)의 강조점이다.
반면 선교사는 언제나 속을 결심, 언제나 버림받을 각오, 언제나 배신당할 다짐을 해야 한다. 장밋빛 낙관론으로 사람들을 구원의 언저리에 맴돌게 해서는 안 된다. 모든 사람은 회개하고, 사시고 참된 하나님께 돌아오게 해야 한다(살전 1:9). 다른 방법은 없다. 다른 길도 없다.
그래서 구약성경에 ‘돌아오라(슈브)’란 말이 수없이 반복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고심하다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가 목회하고 선교하는 단 한 가지 이유다.
작은 책 <파인애플 스토리>가 준 묵상에 감사하며, 오늘도 선교 현장에서 뿌리 깊은 죄 문제로 허덕이는 영혼들로 인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날마다 죽임을 당하는 동역자들에게 사랑과 위로의 마음을 전한다.
이윤재 선교사
아프리카 우간다 쿠미대학 신학부 학장
분당 한신교회 전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