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추는 고래는 행복하다> 류인현 목사 (下)
“조금은 느리더라도 함께 춤추며 노래하는 혹등고래의 무리처럼, 행복을 누리고 나누는 샬롬의 세상을 꿈꾼다. 혹등고래처럼 주어진 힘을 누군가를 살리는 데 쓰며 살아가는 것이 이 시대의 작은 빛이요 희망이라 생각한다. 정의와 평화가 입 맞추는 하나님 왕국을 희망하는 사람들의 예수 닮은 삶이 이 시대의 희망이다. 이 희망을 품고 물살을 힘차게 가르며 헤엄치는 이 시대의 혹등고래들과 21일간 묵상과 기도의 여정을 함께 떠나려고 한다.”
고래는 지난 2022년 여름 방영된 ENA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통해 많은 사랑을 받았다. 자폐를 앓는 변호사 우영우는 ‘고래 덕후’였다. 창의적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면 고래가 춤추고 헤엄치며 하늘을 나는 장면을 특수효과로 보여줬고, 변호사 사무실에는 대형 고래 그림이 호기심을 자아냈다.
류인현 목사는 교회에서 20-30대를 보내고 한국으로 돌아간 심문섭 작가에게서 커다란 혹등고래 그림을 선물받은 후 고래의 매력에 빠졌다고 한다. 류 목사는 유학 시절 뉴욕 청년 목회를 시작해 지난 17년 동안 뉴프론티어교회에서 그들과 함께해 왔고, 지난 10월에는 젊은 가정 중심의 뉴저지 캠퍼스도 설립했다. 현재 미국 코스타(KOSTA) 공동대표이자 소래선교회·KPM선교회·하나로복지회 등 여러 선교회 이사로 섬기고 있다고 한다. 다음은 류 목사의 계속되는 이야기.
어려운 환경 속에도 감사 고백
목회자 아버지 따라 사명 품어
예수에게 올인, 천국까지 롱런
맨해튼의 코리안 팀 켈러 별명
춤추는 고래는 행복하다
류인현 | 두란노 | 240쪽 | 16,000원
-목회자 자녀이시죠.
“아버님을 보면서 신앙적·신학적 고백을 많이 하게 됐습니다. 굉장히 가난하셨어요. 예전에는 창원이 시골 같았는데, 상가 지하 15평에서 개척하셨어요. 사택은 산에 있었고, 무허가라 번지도 없이 흙으로 지어져 밤에는 쥐가 돌아다니고 연탄을 땠어요. 그곳에서 중학생 시절 보냈고, 성도는 저 혼자였습니다.
쌀도 없이 하루살이처럼 살았지만, 아버지는 제가 일어나면 바로 가정예배를 드리셨어요. 기도하면서 많이 우셨습니다. 원망이 아니라 감사해서요. ‘저 같은 죄인을 구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전에 술과 도박에 찌들어 방황하던 인생을 구원해 주시고 자격 없는 자를 목회자로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우시는 걸 봤죠. 말 그대로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였어요.
무허가 판자촌에 임했던 천국의 모습이, 제 신앙 여정에 굉장히 크게 각인돼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어떤 환경에서도 감사하고 행복할 수 있다는 걸요. 아버님에게서 신앙의 유산을 받고 감동을 받아 목회자가 돼야겠다고 마음 먹었어요. 목사가 되면 주님만 알고 주님만으로 행복할 수 있겠구나 싶었어요. 그래서 중학생 때 헌신을 다짐했죠.
아버지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신앙의 모범을 보여주시고, 예수 믿는다는 것이 행복임을 알게 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계속 행복에 대해 쓰게 됐죠. 크리스천들은 불행할 이유보단 행복할 이유가 더 많으니까요. 원망보단 감사의 이유가 더 많습니다. 세상과는 반대죠. 세상은 우울·절망·원망·비판이 많은데, 주님 안에서는 감사와 행복의 이유가 더 많아요. 그 마음에서 출발해야 희망을 노래하고 꿈꿀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민수기에 나오는 여호수아와 갈렙을 아시죠? 대부분 불평하고 원망했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에게는 가나안에 대한 소망이 있었어요. 미래에 대한 소망과 꿈을 포기하지 않았죠. 삶에 너무 함몰되지 않고 미래를 꿈꿀 수 있는 크리스천의 모습이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제 좌우명이 ‘올 인투 지저스, 롱 런 투 헤븐(All into Jesus, Long run to Heaven)’입니다. ‘예수에게 올인하고, 천국까지 롱런한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묵상하면서, 저도 저렇게 롱런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롱런하려면, 예수님께 올인해야죠.”
-‘맨해튼의 코리안 팀 켈러’라는 소개를 봤습니다. 팀 켈러에게 받으신 영향이 있으시겠죠.
“신학적 컬러 때문에 선배나 동료 목사님들이 그런 닉네임을 붙이신 것 같습니다. 개혁주의 신학을 하셨고, 웨스트민스터에서 교수도 하셨죠. 설교 중심에 항상 예수님이 있으신데, 저도 그 영향을 많이 받아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를 지향하고 성경 이야기가 어떻게 예수님과 연결되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집중합니다. 설교 스타일도 닮아 있어서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듯 합니다.
팀 켈러 목사님도 뉴욕 맨해튼에 계셨고, 도시인들에게 적합한 변증학적 설교, 질문하는 사람들에 대답하는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런 점을 많이 배웠고, 같은 뉴욕에서 비슷한 컬러로 사역하다 보니 그런 이야기들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성화, 단번에 일어나는 것 아냐
지향하고 몸부림치는 자체 행복
요즘 한국 메시지 적용이 대부분
그리스도 복음의 영광 드러내야
-책을 읽고 나서 드는 생각입니다. 복음은 너무 기쁜 소식이 맞지만, 복음을 살아내기는 너무 힘듭니다.
“저도 복음적 삶을 배우고 자라가고 싶은 사람입니다. 성화란 단번에 일어나지 않으니, 최소한 이를 지향하고 몸부림치면서 살아가는 자체가 기쁘고 행복하면 좋겠습니다.
행복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입니다. 이렇게 분투하는 삶 자체가 행복한 것입니다. 복음적 삶을 소망하면서, 그것이 너무 아름답고 좋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습니다. 아름답다는 걸 알아야 노력이라도 할 수 있으니까요. 메시의 축구를 보면 감탄이 나오면서 ‘나도 열심히 해서 저렇게 하고 싶다’는 소망을 품듯, 이런 삶이 너무 아름답고, 닮아가고 싶었으면 합니다. 제가 아버님의 발자취를 생각하면서 소망이 생기듯 말입니다.
독자들이 책을 읽고 책장을 덮었을 때, ‘우리 예수님은 정말 좋은 분이시고 나도 복음적으로 살아가고 싶다’는 마음만 생겨도 집필 목적을 달성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이런 삶을 살고 싶었지…, 다시 그렇게 살고 싶다’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게 하면 좋겠습니다.
복음 이야기를 하면, 자연스럽게 삶의 적용도 있어야 합니다. 감히 평가할 순 없지만, 요즘 한국 강단의 메시지를 들어보면 복음에 충실하기보다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현실 적용에 방점이 더 많이 찍힌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시고, 복음이 얼마나 압도적 영광인지는 다소 덜 보여주는 것 아닌가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팀 켈러 목사님의 메시지를 좋아했습니다. 복음의 영광을 설교하시고 그 안에서 적용을 하셨기에, 저도 그렇게 하려 노력했습니다. ‘그리스도 중심적 성경 연구’나 ‘리딩 지저스’ 등 그런 운동이 일어나는 것 같은데 좀 더 활성화돼서 한국교회 강단에 복음의 영광이 회복되면 어떨까 하는 거창한 꿈도 있습니다.”
-‘사람은 헤매는 만큼 성장한다’는 말씀이 참 위로가 됐습니다.
“헤매 보니 알게 되는 것이죠(웃음). 많은 실패와 시행착오를 통해 하나님은 때로 이렇게 내버려 두시는구나 생각했습니다. 아브라함 이야기도 그렇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어떤 순간이 되면 깨닫게 하시고 우리를 양육해 가시죠.
하나님의 양육법은 굉장히 독특한 것 같습니다. 일단 조급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양육은 일희일비하고 조급하지만, 성경 속 하나님의 양육에는 여유가 넘치십니다. 뭐든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여유가 있겠죠(웃음). 그 자신감이 부럽습니다. 저도 그 여유와 자신감을 배우고 싶고, 조급해하지 않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탕자가 집을 나가서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마음대로 살아도 내버려 두실 정도로 무한한 자유를 주시는 분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어도 될 정도로 마음껏 자유를 허락하시는 하나님,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 있나 싶을 정도로 우리를 믿고 기다려 주시는 하나님이 신기합니다.”
신학적 지식 쌓일수록 교만해져
예수님, 신학 100점 마음 100점
어설프게 알고 정죄할까 늘 조심
예수님 잘 설명하는 것 복음전도
-‘요나는 신학이 아니라 마음이 문제’라는 통찰도 인상적입니다.
“요나는 신학이 탁월했지만, 하나님 마음에 공감하지 못해서 니느웨를 품지 못했잖아요. 신약에서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율법에는 능통했을지 몰라도, 자기 의로 똘똘 뭉쳐 세리나 창녀 같은 죄인들을 정죄하니 예수님께서 이를 지적하시고 ‘하나님 마음을 모른다’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신학이나 성경공부는 많지만, 주님의 마음을 잘 알고 깊이 공감하고 있는지 돌아보면 부족한 면이 있을 것입니다. 학문적으로 계속 발전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과연 우리 마음이 계속 주님과 가까워지고 있을까요? 저 자신에게도 항상 그 질문을 하게 됩니다. 신학적 수준이 높아질수록 마음도 높아지면 좋은데, ‘미스매치(mismatch)’가 일어나니까요.
신학적으로 더 많이 알게 될수록, 오히려 교만해질 확률이 높습니다. 쉽게 정죄하게 되겠죠. ‘이게 틀렸고 저게 틀렸고’ 하는 차가운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신학 100점, 마음 100점’이셨어요. 신학이 가장 탁월하신데, 마음도 가장 따뜻하셨죠. 소외된 이웃들을 정죄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셨습니다.
우리는 신학도 100점이 아닌데, 100점인 척 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니 정말 문제입니다(웃음). 저 스스로도 어설프게 알면서, 다 아는 것처럼 쉽게 정죄하고 판단하는 모습이 많은 것 같아 늘 조심하려 합니다.”
-십자가를 ‘가장 비효율적인 방법’이라고 표현하셨는데, 예수님 편에선 가장 효율적인 방법 아니었을까요.
“하나님 편에서는 효율적·비효율적 측면보다, 이 방법밖엔 없었을 것입니다. 인간이 생각해내지 못한 유일한 방법이자 하나님의 지혜였죠. 인간 편에서 바라봤을 때는 기대했던 메시아나 구원의 방법이 아니니 너무 비효율적이지 않나 하는 인간적 관점으로 비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 당시 기대했던 메시아의 모습은 옛날 다윗 왕처럼 군림하고 제패하고 패권주의적 모습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왕이 죽어 버렸습니다. 그러니 능력을 원했던 유대인들에겐 무능력한 메시아였습니다. 지혜를 원했던 헬라인들에겐 미련하고 어리석은 스캔들이었죠. 그래서 두 계층 모두 예수님을 못 받아들였다고 바울이 이야기합니다.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의 능력이고 지혜라고 말하면서요.
지금도 마찬가지 같아요. 지금도 십자가는 받아들이는 사람만 받아들이는 ‘최고의 스캔들’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날 위해 죽으셨다는 데서부터 복음이 시작되죠. ‘왜 나를 위해 죽으셨지?’ 어릴 때 그런 생각을 했어요. 나를 그만큼 사랑하시는 데서 감동을 받고, 그게 믿기죠. 대신 믿기지 않는 사람들은 ‘왜 꼭 그렇게 하셨어야 했나? 신이 맞느냐?’며 복음의 문턱에 들어서지 못하죠. 그들에겐 예수 자체가 하나의 스캔들이겠죠.
하지만 교회나 크리스천을 싫어할 뿐, 예수님이라는 인물을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예수님에 대해 잘 설명해 주는 일이 이 시대에 필요합니다. 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고, 무슨 일을 하셨으며, 지금은 무엇을 하시는지 등에 대해 성경을 기반으로 믿지 않는 분들에게 설명해야죠. 우리는 너무 부족하지만, 예수님은 좋은 분이라고 다양한 각도에서 설명하는 것이 이 시대의 복음전도 아닐까요?”
행복, 솔로 댄스 아닌 ‘댄싱 투게더’
하나님과 우리가 함께 행복한 세상
요즘엔 너무 개인 행복에 취해 있어
-끝으로 목사님에게 행복이란 무엇인가요. 앞으로의 계획도 듣고 싶습니다.
“미국에서 있었던 북토크에서도 나왔던 질문입니다. 저도 행복에 대한 나름의 생각이 있지만, 다음 책에서 구체적으로 풀어내고자 합니다. 지금은 이 책에 잠깐 나온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행복의 초점을 개인에게 맞추는 것 같습니다. 행복을 ‘행복감’, 행복한 감정을 행복으로 여기기 때문이겠죠.
하지만 저는 성경을 읽고 주님을 생각하고 여러 묵상을 하다 보니, 성경은 함께하는 행복을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혼자 누리고 독차지하는 것, 무언가를 소유하고 성취해서 얻는 ‘느낌’이 성경에서 말하는 행복은 아닌 것 같습니다. 대신 함께하면서 사랑을 베풀고 누군가를 춤출 수 있게 하고 다시 살아나게 하는, 다시 생명이 꿈틀거리는 모습을 함께하는 것 말입니다.
그래서 제목도 <춤추는 고래는 행복하다>입니다. ‘솔로 댄스(Solo Dance)’가 아니라, ‘댄싱 투게더(Dancing Together)’입니다. 실제로 고래들은 새끼와 함께 춤을 춘다고 합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함께 춤추는 세상은 하나님만 행복한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가 함께 행복한 것입니다. 하나님도 삼위일체 안에서 공동체적으로 영원한 행복을 누리십니다. 하나님도 ‘솔로 댄서’가 아니라 성부·성자·성령이 함께 사랑하면서 춤추는 분이시죠. C. S. 루이스가 이를 댄싱 갓(Dancing God)이라고 잘 표현했습니다.
삼위일체가 누리는 사랑으로 충만한 행복이 우리에게 필요한데, 세상은 자꾸 ‘행복감’을 자꾸 주입시키려 합니다. 세상은 돈을 더 갖고 스펙을 갖추고 남이 알아주면 행복하다고 하지만, 정작 그런 자리에 올라간 사람들은 대부분 별로 행복하지 않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혼자 행복할 순 없기 때문이죠.
이는 한국 사회에도 의미하는 바가 있는데, 결혼을 거부하고 솔로로 살아가는 부분도 좀 위험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소명으로 독신의 부르심을 받은 경우는 빼고요. ‘결혼하면 구속된다’는 등, 세상이 주입하는 ‘솔로로 살아야 하는 이유’가 제게는 못마땅합니다. 혼자가 편하다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추구할 가치는 아니죠.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주입해요.
하나님은 혼자가 아니셨습니다. 솔로로도 살 수 있겠지만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나 혼자 행복감을 누리는 삶이 아니라, 누군가의 행복이 되어주고 사랑이 되어주며 그들과 함께 춤추는 세상을 성경적으로 말하면 샬롬(Shalom)이죠.
그런데 우리는 너무 ‘안티 샬롬’, 개인의 행복에 취해 있지 않나 우려스럽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세에 대해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는 고통하는 때라고 했는데, 오늘날 그렇게 되고 있지 않나 합니다. ‘함께하는 행복’에 더 강하게 방점을 두는 책을 한 권 더 쓸 예정입니다. 그렇게 ‘행복 3부작’을 마무리하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