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소천받은 김명혁 목사(강변교회 원로, 예장 합신 증경총회장, 한복협 전 회장)는 목회자이자 신학자로서 오랫동안 한국교회의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해 왔다.
1937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난 김명혁 목사는, 신의주제2교회와 평양서문밖교회에서 목회하다 공산당에 의해 투옥된 부친 김관주 목사 밑에서 철저한 신앙생활을 했다. 만 11세 되던 해인 1948년 8월, 가족들을 두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 홀로 38선을 넘어 서울로 넘어왔다. 당시 옥고를 치르던 그의 아버지는 끝내 순교했다.
그는 대한민국에서 학창시절을 보내면서 고교 3학년 때도 주말이면 전도를 나갔다고 한다. 결국 그는 교회를 개척했고, 100명 가까운 성도들을 모이게 했다고. 주일마다 학교에서 오라고 했지만 가지 않아, 결국 월요일마다 벌을 받았고 끝내 정학까지 당했다고 한다.
이 경험은 훗날 김 목사가 주일시험 반대운동을 전개하게 된 배경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김 목사의 주일 성수관은 북한 시절 주일학교 교사들로부터 비롯됐다. 그는 “이인복·최병목·명선성 선생님들에게서 주일성수 신앙과 새벽기도, 순교신앙을 물려받았다”고 회고한다.
그 후 김 목사는 한경직, 명신홍, 김치선 목사 등 많은 믿음의 선진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으며 목회의 길을 걸었다. 한경직 목사의 조언으로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B.A)를 수학한 후 용산 총회신학교에서 1년 공부하고 미국 필라델피아 훼이스신학교(B.D)로 유학길에 올랐다. 그 후 웨스터민스터신학교(Th.M)와 예일대 신학원(S.T.M.), 아퀴나스 신학원(Ph.D)에서 역사신학을 전공한 후, 풀러신학교, 튀빙겐대 등에서 연구와 학문활동을 이어갔다.
한국에 돌아온 김 목사는 후암교회 교육목사를 시작으로 총신대 강사, 조교수, 부교수, 영안교회 담임목사, 강변교회 담임목사, 합동신학교 부교수·교수·교장을 거쳐 한기총 공동회장, 한복협 회장, 합동신대 교수, KWMA 공동회장 등을 역임했다.
특히 한복협 회장으로 재직하는 동안에는 한국교회와 사회의 주요 이슈들에 대해 성경적·복음적 시각을 제시하는 데 앞장서 왔다.
그는 강변교회 은퇴 후에는 주님이 부르는 곳이면 작은교회든 외딴 섬이든 외국이든 달려가 복음을 즐겁게 전하는 ‘나그네’ 인생을 살아 왔다. 또 한국 사회의 건강성 회복과 평화적 통일을 위해 범종교계 지도자들 모임을 이끌어 왔다.
김 목사는 평생 ‘약함’과 ‘착함’과 ‘주변성’을 강조하며, 기독교계가 겸손한 모습으로 사회를 섬겨야 한다고 부르짖어 왔다.
그는 서울 강남구에 소재한 강변교회를 개척해 28년간 목회하면서 그 중 10년간 사례비를 받지 않았다. 은퇴 후에도 사례비를 받지 않고 작은 교회들을 순회하며 격려해 왔다. 소천 당일에도 직접 운전해 춘천으로 작은 교회를 격려하러 가던 중 사고를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