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성록, 한 점의 그림] 신년 특집
필립스 코닝크(Philips Konick)
‘길가에 농가가 있는 파노라마’
새해, 우주와 인생 통치하시는
창조주 송축하고 즐거워하기를
암스테르담 레익스 뮤지엄을 방문할 계획이 있는 분이라면, 렘브란트의 <야경>, <유대인 부부>와 함께 꼭 보아야 할 작품이 있다. 렘브란트의 제자이면서 풍경화로 이름을 떨친 필립스 코닝크(Philips Konick, 1619-1688)의 ‘길가에 농가가 있는 파노라마(1655)’를 추천하고 싶다.
이 그림은 드넓은 시골 위로 광활한 창공이 전개되는 비교적 단순한 구도를 취하고 있다. 이와 같은 구도와 미묘한 그라데이션은 스승인 렘브란트에게서도 잘 발견되지 않는 부분이다.
비슷한 화풍의 그림을 보려면 17세기 초 네덜란드에서 독창적인 풍경화를 발표한 헤라클레스 세헤르스(Hercules Segers, 1589년경-1638년경)의 초기 그림이나 야곱 루이스달(Jacob Ruisdael)의 풍경화를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코닝크의 이 풍경화는 헬더란트(Gelderland) 지방의 지형과 유사하지만,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이때의 화가들은 자연을 실재 그대로 그리기도 했지만, 자신의 상상력을 가미하여 재구성하였기 때문이다.
화가였던 그의 아우 야곱과 함께 로테르담을 떠나 1640년경 암스테르담에 정착했을 때, 코닝크는 렘브란트 스튜디오에 들어가 기량을 닦았다.
그는 1647년부터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했으며, 1654년에서 1665년 사이에 가장 뛰어난 풍경화를 제작했는ㄷ네, 화면을 하늘과 땅으로 나누고 원경에서 부감의 시점으로 바라보았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그가 미술사에서 재능 있는 화가로 불리는 것은 그만의 개인 스타일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화면을 보면 모래언덕 맞은편에 시골집이 평화롭게 들어서 있고, 사람들이 모여 사는 중경의 도시와 멀리 떨어져 있는 산위에는 밝은 조명이 드리워 있다. 지평선은 직선으로 구분되기보다, 공기로 자연스럽게 통합되어 있다.
구불구불 흘러가는 강은 나무들과 건물들에 얽혀 눈에 보이다가 다시 나타나기도 한다. 화면 전경 왼쪽으로 세 채의 농가를 끼고 있는 시골길은 오른쪽으로 휘어졌다가 다시 왼쪽으로 돌아서, 나무들 사이로 사라진다. 그 길은 다리를 지나 도심으로 통하는 길로 파악된다.
저지대로 이루어진 네덜란드는 많은 지역이 바닷물로 인해 수몰 위협을 받았기 때문에 방조제를 건설하고 간척지를 개간하였다. 몇 차례 대홍수로 막심한 피해를 입은 후, 주민들은 1500년 이후 둑을 쌓고 배수시스템을 갖춘 형태의 간척 개발을 본격화하였다.
바닷물과 접하는 부분은 방조제를 쌓아 오늘날 국토 형태를 이루게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네덜란드인들의 국토 사랑이 얼마나 각별한지 생각해볼 수 있다. 이런 환경적 특성은 그들이 땅의 소중함을 갖게 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그의 풍경화를 충분히 설명하였다고 보기 어렵다. 이렇게 과감한 구도를 취한 풍경화가는 서양미술사에서도 흔치 않은데, 이렇게 하늘을 크게 강조한 것은 화가가 살던 시대 분위기와 결부돼 있다.
당시에는 자연을 기독교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사람들 사이에 팽배해 있었다. 풍경화가들과 가깝게 지냈던 헤라두스 V. 보시우스(Gerardus J. Vossius)는 창조물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깨닫는다면 그속에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전능하심과 지혜’를 엿볼 수 있으며, 그런 기초 위에서만 그분을 사랑하고 존경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즉 보시우스는 자연계시를 일종의 준비 과정, 즉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계시의 서곡으로 여겼다.
“인간은 두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교육받는다. … 첫 번째는 피조물을 관찰함으로써 발생한다. … 세상이 하나의 큰 책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세워지나니 만물이 어찌 그리 아름답게 정렬되었단 말인가.”
칼뱅도 시편 19편을 해석하면서 “하늘의 광채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렇듯 코닝크 시대에는 자연을 하나님의 계시로 보는 시각이 확산돼 있었으며, 이는 보시우스가 자신의 논지를 펼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동시대의 유스트 반 덴 본델(Joost van den Vondel)은 우리가 우주의 창조주이자 보존자이신 그분의 존재를 경험할 수 있지만 정작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보는 것은 불가능하며, 이것을 이해하려면 우리의 이성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특별히 이 목적을 위해 우리에게 주신 감각, 특히 ‘시력’에도 의존해야 한다고 하였다.
결국 세상을 면밀히 관찰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세상이 결코 저절로 생성될 수도, 단지 우연히 생겨날 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논리이다. 코닝크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긴밀한 교유관계를 나누었던 두 사람은 이런 부분에 대하여 교감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코닝크가 본 자연은 그저 아름답고 숭고한 대상만은 아니었다. 코닝크에게 하늘과 풍경은 신성의 계시로서 일종의 메타포로 인식되었다. 대지 위의 하늘은 높고 심원하다.
보는 것에 익숙해진 우리는 하늘이 주는 경이감에 별 반응을 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코닝크는 하늘을 보며 창조주이신 그 분의 위엄을 숙고하였던 것 같다. 그림을 통하여 흡사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고 말하는 것같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본 우리는 종종 경이와 전율에 휩싸이지만, 하나님께서 창조세계 위에 또한 그 너머에 존재하신다는 것을 헤아린다면,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실감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분의 창조물을 보면서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위엄이 가장 자애로운 구주이신 그분에게서 나온다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아이작 왓츠(Issac Watts)는 “영원한 능력, 그 분의 높은 보좌”에서 그 감정을 표현했다. “당신은 하늘에 계시며, 우리는 이 낮은 곳에 있습니다./ … / 신성한 경외심이 우리의 노래를 막아서고 / 당신을 향한 찬미는 혀끝에 조용히 머무릅니다.”
자연에 감추어진 존재를 보았을 때 아이작 왓츠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그는 노래를 부를 수조차 없었다. 신성한 경외심에 사로잡혔을 때, 우리는 그와 같은 감정을 공유하게 될 것이다.
새해에는 필립스 코닝크의 풍경화가 주는 울림처럼, 우주와 인생을 통치하시는 창조주의 전능하심과 선하심을 묵상하면서 그분을 송축하고 즐거워하는 값진 시간으로 채워지기를 소망한다.
서성록 명예교수
안동대 미술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