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성록, 한 점의 그림] 성탄절 특집
아기 예수님 탄생하는 순간 다룬
렘브란트 두 작품에서 보이는 것
그리스도의 탁월함, 곧 낮아지심
<목자들의 경배: 야경>에선 축사
<거룩한 가족>에서는 허름한 집
가장 연약한 모습으로 오신 그분
렘브란트는 예수 탄생의 순간을 <목자들의 경배: 야경>(1652)에 담아냈다. 이 작품은 <목자들에게 나타난 천사>(1640-1642)와 연결해서 보면 이해하기 쉽다.
천사들의 방문을 그린 <목자들에게 나타난 천사>는 한밤중에 하늘의 휘장이 열리면서 허다한 천군천사가 나타나 기쁜 소식을 전하는 동안, 이에 놀란 목동들과 양떼가 겁에 질려 있는 모습을 담고 있다.
그들은 얼마 후 천사들이 전하는 소식에 벅찬 가슴을 부여안고 들판을 가로질러 베들레헴까지 찾아왔다. <목자들의 경배: 야경>은 목자들이 예수와 대면하는 그 순간을 모티브로 한다.
아기 예수는 건초더미에 누워 있고 그 옆을 마리아와 요셉이 지키고 있으며, 목자 일행 중에서 한 사람은 모자를 벗고 정중하게 경의를 표한다. 수염 달린 남자 좌우에는 부인과 아들로 여겨지는 인물들이 있는데 이들이 가족임을 알 수 있다.
렘브란트가 동방박사 대신 목자 가족을 등장시킨 것은 겸손한 사람들에게 애정을 느꼈던 그의 시각을 알려준다. 아기 예수를 바라보는 어린아이와 어둠 속에 희미하게 비추는 아빠 송아지, 엄마 송아지, 새끼 송아지가 그날의 현장감을 전해주고 있다.
화면을 보면 낮은 채도로 인해 윤곽을 구분하기 힘들다. 이 작품은 그가 얼마나 빛과 명암에 탁월한 이해력을 지녔는지 보여준다. 구리판에 잉크를 입힐 때 특정 영역에 얇은 잉크를 남겨 어두운 톤을 남겼는가 하면, 아우라를 살리기 위해 기존의 종이 대신 오트밀 포장지나 극동의 종이, 심지어 양피지를 사용해 풍부한 톤을 자아냈다.
전기작가 F. 발디누치(F. Baldinucci)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가 창안한 것은… 다른 화가들이 사용해본 적도 없고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조차 없는 유일한 것이었다. 아무렇게나 휘갈긴 듯한 선과 변칙적인 선이 난무하고 윤곽조차 찾을 수 없는 에칭 판화지만, 전체적으로 뚜렷한 키아로스쿠로를 빚어내면서 마지막 선까지 정성스레 혼신의 열정을 쏟은 그림 같은 멋을 느끼게 해준다.”
화면은 성경에서 언급한 말구유 대신 축사를 배경으로 삼았지만, 종래 예수 탄생을 주제로 한 다른 그림과 확연히 차이가 난다. 중세 미술가들은 아기 예수가 탄생한 곳을 으리으리한 궁궐이거나 대저택으로 삼았고, 등장인물도 종교 엘리트들이나 고관대작들로 꾸며진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의 화가 렘브란트는 성경 기록대로 낮은 곳에 임하신 그리스도를 택했고, 이곳을 찾은 방문객도 목동들이나 아이들로 삼았다. 하늘에서 선포되는 모든 말을 두려움과 떨림으로 깊이 간직하는 마음을 지닌 자들이었다. 그림의 흑백 색조는 이런 사실의 배경음악으로 어울린다.
렘브란트는 예수님이 태어나신 지 얼마 후 장면을 <거룩한 가족>(1640년)에 담았다. 아기 예수에게 젖을 먹이는 어머니 마리아와 아버지 요셉을 각각 <거룩한 가족>에 담았는데, 한 점은 에칭으로 된 것으로 1633년 작이고, 다른 한 점은 유화로 된 작품으로 1640년에 제작되었다.
앞의 작품에서 요셉이 토라를 읽고 있는 데 반해, 나중의 것에서는 창가에서 목공 일에 열중하고 있다. 요셉이 토라를 읽고 있는 장면은 그를 경건한 유대인으로 인식했다는 표시이며, 유화에서 목공 일을 하는 동작으로 바꾼 것은 자녀 양육과 부모의 책임, 가장 역할을 중시한 당시 네덜란드 문화적 가치와도 부합한다.
<거룩한 가족>은 여느 가정과 다를 바 없이 친밀하고 가정적인 이미지를 선보인다. 이는 도상학적으로 세 인물, 즉 조모 안나, 어머니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한 화면에 배치하는 ‘안나 젤브릿트’(Anna selbdritt) 전통에 따른 것이다.
가톨릭교회가 조모 안나를 가장 인기 있는 성인 중 한 명으로 받아들인 이후 그 풍습은 미술가들에도 영향을 미쳐,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안나와 성모자>(1510)와 같은 작품을 탄생시켰다. 중세 교회 역시 이른바 무염시태(The Immaculate Conception)에 기초해 마리아를 도상에 도입하였지만, 이런 폐해를 문제 삼았던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는 그같은 설정이 필요하지 않았다.
렘브란트는 안나와 마리아를 성인이나 숭배대상으로 바라보기보다, 친밀하고 다정한 가족의 일원으로 묘출하였을 뿐이다. 그림을 보면 마리아는 여느 어머니들처럼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고, 조모 안나는 한손에 독서용 안경을 들고 구부정한 자세로 아기 예수를 사랑스럽게 지켜보고 있다.
구약성경을 읽다가 약속된 메시아를 바라보는 그녀의 동작은 구약과 신약 시대 사이 연결고리를 만들어준다. 즉 렘브란트는 안나를 미화하지 않고도 구약과 신약을 연관시켜 주는 주요 역할을 부여한 셈이다.
미술사학자 크리스티안 튐펠(Christian Tümpel)은 놀랍게도 그림 뒤편 요셉이 멍에를 제작하고 있으며, 이를 메시아의 오심을 예고한 이사야 9장과 연결시킨 바 있다.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추도다 주께서 이 나라를 번성케 하게 하시고 그들의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할 때의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앞에서 즐거워하오니 이는 그의 멍에와 그의 어깨의 지팡이와 그들의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 한 아이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음이니이다(사 9:1-6)”.
이사야서의 ‘멍에’, ‘지팡이’, ‘막대기’는 요셉이 제작중인 쟁기와 길고 구부러진 지팡이와 유사한데, 렘브란트는 요셉을 통해 구약의 예언이 성취됐음을 암시하고 있다.
무엇보다 렘브란트의 두 작품에서 보이는 것은 그리스도의 탁월함이 낮아지심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목자들의 경배: 야경>에서는 축사, <거룩한 가족>에서는 허름한 집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렘브란트는 이렇게 구세주의 처소를 표현함으로써, 가장 연약한 모습으로 오신 그분께 초점을 맞췄다.
서성록 명예교수(안동대 미술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