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와 그리스도교> 박흥식 교수 (下)
“기존 교회사를 다루는 책들에서는 통상 그리스도교가 성장하고 또 작동하는 배경이자 맥락을 이루는 당대 사회와 환경 즉 ‘전체로서의 역사’를 다루지 않았다. 이 책에서는 교회사를 전체사의 영역으로 확장해 교회사의 주제들을 시대적 컨텍스트 속에서 재해석하고, 가급적 외부 세계와의 상호 관계도 살피려고 노력했다.”
<장미의 이름>을 쓴 중세 최고 권위자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 1932-2016)는 방대한 백과사전 <중세> 시리즈 서문에서 중세는 암흑기도 아니었고, 고전 문화나 과학을 무시하지도 않았으며, 교회가 내세운 정통 교리만 넘쳐나던 시대도 아니었다고 밝힌다. 중세에 대한 폄훼와 왜곡은 고대를 동경하던 14세기 이후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의 관점이라는 것이다.
<중세와 그리스도교> 저자인 박흥식 교수도 여기에 동의하면서, 자신의 책이 낯설고 편견이 심한 중세와 그리스도교에 대한 균형 잡힌 이해를 돕는 작은 길잡이가 되길 희망하고 있다. 박흥식 교수는 1990년 서울대 서양사학과를 졸업한 후, 독일 괴팅겐 대학교에서 1996년 석사, 1999년 박사 학위를 각각 취득했다. 2003년 8월부터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현재 역사학회 회장, 서울대 기록관 관장을 맡고 있다.
주 전공 분야는 중세 유럽 도시사이고, 유럽의 사회경제사, 일상생활사, 교회사, 흑사병의 영향 등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 <역사 속의 질병, 사회 속의 질병》, <서양사강좌>, <사랑, 중세에서 종교개혁기까지>, <미완의 개혁가, 마르틴 루터>, <팬데믹 너머 대학의 미래를 묻다>, <문화의 유통 그 과정과 변이> 등이 있다.
이단 본격 출현 시기, 가톨릭 교회
체제 갖추는 시기와 비교적 일치
기독교 원형대로 전수 쉽지 않아
본래 사상 체계 속에 소화·이해돼
-중세가 시작되면서, 여러 종교회의를 통해 많은 이단들이 출현했습니다. 기독교에는 왜 이렇게 이단이 많은 건가요.
“이단도 중세사의 큰 주제이고, 여러 의견들이 존재합니다. 초대교회에도 이단들이 있었고, 중세에도 지속적으로 기독교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이단을 기독교와 결이 다른 민중신앙이나 이교의 영향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중세에 이단들이 본격 출현하는 시기는 가톨릭 교회가 체제를 갖추는 시기와 일치한다는 사실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제도교회가 교리를 정립하면서 그 기준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다양한 민중의 종교적 지향들을 이단으로 단죄하여 배척한 측면도 있으며, 그로 인해 이단이 크게 늘어났다는 시각이 가능합니다.
왈도파 아시죠? 이들은 당대에는 이단으로 분류됐지만, 오늘날에는 개신교의 한 부류로 이해됩니다. 보름스의 마르틴 루터 동상에도 그에게 영향을 준 한 인물로 왈도가 조각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당시 이단 정죄는 매우 정치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예전 공의회에서도 소수 의견이었기 때문에 배척됐지만, 한참 지나면 큰 문제 없는 해석으로 수용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말은 교회사 서술에 잘 기록되지 않습니다. 일종의 이단적 의견이 될 수 있겠죠(웃음).”
-구체적인 사례가 더 있을까요.
“우리는 기독교를 너무 제한된 의미로 이해합니다. 책에도 썼지만, 이단으로 정죄당한 아리우스파는 게르만들의 종교로 수용됩니다. 마침 그 시기에 황제가 아리우스파 신앙을 갖고 있었고, 황제와 가까운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고트족을 선교하기 위해 아리우스파 신앙을 지녔던 인물을 고트족을 위한 사도로 임명해 파송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영향으로 결국 게르만 전 지역에 아리우스파가 퍼지게 됐습니다.
그러면 이 역사적 과정을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고 배척해야 할까요? 해석이 아주 곤혹스러운 부분입니다. 아리우스파는 비교적 당시 게르만들에게 이해되고 수용되기 쉬웠습니다. 반면 로마가톨릭의 삼위일체적 신관을 게르만들에게 전달했다면, 수용되는 과정에서 갈등도 훨씬 심했을 것입니다.
게르만들은 당시 삼위일체 교리를 이해하기 훨씬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동방에서는 삼위일체 교리 때문에 몇백 년간 갈등을 겪었지만, 서방에서는 그렇게 갈등이 심하지 않았습니다. 삼위일체 교리 자체는 그리스-로마화된 사상에 토대를 둔 신학이었다고 이해되고 있습니다. 히브리 혹은 동방적 사상과는 동일 토대 위에 있지 않았습니다.
기독교가 세계 종교가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로마 사상 체제 속에서 설명될 수 있어야만 했습니다. 불가피하게 언어적·문화적·관습적 차이 때문에 히브리적 토대에서 출현한 기독교가 당대의 주류 사상적 기반으로 재해석돼야 했고, 그 과정에서 변형, 왜곡, 혹은 새로운 해석이라는 현상이 일어났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그 과정에서 본질이 훼손됐느냐고 물으신다면, 그것은 신학적 영역에 속한 질문이 됩니다. 어쨌든 오늘날 삼위일체를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 기독교인이라고 하진 않습니다.
예컨대 어린 아이에게 뭔가 어려운 것을 가르쳐 주려고 하면, 그는 제대로 소화를 못 시키고 자기 방식으로 이해해 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럴 때 그에게 가차없이 혼을 내며 매를 드는 것이 좋을까요, 아니면 좀더 성숙해져서 이해할 날이 올 때까지 기다려 주는 것이 좋을까요? 물론 기다리기 어려운 상황이 있을 수 있겠지만, 둘 중 무엇이 교육적으로 더 바른지는 생각해 볼 여지가 있습니다.”
-둘 중 무엇이 바른 것일까요.
“중세 가톨릭교회는 힘과 영향력이 커지면서 자신들이 생각하는 교리·체계에서 벗어난 가르침을 이단으로 배척하기 시작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의견이 다른 것은 물론이고, 혼내고 싶거나 배척하고 싶은 정적들이 보일 때마저도 종교적인 이단이라고 몰아세워 제거하는 방식을 사용했다는 점입니다. 당시 황제나 국왕 등 정치적 대상을 길들이거나 교회의 힘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파문이 빈번하게 남용되었습니다. 종교의 이름으로 그런 일을 했다는 점에서 비난을 받아야 마땅하겠죠.
저는 이해하기 어려운 종교적 교리들 때문에 갈등이 빚어질 때, 잠시 유보하는 방식을 썼어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정통을 확정지어야 제국이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는 다소 조급했던 생각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니케아 공의회를 통해 수행했던 방식입니다.
콘스탄티누스 자신도 삼위일체를 이해하지 못했으리라 생각되지만, 그는 삼위일체가 다수 의견이니 속히 확정짓고 그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추방하겠다고 위협했습니다. 결국 두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받아들이겠다고 했으나, 이후 200년 이상 이 문제에 이견을 제시하는 사람들은 제국 내에서 계속 출현했습니다. 그러니 그때 힘으로 억압해 섣부르게 확정하기보다는 유보 상태로 두면서 계속 토론하여 의견을 수렴하는 것이 더 나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화, 오랜 기간 유럽화 과정
동·북유럽 문화 이해에도 도움 돼
십자군 원정은 침략 전쟁, 부정적
과거 부정적 유산까지 성찰 필요
-서유럽 기독교 대신 동유럽 정교회, 비잔티움 제국은 기독교 역사에서 잘 다뤄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책에는 북유럽도 등장합니다. 이런 ‘변방’의 역사에 대해 간단히 개관해 주신다면.
“그러려면 여러 차례의 강의가 필요할 것입니다(웃음). 다만 우리가 너무 서유럽 중심의 문화에 익숙해져, 이외의 다른 지역에 대한 이해가 크게 부족한 것은 늘 아쉽습니다.
동유럽이나 북유럽에 관심을 기울여 보면, 그곳의 기독교 수용사는 국가와 민족의 형성 과정이었을 뿐 아니라, 사실 기독교 문화가 매우 다양했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됩니다. 기독교화(化)는 오랜 시일이 소요되는 유럽화 과정이었기에, 현재 그 지역 문화를 이해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된다는 점만 지적하고 싶습니다.”
-안티기독교인들은 기독교를 비판하면서 ‘십자군 전쟁’을 대표적인 예로 듭니다. 실제로 유럽을 향한 이슬람 제국의 위협도 상당했는데, 역사적으로 ‘십자군 전쟁’의 긍정적 성취 또는 모멘텀은 없었나요.
“글쎄요. 십자군 원정을 긍정하려는 일부 학자들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십자군 원정에서 종교의 이름으로 침략 전쟁을 벌인 것을 본질로 이해한다면, 더 이상 긍정하기는 어렵겠지요.
민중들의 순수한 동기가 원정으로 이어졌다는 점을 강조하는 경우도 있지만, 교황과 영주들이 이를 종교적·세속적 욕망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이끌면서 왜곡시켰고, 잘못된 목적을 위해 유럽 기독교 사회를 동원하였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성지 탈환이라는 목표가 적절했는지도 의문이지만, 그 방법이 종교 전쟁의 성격을 띤 정복이라면, 어떻게 적절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 원정의 부정적 유산은 21세기까지 이어져 어떤 불행을 만들어 내고 있는지 우리가 지금도 목격하고 있지 않습니까.”
-중세 기독교는 결국 ‘종교개혁’으로 완전히 변화됩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나요.
“저는 중세 기독교 혹은 가톨릭을 간단히 평가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 내부에는 본받아야 할 신앙의 모범들도 있었고, 부패한 요소들도 있었습니다. 중세 말기에 이르면 구조적인 부패가 절정에 치달았고, 이를 비판하며 개혁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가톨릭을 중세 교회의 부정적인 모습과 동일시하는 것은 전혀 적절한 역사 인식이 아닙니다.
교황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황’이라는 종교 지도자를 칭하는 번역어가 정치적 색채를 많이 띠고 있기는 하지만, 그 권위를 바르게 행사하려던 지도자도 적지 않았습니다.
개신교 신학대학들에는 보통 초대교회사와 종교개혁사를 가르치는 교수는 있지만, 중세교회사를 가르치는 교수가 있는 경우는 드뭅니다. 교회 혹은 기독교가 어떻게 현재 모습을 갖게 되었는지 이해하려면, 전 과정을 찬찬히 추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제한된 주제나 영역만 교육하는 과정에서 초대교회는 지나치게 이상화하고, 종교개혁기 개혁가들은 오류 없던 지도자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종교개혁의 신학이나 이상을 절대화하여 내세우게 되기도 하구요.
반면, 종교개혁 이후 제시하였던 그 이상이 실제로 각 지역에서 어떻게 실현되었는지 살펴보는 긴 과정이나 결과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심이 적습니다. 그런데 종교개혁이 진행되고 심화되는 과정에서 분열, 종교전쟁, 세속화 등의 뜻하지 않은 이질적인 유산을 넘겨받게 된 부분에 대해서도 깊이 성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역사 공부를 통해 개신교도라는 자부심을 갖게 만드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런 과거의 부정적 유산까지도 성찰하도록 해야 좀더 성숙하고 균형잡힌 신앙인을 양성하는 데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홍성강좌 시리즈의 마지막 책이자 다음 저서로, ‘종교개혁과 그 유산’이라는 부제 아래 종교개혁 시대를 다루고자 합니다. 종교개혁 시대 교회사 기술은 대부분 종교운동에 할애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순수한 종교운동이었는가? 종교전쟁은 왜 발생하였는가? 근대적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을 때 교회는 무엇을 하였는가? 등도 비판적으로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시대를 편협하게 보게 됩니다.
요즘 저는 ‘뉘른베르크 종교개혁’을 주제로 논문을 쓰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사의 일부로 그 도시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난 과정을 되짚어 보고 있지만, 신앙고백적으로 쓰진 않습니다. 당시 종교개혁에 참여한 사람들이 어떻게 기독교를 이해하고 행동했는지, 어떤 점에서 다른 지역과 종교개혁의 양상이 달랐는지 등을 살펴보며 제 시각을 반영하게 되겠지요.”
-그때와 지금의 가톨릭은 얼마나 다른가요.
“개신교도들이 가톨릭을 비판하면서 은근히 카타르시스나 우월감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적지 않은 개신교도들은 중세 가톨릭의 가장 부정적인 모습과 현재의 가톨릭이 비슷하다고 오해합니다. 그것은 좀 잘못된 태도입니다. 그 사이에 엄청난 격차와 거리가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중세 가톨릭은 본받아야 할 부분도 있고, 부패했던 부분도 있습니다.
중세 말기에는 구조적 부패가 절정으로 치달았고 개혁 운동도 어려웠지만, 현재의 가톨릭교회를 중세 가톨릭의 부정적 모습과 동일시하는 것은 적절한 역사 인식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질문은 가톨릭의 가장 부정적인 모습과 현재의 가톨릭이 같다고 보는 차원으로 봅니다.”
수도원 문화, 성직주의, 성인 숭배
중세 가톨릭 요소 차용하는 개신교
수도원 배우면서 가톨릭 비판 모순
종교개혁가 영웅시, 우상화 우려도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중세의 신앙생활이나 사상, 사회적 모습이나 제도 등에서 배워야 할 모습이 있다면.
“흥미로운 점은 요즘 기독교에서 중세 가톨릭의 종교문화들을 닮아가는 경향이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가톨릭의 수도원 문화, 성직주의, 성인 숭배 등이 대표적입니다.
개신교에서도 수도원 영성을 배우려 노력하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닙니다. 저는 이 부분을 비판적으로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수도원 영성을 배우려고 하면서, 가톨릭을 비판하는 건 다소 모순적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중세 말 개혁가들은 교회의 성직주의를 비판하면서 종교개혁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후에는 성직자 신분을 철폐하고 만인사제설이 실현되어야 할 터인데, 적잖은 교회에서 목회자가 교회의 주인 행세를 하고 평신도들은 교회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여전한 듯합니다. 목회자가 중요 문제에 전권을 행사하고, 교회 공동체 구성원들은 배제한다면 중세적 성직주의에서 한 발도 더 나아가지 못한 것이 아닐까요?
저는 또 종교개혁가들을 영웅으로 만들고 떠받들려는 시도가 일종의 성인숭배 혹은 영웅숭배로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당대에 소임을 다한 것이고, 오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오늘의 신자들이 과거를 교훈과 거울로 삼아 협력하며 새로운 길을 열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독자들과 교회들에게 당부하고픈 말씀이 있다면.
“종교 공동체, 교회에서 전인적 신앙인들을 양성하려면, 지성도 훈련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른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는 성경공부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세상을 기독교적으로 읽어내는 성숙한 지성과 실천하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예컨대 지금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전쟁의 종식과 피해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전쟁을 피하기 위해 우리가 지금 시급하게 실천할 것은 무엇인지, 종교인들이 나설 부분은 없는지, 정치권에는 어떤 의견을 전달해야 하는지, 우리의 미디어와 교육 등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등등에 대해서도 충분히 토론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이런 부분은 전혀 신앙의 영역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런 내용의 숙고와 토론 과정을 통해 전인적 신앙인으로 발전할 수 있을 텐데, 우리는 신앙 행위를 기도, 교회 출석, 헌금, 구제 등으로 제한하여 생각하는 듯합니다. 정말 성숙한 신앙인이라면 개인의 삶과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영역에 대해서도 신앙을 적용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더불어 중세 인물들 중 독자들이 기억했으면 하는 한 사람과, 중세를 더 공부하고 싶은 분들이 읽을 만한 도서 추천을 부탁드립니다.
“피에르 아벨라르(Pierre Abélard, 1079-1142)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탁월한 지식인이었지만 이단 혐의를 받았고, 개인적 약점도 적지 않았던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다 극복하고 결국 스콜라 철학의 시조가 됐습니다.
중세에 학문이란 과거의 지식이나 전통을 후대에 전수해 주는 성격에 가까웠습니다. 그런데 이 인물은 전통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의문을 품고 계속 질문하면서 신앙에 ‘이성’을 적극 적용하기 시작했습니다. ‘합리성을 지닌 신앙’을 형성하는데 크게 기여한 사람입니다.
아벨라르는 지식인과 성직자의 길을 택해 정진하다가, 약 20년 연하의 여학생 엘로이즈(Héloïse, ?-1164)와 사랑에 빠집니다. 그 후 자신의 성기가 거세되는 사건까지 겪습니다. 당시 파리에서 가장 유명한 스캔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인물과 관련해 대체로 이 에피소드만을 떠올리지만, 아벨라르는 귀족의 신분을 포기하고 지식인의 길을 걸었고, 무조건 믿기를 강요받던 시대에 ‘질문하고 생각하는 신앙’을 추구하며 치열하게 살았던 ‘지식인’의 전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세 관련 도서는 워낙 많은데, 제 책 서문에서도 <치즈와 구더기> 등 몇 권을 소개했습니다. 우리말로 읽을 만한 서양 중세사 책들이 이제는 많지만, 조금 다른 시각을 지닌 도서로는 낸시 마리 브라운이 쓴 <주판과 십자가> 같은 책이 있습니다. 과학자 출신 교황 실베스테르 2세 이야기인데, 이슬람 문화가 어떤 식으로 유럽 문화에 영향을 미쳤는지 흥미롭게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