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성록, 한 점의 그림] 유우선의 <빛>, 상한 세상에 빛을 드리우다
일상 이미지, 기독교 관점 조망해
취향, 주관보다 성경 정신에 충실
소망 없는 인간, 구원하는 메시아
깨어짐, 창조 질서대로 회복 필요
흑백 사진은 흘러간 기억과 시간을 반추하는 데 제격이다. 오래된 사진앨범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처럼 미루나무나 동네 뒷동산에서 뛰놀던 시절이나 시골 학교의 풍금 소리, 동네 개울에서 놀이를 하거나 헤엄치던 기억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유우선의 작품은 흘러간 과거보다는 현재에 맞춰져 있다. 그가 흑백 톤을 고수하는 것은 인간 존재의 근원적 통찰에 유의하면서 그 밖의 것들에 시선이 흩트려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유우선은 일상에서 채집된 이미지를 기독교적 관점에서 조망한다. 그의 작품 모티브는 가족에서부터 숲, 정원과 같은 자연, 그리고 거리의 표정까지 폭이 넓은 편이다. 무엇을 제작하든 작가는 자신의 취향, 주관에 의존하기보다는 성경의 정신에 충실한 태도를 취한다.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는 빠른 속도로 달리는 자동차와 고요한 하늘을 대비함으로써 현대인의 분주함을 보여주고, <모든 날을 그림자같이 보내는 일평생에>에서는 영화로웠던 시절은 가고 초라한 이파리의 모습으로 촌음같이 흘러간 인생을 돌아보며, <이지러진 것을 셀 수 없도다>는 기울어진 가로등을 난간에 간신히 붙들어맨 이미지를 통해 망실된 인간상을 표현하고 있다.
그중에서 근작 <빛>은 흑백 톤이 더욱 두드러진 작품이다. 이 작품을 보았을 때 대단히 표현주의적이며 강렬하다는 인상을 준다. 농담 효과가 뚜렷하고 색 대비도 그에 못지않다. 이 작품은 추상화 같지만, 엄연히 구체적인 물상(物像)을 모티브로 한 것이다.
작품의 해석은 대략 세 가지로 나누어질 수 있다. 첫째는 사실 중심의 중립적 입장, 둘째와 셋째는 알레고리적 개념틀을 가지고 보는 것이다. 사실 중심의 중립적 입장은 작가의 주관을 배제하고 사물 그 자체에 집중하여 관찰하는 것인데, 이런 태도는 사실주의나 극사실주의 화가들에서 자주 목격된다. 그러나 이 작품은 광선이 유리에 부딪혔을 때의 물리적 현상을 염두에 두고 제작한 것 같지는 않다.
둘째와 셋째는 알레고리적 개념 틀을 갖고 보는 것인데, 이것은 유구한 도상적 전통을 가진 것이다. 예를 들어 백합의 이미지를 등장시켰다면 ‘순결’을, 촛불이나 책을 등장시켰다면 ‘인생의 유한함’을, 시든 꽃은 ‘육체의 연약함’이나 ‘죽음’을 각각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둘째는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 오르신 그리스도의 낮아지심, 셋째는 길을 잃고 방황하는 죄인들을 찾아오신 그분의 사랑과 각각 연관해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사물을 볼 때 그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예술가에게 2차적 문제이다. 이면의 기의가 표면의 기표보다 더 중요한 셈인데, 작가가 어떤 사물을 선택했을 때는 사물을 통해 무언가를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강하다.
<빛>의 경우 다른 주변 사물들은 일체 찾아볼 수 없다. 화면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유리와 빛뿐이다. 그런데 유리가 깨지고 빛이 내리쬐이고 있다는 것은 무언가 진지한 것을 말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약간 상상력을 발휘해서 본다면, 그것은 육체가 상하고 찢겨 십자가에 달리신 수난의 그리스도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할 것이다. 우리의 허물 때문에 ‘찔리시고, 모욕당하시고, 피 흘리신’ 상흔(傷痕) 말이다.
한 마디로 그의 작품은 소망 없는 인간을 구원하시는 메시아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 바로 <빛>이다. 도탄에 빠진 영혼들을 가엾게 여기시고 그들을 온전케 하고 그들에게 생명과 영원한 삶을 가져다 주신 분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작가가 흑백을 고수하는 것은 인간 존재의 근원적 통찰에 중점을 두기 위해서라고 말한 것처럼, 빛은 ‘깨어진 유리’에 집중된다. 온전해야할 유리가 산산조각 나버려, 고장난 시계처럼 전혀 쓸모 없게 되어 버렸다.
깨어짐은 빛의 조명으로 인해 명확하게 노출되고, 그 깨어짐의 상처를 여과 없이 보여준다. 깨어진 유리를 인간에 견준다면, 아마도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으리라 짐작해볼 수 있다.
이 작품에서 눈에 띄는 것은 빛의 존재이다. 그 빛이 상처를 드러내기 위해 등장한 것 같지는 않다. 강렬한 빛은 유리의 틈새를 이어주며 원래 상태로 되돌려 보내는 역할을 한다.
왜 빛이 이 음산한 곳까지 찾아왔을까? 빛은 어둠과 함수관계에 있다. 즉 빛이 존재하는 것은 어둠에게 새 생명을 주기 위해서이다. 이런 맥락에서 빛의 방문은 고아와 과부, 병든 자와 가난한 자와 같이 고초를 겪는 사람들을 찾아오신 예수님의 긍휼하심을 떠올리게 한다.
그의 작품에서 빛은 일찍이 노이만(Neumann)이 기술한 대로 “하나님의 현존을 알리는 사자(使者)”를 의미한다는 표현이 어울릴 것이다. 깨어진 유리는 더 이상 인생에 구멍이 뚫리는 경험처럼 어둠 속에 갇혀 좌절과 절망의 시간을 갖지 않아도 된다. 예수님만이 인생에 영속성과 가치를 부여해 주는 근거이자 튼튼한 밧줄임을 보여준다.
한편 깨어진 유리와 빛에서 우리는 문화의 변혁자로서의 그리스도를 읽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사회와 문화, 예술 등 모든 방면에 있어 우리의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만일 신적 규범의 범위 바깥에 있는 것, 곧 깨어짐이 우리의 문화적 현실이라면 그 분은 이 깨어짐이 결코 정상적인 것이 아니며 그 분의 창조 질서대로 회복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주지시킨다.
이런 의미에서 작가는 예술의 영역에서 복음이 함축하는 바를 추구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 광명한 빛이 지닌 압도적인 힘을 그만치 확실히 인식하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서성록 명예교수
안동대 미술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