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답지 않아 다투는 우리> 홍동우 목사 (下)
전편에서 홍동우 목사가 언급한 유진 피터슨의 책 <다윗,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 속 말은 이것이다. “새로운 지역으로 이사를 갈 때면 나는 늘 가까운 교회를 찾아가서 그곳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에 합류하여 더불어 일하고 예배했다. 이내 실망을 느끼지 않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들은 철두철미하게 성경이 말하는 그대로였다. 소곤대는 자, 불평하는 자, 신의 없는 자, 변덕스러운 자, 의심 많은 자, 죄에 찌든 자, 따분한 도덕주의자, 홀리는 세속주의자 등….”
“… 그러다가 어느 순간 어디선가 갑자기 한 줄기 빛나는 아름다움이 그들 위에 비칠 때면, 나는 그 동안 죄로 어두워진 내 눈이 보지 못했던 것들을 비로소 볼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만드시고 성령님이 창조하신 삶들, 곧 희생적인 겸손, 믿을 수 없는 용기, 영웅적 미덕, 거룩한 찬양, 고난 중의 기쁨, 끊임없는 기도, 끝까지 견디는 인내의 삶들을 말이다. 나는 그들에게서 다름아닌 ‘그리스도’를 본다.”
저자가 쓴 책의 시작과 마지막 고백도 다르다. “교회가 참 좋았습니다. 한때는 말입니다.”→ “이제 저는 교회를 사랑합니다. 그러니 교회를 함께 세워가겠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한다. “교회 내의 크고 작은 다툼 속에서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교회를 바꿔야만 한다고 외쳤던 제가 교회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다음은 홍동우 목사의 남은 이야기.
방황하는 청년들에 조언하는 어른
교회서 청년기 안 겪어 이해 못해
할머니 권사님·집사님 만날 필요도
위로만 들었다고 고비 잘 넘을까?
-독자들은 책에 나오는 세 인물 중 첫 번째 김호준 청년에게 가장 많이 감정이입이 되는 것 같습니다. 교회 어른들은 청년들이 김호준처럼 될까 봐 많이들 염려하시는데요.
“김호준 청년 이야기는 욥의 관점에서 서술하다가도, 세 친구의 관점에서 서술했습니다. 세 친구가 잘못했다기보다는 욥이 그들을 자극한 것일 수 있다고 쓴 이유는, 그때 나를 힘들게 했던 분들의 말도 다 의미가 있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결국 과거 사건들의 의미는 미래가 만들어 가는 것이니까요.
우리가 신앙적으로 방황할 때, 위로해 주는 사람들만 있었다 해서 고비를 잘 넘어갔을까요? 아닐 수 있겠죠.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청년 시기의 신앙적 갈등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른들이 주로 그들에게 발언을 하시는 이유는, 그들 대부분이 청소년이나 청년기를 교회에서 겪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청소년이나 청년 사역에 관심이 많은 분들은 대부분 그 시기를 겪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이해를 못하시는 거죠. 청년들이 방황할 때 태클을 거는 사람도 있지만, 이해하는 사람도 있어요. 하지만 이해하는 사람들은 침묵하죠(웃음). 청년 입장에선 자기 사정을 알 만한 사람들은 침묵하고, 이해 못하는 사람들은 지적하니까 교회 어른은 다 꼰대처럼 느껴지겠죠.
그래서 저는 교회 청년들이 할머니 권사님, 집사님들과 만나게 하면 위로도 얻고 좋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여러 기획들을 해보다가, 실현은 못했습니다.”
-세 번째 챕터의 현지우 권사님 같은 분들이요?
“그렇죠. 우리가 교회라고 하면 큰 틀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내가 만난 사람들이 교회의 전부입니다. 청년이나 청소년일수록 그 내가 만난 사람들이 협소하고, 주로 만나는 사람들은 한정돼 있습니다.
청년이나 청소년 시기에 그런 분들과 주로 만나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전형적이지 않은 사람들이 등장해서 ‘저 사람의 신앙도 저럴 수 있다’고 보여주면 해방감이 좀 생길 수 있고, ‘교회에 이런 분들도 있구나’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저도 교회 생활을 하면서 ‘교회에 이런 분들도 있구나’ 하는 생각들을 한 적이 많거든요.”
자신의 신앙 세계 무너지는 경험
긍정적으로 개념화시켜주고 싶어
신앙, 학습으로 형성 안 되는 신비
김호준 청년, 괜찮다고 위로하고파
-김호준 청년 편에서 언급하셨던 ‘신앙의 재구성’에 관한 간단한 설명과 추천도서가 있다면.
“한 인간이 겪는 신앙의 여정은 복잡다단합니다. 개념화하기 무척 어려운 영역 같아요. 100명의 신앙인이 있다면, 나와 비슷한 여정을 걷는 사람이 기껏 10명이나 될까요?
다만 분명한 것은 한 개인의 ‘신앙 세계’가 무너지는 경험만큼은 많은 신앙인들이 함께 겪는 것 같아요. 물론 각자의 파고는 좀 다르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많은 독자분들이 김호준 청년의 이야기에 많이 공감하신 것 같습니다.
제 전략 중 하나는 ‘신앙 세계’가 무너지는 경험 자체를 다소 긍정적으로 개념화시켜주고 싶었어요. ‘무너진 것 같지만 오히려 좋을 수 있어!’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싶었어요. 사실 기독교 메시지의 저력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아요. 고난 속에서도 기뻐하고, 슬픔 속에서도 소망을 발견하는….
그래서 저는 그 과정을 ‘신앙의 재구성(contextualization)’이라고 개념화시켰습니다. 특별히 선교적 용어인 상황화(contextualization) 개념을 끌어왔어요. 아프리카에 가면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동구권에 가면 동구권 사람들에게 문화적으로 기독교를 번역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 평범한 삶에도 충분히 기독교 언어가 (우리의 삶에 걸맞게) 번역되는 과정이 필요하고, ‘신앙 세계가 무너지는 경험’은 사실상 상황화 혹은 재구성을 통해 ‘신앙 세계가 새롭게 구축되는 경험’ 혹은 ‘나에게 와닿지 않는 신앙언어가 내 삶에 걸맞게 번역되는 과정’이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신앙은 학습으로 형성될 수 없는 신비의 영역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칭의, 중생, 성화 혹은 십자가, 부활, 영생 같은 신학적 개념을 책상머리에 앉아 공부하고, 암기하고, 이해한다 해도, 이러한 ‘학습’을 두고 ‘신앙’이라 말하지는 않거든요. 오히려 신앙은 내가 어설프게 들어왔던 개념어와 내 삶에서 겪었던 사건들이 창조적으로 만나면서 일어나는 화학적 반응에 가까운 것 같아요.
앞서 말한 개념을 끌고 온다면 ‘번역’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고, ‘재구성’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지요. 즉 어느 순간까지 중생은 중생이고, 십자가는 십자가라고 개념 정도만 이해하고 넘어가 버렸는데, 특정 시점에 나의 세계가 무너지고, 새롭게 개념어들이 번역되기 시작하고, 그 과정에서 내가 가져왔던 신앙들이 새롭게 재구성되면서, 기존의 개념어가 새로운 생명을 덧입습니다.
이는 무척 놀랍고 신비한 과정인 동시에, 사실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모든 믿음의 동역자들이 겪어왔고, 겪고 있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저는 이를 통해 신앙의 재구성을 겪고 있는 김호준 청년을 위로하고 싶었어요. 괜찮다고 말입니다. 당신만 그렇게 호되게 겪는 것도 아니고, 당신이 어떤 문제가 있어 그런 것도 아니라고.
그런 의미에서 ‘신앙의 재구성’에 도움이 될 만한 도서는 크게 두 부류가 있는 것 같아요. 한편으로는 ‘괜찮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책입니다. 박영선 목사님의 <하나님의 열심> 혹은 대담집인 <시간 속에 일하시는 하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괜찮다, 다 겪는 일이다’는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재구성을 겪고 있다면 한 번쯤 읽어볼만한 책입니다.
또 다른 부류의 책은 실제 신앙의 재구성을 크게 겪은 사람들의 흔적이 담긴 책입니다. 이서 매컬리의 <진리는 나의 집에 있었다>는 작품이 매우 독특합니다. 흑인 신약학자가, 흑인 교회에서 신앙을 배웠지만, 자신의 지성적 면모와 흑인 교회의 신앙 사이에서 괴리를 느낍니다.
그래서 백인들의 리버럴한 그룹과 복음주의 그룹에도 있어보고, 흑인들의 급진적인 그룹에도 있어보고, 여기저기 방황한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최전선의 신학자 또한 자신의 신앙을 해석하기 위해 무수한 방황을 겪었고, 그 과정에서 신앙과 신학을 재구성한 증언이 담긴 책을 통해 위로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갈등 설득 유일한 방법, 성경으로
성도들 질문, 결국 신정론이 기반
결혼과 장례, 교회 계속 다닐 이유
교회라는 이름으로 사람 묶어두셔
-보통 갈등 문제에 대한 책이나 세미나에서 보통 ‘말씀에서 답을 찾으라’는 말을 하지만 결국 갈등 그 자체와 해결에 집중하는데, 목사님은 진짜 성경에서 답을 찾으려는 시도를 하셨네요.
“어떻게 보면 너무 간단합니다. 교회가 어떤 문제를 겪을 때, 여러 고민들을 하겠죠. 그런데 교인들을 설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결국 성경을 통해 이야기하는 길뿐입니다. 어떤 신학자, 인문학자의 말을 인용하면, ‘그건 그들이나 네 생각이지’라고 하겠죠. 성경에 기초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기도 합니다.
두 번째는 저의 질문이기도 하지만, 모든 설교의 기저에는 결국 일종의 신정론이 기반돼 있다고 봅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하나님이 선하시고 전능하시다면, 왜 이런 사건이 일어나야 하는가?’ 라는 질문이 중심이 됩니다.
교회 갈등이 생길 때 던진 질문도 이것이죠. ‘하나님이 우리 교회 주인이시라는데, 왜 이런 사건이 우리 가운데 일어났을까요?’ 이 질문을 성경으로 나름의 답을 찾으려 했죠. 청중들에게도 같은 질문이 있었기에 의미가 있었으리라 봅니다. 다들 서로 싸우면서도, 내면 깊은 곳에는 그런 질문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교회의 주인이신데, 왜 내가 A장로님과 싸워야 할까?’ 하는 질문이요. 이러한 질문을 갖고 회중들을 설득하다 보면, 결국 성경에서 답을 찾으려 할 수밖에 없습니다.
갈등과 문제가 있는 개인이든 공동체든, 항상 고민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인가? 우리가 교회인가?’ 그런데 성경을 보면, 로마서든 갈라디아서든 고린도전후서든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대단한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그들과 우리의 고민이 같다는 데서 위로를 받았고, 그것이 또한 답이 될 것입니다.”
-갈등과 다툼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성도가 되는 대신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해야 할 이유가 있다면.
“현실적 이유로는 결혼식과 장례식이 있습니다. 현실적인 이유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굉장히 큰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결혼이든 죽음이든 자녀 탄생이든, 여러 국면에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기관이 결국 교회뿐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가 교회를 좀 가볍게 다닐 필요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바른 신학과 신앙, 사회 봉사와 실천, 목회자의 청렴도 등 너무 과한 이념을 투사해서 그런 교회에 소속된 구성원이 되는 걸 중요시하다 보니 그런 교회를 찾다가 실망하고 결국 교회 다니길 포기하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냥 내가 죽으면 장례 집례해 주고, 결혼할 때 와서 축하해 주고, 아이가 태어나면 유아세례를 해주는 교회, 함께 축하해 주고 함께 울어주고 곁에서 대화를 나눌 사람들이 있는 곳 말입니다. 또 그렇게 가볍게 생각하면, 교회 내에 다툼이나 개인적 문제로 신앙적 어려움 생길 때는 잠깐 안 나가도 되고요.
그렇게 가볍게 교회 생활을 하다 보면, 오히려 교회가 좀 의미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너무 무겁고 진지하게 생각하다 보니 교회가 오히려 의미를 상실하고 있는 부분이 있는 건 아닐까요?
신앙적 대화를 주고받을 이웃들은 필요한 것이고, 생애 주기별로 중요한 사건이 있을 때마다 신학적 의미를 불어넣어줄 목회자나, 같이 기뻐하고 울어줄 사람은 언제나 필요한 것 같아요. 그들이 내 처지를 100% 이해하고 말고를 떠나서, 사람이나 이웃으로서의 교회는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할 것입니다. 조직으로서의 교회에 대한 기대를 조금 빼고, 사람으로서의 교회에 조금 희망을 걸면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할 교회를 잘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끝으로, 목사님에게 교회란 무엇인가요.
“제게 교회는 ‘운명’입니다. 운명이란 단어가 매우 거창한 것 같은데요. 보통 사람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결국에는 순응해야 하는 것에 대해 ‘운명’이라는 표현을 쓰잖아요? 저에게는 교회가 꼭 그렇습니다. 아니,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는 교회가 꼭 그런 것 같아요.
박영선 목사님께서 <교회>라는 설교집에서 비슷한 내용을 말씀하셨어요. 하나님께서 교회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묶어두셨다고요. 저는 여기서 좀 더 확장시키면, 바울의 언어를 빌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남성과 여성을, 종과 자유인을, 교회라는 이름으로 묶어두셨습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정치적으로 보수 정당 지지자와 진보 정당 지지자를, 연령으로 말하자면 피끓는 30대와 죽음을 준비하는 80대를, 또한 세상에서 성공하고 돈을 맘껏 사용할 수 있는 유력한 사람들과 세상에서 여전히 성공하지 못하고 자격지심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교회’라는 이름으로 묶어두셨어요.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각 지역교회는, 지역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운명’입니다. 아무리 꼴 보기 싫어도 교회에 속해 있는 한 서로 봐야 하거든요.
누구나 목회자라면 그런 꿈을 꿀 겁니다. ‘좋은 사람’만 박박 긁어모아 ‘좋은 교회’를 만드는 꿈이요. 지적인 사람들만 모은다거나, 기도하는 사람들만 모은다거나, 아니면 중산층만 모은다거나. 저도 그런 꿈을 꾸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서, ‘운명’적인 교회의 모습을 보게 하셨어요. 교회가 아니라면 만나지 못할 할아버지들, 할머니들의 이야기, 누구보다도 성공해 봤기에 삶을 대하는 태도가 여유로운 사업가의 이야기, 삶 자체가 고통이라 할 수 있지만 여전히 신앙을 붙잡으며 살아온 한 집사님의 이야기 등등.
저는 차근차근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교회’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사람들을 묶어내신 하나님의 신비를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즉 하나님은 그들의 다양한 모습을 통해, 하나님은 생각보다 크신 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주셨어요.
또한 하나님은 그들의 부족하고 연약한 모습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은혜’로 구원하시는 분이심을 알게 하셨어요.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부족하고 연약했던 그들의 신앙적이고도 아름다운 모습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 가운데서 ‘선’을 만들어내는 분이심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제가 하나님과, 성경과, 신앙과, 인생을 배우는 ‘배움의 장소’입니다. 운명적으로 묶어두신 사람들 덕택에, 그리고 그 사람들 가운데 깃든 하나님의 신비 덕택에, 저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어요.
그래서일까요? 저는 목사가 성도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영역이 생각보다 매우 협소하다고 생각합니다. 생각보다 가르칠 수 있는 것들이 많지 않은 것 같아요. 하지만 저는 교회라는 존재 자체가, 물론 세월이 많이 걸리겠지만, 성도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것들이 생각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꼴보기 싫은 저 사람과 함께 다니는 교회, 내가 사회에서라면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을 법한 저 사람과 함께 다니는 교회, 그 교회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르치시는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운명적인 배움의 장소가 아닐까 싶습니다.”
-앞으로 ‘성경 공부방(?)’을 여신다고 들었습니다.
“앞서 교회가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운명적으로’ 공존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 배울 수 있는 공간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교회는 가능한 옮기지 않는 것이 좋고, 가능한 요람에서 무덤까지, 지긋지긋한(?) 사람들과 하나로 묶여 있으면서, 각 사람의 인생여정을 관찰하는 편이 우리 신앙에는 무척 유익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무엇이냐면 앞서 말한 ‘신앙의 재구성’을 겪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문제를 ‘교회를 옮기는 것’으로 해결하려 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입니다. 물론 교회 옮기는 것 자체가 나쁘다는 말은 아닙니다. 좋은 신앙 공동체로 옮기고, 거기서 뿌리내려 무덤에 이르기까지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면 좋은 선택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신앙의 재구성’을 겪어야 할 문제를, ‘교회를 옮기는 것’으로 해결하려 한다면, 그 사람은 인생을 살면서 하나의 ‘교회’에 소속되지 못하고, ‘교회’를 마치 이발소나 편의점처럼 이용만 하는 사람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저는 그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신앙의 재구성’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작게라도 도움이 될 수 있는 ‘교회 밖’의 임시 모임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잠깐 신앙의 재구성을 겪으면서 비명을 지르는 분들이 잠시 모교회를 떠났다가 다시 돌아가기까지, 혹은 모교회를 떠나 새로운 신앙 공동체를 찾기 전까지, 잠깐이라도 머물렀다 갈 수 있는 임시적인 모임이 있으면 좋겠다 싶었어요.
임시 모임인 만큼 자신의 삶을 다 오픈할 필요도 없고, 그러면서도 적절하게 성경에 대해 배우며, 성경의 이야기와 더불어 자신의 고민과 상황을 엮어서 함께 대화할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즉 ‘교회’에 소속되어 있었지만 잠깐 ‘교회’에 소속되기를 중단한 사람들이 다시 (새로운 교회든, 이전의 교회든) ‘교회’에 소속되기 전까지 머물 수 있는 공간 말이죠.
강남고속버스터미널 근처에서 진행할 ‘성경 공부방’은 그런 임시 모임을 지향하려 합니다. 매주 모이는 것도 아니고, 분기별로 6주 정도 모여볼까 합니다. 6주 정도 모여 한 권의 성경책을 공부하면서, 여러 대화를 나누는 거죠. 가능하다면 (마치 집단상담처럼) 서로 가명을 쓰는 방식으로 진행하고요.
일단은 설 연휴 끝나고 첫 모임을 진행해볼까 하는데, 모인 사람들 중심으로 여러 시도를 해보면서 윤곽을 잡아갈 생각입니다. 결국 모인 사람들이 어떤 배움을 얻기 위해 만드는 모임이라기보다, 모인 사람들이 재구성을 하는 과정을 돕기 위해 만드는 모임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