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추는 고래는 행복하다> 류인현 목사 (上)
혹등고래는 춤을 즐기고 노래를 많이 부른다고 한다. 거대한 몸집의 혹등고래는 사납지 않다. ‘바다의 수호천사’로 불릴 만큼 온순하고, 주변 해양생물이나 사람을 구하기도 한다. 깊은 바다에서 다이버를 만나면 몸을 뒤집고 지느러미를 흔들어, ‘더 이상 내려가면 위험하다’는 신호를 보낸다고 한다. 끝내 모든 이산화탄소를 끌어안고 심해로 내려가 죽고 나면, 그 사체는 심해 생물들에게 먹이가 된다.
뉴욕 뉴프론티어교회 류인현 목사는 이처럼 자신의 힘으로 위기에 처한 이웃을 살리고 구원하는 혹등고래를 보면서, 십자가의 낮은 곳으로 내려가셔서 죽음을 맞으신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래서 <거북이는 느려도 행복하다>를 펴낸 지 10년 만에 <춤추는 고래는 행복하다>를 썼다. 두 권 모두, 이 세상이 말하지 않는 ‘참된 행복’에 대해 소개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은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넘어서는 행복이다. 그것은 개인의 행복감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리고 그 행복은 공동체가 혹등고래처럼 함께 춤추고 노래하는 행복, 곧 샬롬이다. … 나는 혹등고래에게서 이 세상의 희망을 발견한다. 아버지 혹등고래가 새끼 고래와 함께 춤추고 노래하는 것처럼 예수님과 함께 춤추고 노래하는 삶을 살고 싶다.”
혹등고래를 좋아하는 저자는 이 책에서 약육강식과 승자독식의 세상 속에 조금 느리더라도 혹등고래처럼 함께 춤추며 노래하는 행복한 세상을 꿈꾸는 ‘21일간의 묵상’을 소개하고 있다. 최근 방한한 류인현 목사에게서 참된 행복과 청년 목회 이야기를 청취했다.
10년 전 거북이는 느려도 행복하다
승리보다 ‘완주·롱런’ 꿈꾸는 존재
부지런 반대는 게으른 아닌 조급함
1등 아닌 각자 퍼져 나가는 경주를
춤추는 고래는 행복하다
류인현 | 두란노 | 240쪽 | 16,000원
-첫 책은 거북이, 이번 책은 혹등고래입니다. 바다생물에 관심이 많으셨나요.
“두 동물 모두 인사이트를 받았는데, 나중에 보니 둘 다 바다생물이었어요. 저도 놀랐습니다(웃음). 교회 청년이 엄청나게 큰 혹등고래 그림을 그려 줘서 방에 걸어놨는데, 팬데믹 때 줌을 쓰다 보니 뒤편의 고래 그림에 대해 많은 분들이 물어봤어요. 그림이 너무 멋있다고.
10년 전 냈던 <거북이는 느려도 행복하다>는 동화 속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를 크리스천 관점에서 재해석해, 거북이 편을 드는 내용입니다. 동화에서는 거북이가 꾸준해서 이겼다고 하지만, 거북이는 애초에 토끼를 이길 수 없다는 걸 알았겠죠. 경쟁이 아니라, 느리지만 완주가 목표였던 것입니다. 토끼를 이길 생각으로 달린 것이 아니라, ‘롱런(Long-run)’이 목표였습니다.
우리도 게임이 주어졌을 때 이기려고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내 경기를 완주하겠다’, 자기 삶을 사는 정체성이 필요합니다. 빠른 도시 사회에서 누군가를 이겨 행복과 성취감을 느끼는 것 대신, 내 존재로서 나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느린 것이 열등감이 아니라 존재 자체로 행복할 수 있는, 어떤 상황에서든 나만의 길을 가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반면 토끼는 어땠습니까? 누군가를 이기고 있다는 자아도취에 빠졌다가, 결국 슬럼프를 겪으면서 나태해졌죠. 꼭 오늘날 현대인들 모습 같지 않나요? 우리 크리스천들은 거북이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고유한 소명과 정체성으로 자기 삶을 살면 충분히 행복할 수 있고, 느린 것 같아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10년 후인 지금도 유효한 메시지 같네요.
“당시 책을 읽고 위로를 받았다는 반응이 많았습니다. 취직이 늦어지거나 해서 불안하고 조급하던 분들이 ‘시작이 늦더라도 뒤처지거나 잘못된 것이 아니구나. 내 때가 있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구나’ 하고 생각하셨다고 합니다.
‘부지런한 자의 경영은 풍부함에 이를 것이나 조급한 자는 궁핍함에 이를 따름이니라’는 잠언 말씀(21:5)이 있습니다. ‘부지런한 자’와 대조한 부류가 ‘게으른 자’가 아니라 ‘조급한 자’입니다. ‘부지런의 반대는 조급함이구나. 조급해하지 말자. 대신 부지런해지자’. 천천히 자신의 길을 가면 되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목회했지만, 당시 한국에서 ‘헬조선, n포 세대’ 담론이 나올 때였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크리스천 청년들이 이런 담론에 휩싸여 불행하다고 느끼거나 거기에 휩쓸리면 안 된다는 우려가 생겼습니다. 너무 쉽게 절망과 포기를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그러기엔 이른 나이 아닙니까. 우리는 주님 안에서 희망이 있는데, 세상이 절망으로 끌고 가는 것 같았습니다.
초경쟁 사회로 접어들면서 교육계와 사회 분위기가 1등 지향적, 성공지향적으로 흘러왔던 것이 아직도 작용하는 것으로 봅니다. 제가 학교다닐 때만 해도 ‘1등만 알아주는 더러운 세상’ 이런 이야기를 하고 ‘은메달 따고 우는 유일한 나라’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 교육을 받고 자란 분들이 지금 기성 세대, 50-60대 리더들입니다. 어쩌면 그분들은 여전히 그런 마인드가 아닐까요.”
-청년들에게 위로가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회가 그렇게 흘러가고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경기를 하는 청년들 입장에서는 불만이 가득하죠. ‘1등을 못하게 만들어 놓고, 왜 1등을 하라고 그러냐? 공평한 출발이 아니다’ 그런 마음이 있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故 이어령 교수님이 늘 하시던 말씀처럼, 우리는 결승선을 향해 다같이 경쟁해서 달리는 인생이 아니라, 원과 같이 함께 모였다가 각자의 경주를 향해 퍼져 나가는 인생이어야 합니다. ‘모두가 1등인 세상’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저도 <거북이는…> 책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각자 고유의 소명과 칼라가 있으니 거북이는 토끼처럼 빨리 달릴 필요가 없고,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소명을 따라 직업 등 모든 영역에서 자신만의 달리기를 했으면 좋겠다고요.
목회자도 다 바울처럼 될 필요는 없잖아요. 다 바울이 돼야 할 것 같지만, 바울도 시대의 산물이고 지금 시대에 맞는 소명은 다를 것입니다. 주기철·손양원·한경직 등 훌륭한 목사님들이 시대마다 있었고 그분들을 따르려 해야겠지만, 이 시대에 필요한 목회자 상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소명은 무엇일까요? 이것을 고민하면서 믿음의 경주를 하시면 좋겠습니다.
목회자들조차 성공지향적으로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칠까 하는 세속적 야망이나 성공을 향해 달려간다면, 토끼처럼 부작용이 생기지 않을까요. 그러다 보니 돈이나 성(性), 권력 문제에 걸려 넘어지고, 토끼처럼 롱런이 안 되는 것입니다.
미국에서도 목회자들이 그렇게 주저앉는 경우가 의외로 많습니다. 성공지향적 목회가 가져오는 치명적 약점이 아닐까요. 교회들도 경쟁하고 있고, 경쟁력을 가져야 한다고 하니까요.”
뉴욕 한복판에서 17년간 청년 목회
경쟁 사회 속 행복과 위로 메시지로
다양한 배경 청년들에게 많이 배워
1.5세 한국 사회 변화 역할 있을 것
-목사님의 소명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저도 많이 고민해 봤습니다. 청년 목회를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33세에 이민 목회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원래 박사 과정까지 끝내고 한국에 돌아와서 목회하고 싶었는데, 박사 학위가 떨어지면서 고민을 많이 하다 청년 목회로의 부르심을 느꼈습니다.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섬겼는데, 벌써 17년 지났네요.
저는 기질상 토끼 같았습니다. 성격이 급하고 빨랐어요. 그런데 17년간의 청년 목회를 통해 조급함을 많이 만지시는 것 같아요. 거북이를 닮아가고, 여유가 생겼습니다. 청년들을 동원하고 드라이브를 걸기보다 여유롭게 대해주고, 기댈 수 있는 ‘품는 목회’를 좀 더 많이 하게 됐습니다.
유학 생활에 지치고 경쟁 사회에 지친 뉴요커들,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존의 치열함 속에 있는 청년들에게 더 열심히 해서 고지를 점령하라는 메시지보다, ‘지금도 충분히 잘 살고 있고, 이 속에서도 충분히 행복을 누릴 수도 있다. 지칠 때는 교회에 와서 위로를 많이 받았으면 좋겠다’ 등으로 메시지가 조금씩 변해 갔습니다.
30-40대에는 ‘으쌰으쌰’ 하는 메시지가 많았다면, 나이가 들면서 청년들에게 ‘충분히 잘 하고 있다. 얼마나 힘드니’ 하는 공감과 위로의 메시지가 늘어났습니다. 양쪽의 밸런스도 필요하겠지만, 교회가 아니면 위로나 공감의 메시지를 들을 곳이 없습니다. 경쟁 사회를 살고 있기 때문에, 교회가 아니면 부모 마음으로 ‘너는 충분히 잘하고 있다. 뒤처져도 괜찮다’는 이야기를 해줄 곳이 없죠. 하나님 마음도 그러실 것입니다. ‘너무 채근하면서 살 필요가 있을까’ 하는 질문도 던져 주면서요.”
-뉴욕이란 어떤 곳인가요.
“뉴욕의 가장 큰 매력은 엄청나게 많고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는 점입니다. 직업도 출신 배경도 그렇습니다. 전 세계에서 찾아오는 곳이죠. 선교사님 자녀들도 많고요. 그동안 다양한 배경을 가진 청년과 부부들을 1만여 명 만날 수 있었습니다. 만나면서 그들을 통해 ‘인생 공부’를 했달까요(웃음).
연세 드신 분들과의 만남에서도 물론 배울 수 있지만, 다양한 배경을 가진 청년들을 통해 엄청나게 많은 부분들을 배웠습니다.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다양한 것들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 장점입니다. 뉴욕이란 도시 자체가 2백여 인종이 모두 와서 살고 있으니까요. 문화예술의 도시이기도 해서, 다양한 철학을 배울 수 있습니다. 세상 모든 것들을 다 배울 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이민 목회, 특히 한국어와 영어를 모두 잘하는 1.5세 청년들과 함께해 오셨는데요.
“성경에도 1.5세들이 많습니다. 다니엘도 그랬고, 바울도 2개국어를 했죠. 이곳은 본국을 떠나 있다는 점에서 디아스포라의 정체성도 있습니다. 타문화권 속에 살아가고 있죠. 소위 ‘디아스포라 신학’도 있을 정도입니다.
이민 교회 성도나 청년들은 디아스포라 역할이 뭘까 고민하게 됩니다. 미주 코스타 대표로도 섬기고 있는데, 예전에는 유학생들이 많았지만 지금은 1.5세들이 더 많습니다. 이들은 ‘코리안-아메리칸’으로서 어떻게 정체성을 드러내면서 미국 안에서 복음의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1.5세 디아스포라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한국에 돌아가는 경우도 많은데, 그들이 한국 문화를 일정 부분 바꾸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생각도 합니다. 미국 문화를 심자는 건 아니고, 직장이나 교회 문화 중 개선할 부분에 대해서는 목소리를 내거나 영향력을 미치면 어떨까 하는 것입니다.
소수의 1.5세들이 어떻게 거대한 대한민국 사회를 바꿀 수 있을지 되물으실 수 있지만, 이렇게 살 수도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변화를 꿈꿀 수 있지 않을까요?
한국 사회를 폄하하고 싶진 않지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다소 획일적인 사회라는 것입니다. 유니폼을 입은 것처럼 획일적으로(uniformly), 똑같아지기를 바랍니다. 제가 어릴 때도 그런 교육이 많았습니다. 모두 교복을 입으면 같은 행동을 해야 할 것 같고, 유행도 다 똑같아지는 것입니다. 아직도 다양성 측면에서는 많이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1.5세 크리스천들이 이 땅에 살면서, 조금 다르게 살 수도 있음을 보여줄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에서 복음 전도가 어렵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의 복음전도는 예전처럼 ‘예수천당 불신지옥’ 구호를 외치기보단 ‘삶으로 증명해 달라’는 것입니다. 경쟁 사회에서 이렇게도 살 수 있음을 보여줄 수 있다면, 이 시대에 필요한 복음전도의 모습 아닐까요?
뭔가 다른 모습을 보면, 그들은 질문할 것입니다. ‘너는 왜 이렇게 살아?’ 그때 ‘이렇게 살아도 행복해’라고 잘 대답해 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베드로전서 3장 15-16절처럼, 소망의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 온유한 마음으로 대답할 것을 잘 준비해야겠죠. 지금은 ‘찾아가는 전도’가 아니라, ‘찾아오는 전도’의 시대니까요.”
-목사님의 키워드는 ‘행복’이네요.
“10년 전에도 행복이었고, 이번에도 행복에 관한 책입니다. 말씀드렸듯 세상이 모두를 우울과 절망으로 끌고 가는 것 같았습니다. 많은 청년들이 우울증에 걸리고, 어느 시대보다 정신질환도 많은 시대입니다. 이것이 너무 안타깝고 마음이 아파서, 다시 생각해 보자고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불행할 이유가 더 많을지, 행복할 이유가 더 많을지….
물론 행복할 이유가 더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삶의 주인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자이자 주인 되셔서 영원한 생명이 우리 안에 왔기에, 우리는 그 생명으로 사는 것이죠. 영원히 행복한 세상으로 가는 것이 바로 거북이의 결승점이자 우리 믿음의 경주요 정체성 아닙니까? 비록 삶이 힘들고 거칠고 괴롭지만, 그럼에도 결코 빼앗기지 않는 행복이 있지 않습니까?
주님 안에서 누릴 수 있는 행복이 분명 있습니다. 이것까지 빼앗기고 살 수는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크리스천들도 힘들고 어려울 수 있지만, 그 기저에 깔린 다른 것이 있습니다. 감옥에서도 찬양하던 바울, 사자굴에서도 기도하던 다니엘 같은 영성이 믿음의 선배들에게 있었죠.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계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찬양할 수 있는 것이 크리스천이죠. 하지만 오늘날 기독교는 고난의 영성, 우리에게 내재된 평안과 기쁨 등을 많이 빼앗기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