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성록, 한 점의 그림] 두 미술가의 다른 신념 체계, 엇갈린 행보
박문원 작가 사회주의 세계관
노동계급 해방 공산주의 건설
김학수 작가는 기독교 세계관
하나님 주신 달란트 이웃 위해
기독교 세계관, 긍휼함과 섬김
인생 항로 없어선 알 될 ‘뗏목’
해방 후 한반도 격변을 상징적으로 알려주는 두 미술가가 있다. 자신의 철학을 실천한 행동주의자 박문원(1920-1973)과 김학수(1919-2009)가 그 주인공들이다.
박문원은 ‘철저한 사회주의자’로, 김학수는 ‘확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았다. 두 사람은 나이가 각각 1920년생, 1919년생으로 동년배라는 사실, 혼란기를 겪은 미술인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뚜렷한 신념 체계를 지녔다는 점도 비슷하다. 그들의 신념 체계에 따라 6.25 전쟁 기간 박문원은 남에서 북으로 올라갔고, 김학수는 북에서 남으로 내려왔다.
맑시즘 예술 이론가이자 작가인 박문원의 이력에는 그의 삶의 흔적이 그대로 묻어 있다. 해방을 맞자 그는 남로당 서울시 문화부 총무과장을 지내는 등 공산당원으로 사회주의 사회건설에 투신하였다. 남로당 당원이 되었다는 것은 맑스-레닌주의 이념을 받아들였다는 것이고, 주위 사람들에게도 이를 객관적으로 인정받았다는 뜻이다.
해방 공간에서는 조선 프롤레타리아 미술동맹 중앙위원과 조선미술가동맹 서기장을 지냈고, 북한의 남침으로 서울이 함락되자 ‘조선미술가동맹 위원장’이라는 중책을 맡았다고 북한 미술사학자 리재현은 기록하고 있다. 그는 일찍이 인민 대중의 혁명위업을 달성하기 위해 예술가도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봉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롤레타리아 미술은 프롤레타리아트 계급만이 가질 수 있는 사상과 감정을 통하여 더욱 고도한 예술수립을 기도하는 동시에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투쟁에 적극적으로 참가한다(조선미술의 당면과제, 1945).”
이어 서양 미술은 부르주아 계급을 위한 ‘불구적’ 예술이므로, 프롤레타리아 계급 이익을 대면하는 예술에 집중하며 공산주의 종주국 소비에트 예술을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우리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제 모순을 폭로시키고 노동계급을 위하여 투쟁해오는 만국 프롤레타리아 미술가에게서 많은 것을 배워야 하고 세계미술사의 새로운 페이지를 제치고 있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조국 소비에트, 러시아의 미술을 공부하지 않으면 안된다(조선미술의 당면과제, 1945).”
몇 년 후 발표한 글에서도 ‘예술이란 하나의 선전수단(선전미술과 수수미술, 1948)’으로 규정,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사상적 무기가 될 것을 주문하였다. 월북한 후 문화성 제3대 부상, <조선미술> 발행을 맡는 가운데 김일성의 문예정책을 옹호, 홍보하는 글들을 발표하는 등 사회주의자로 일관된 모습을 보였다.
그와 정반대의 삶의 궤적을 보인 사람은 혜촌 김학수이다. 평양에서 태어난 김학수는 청소년 시절 하나님께 선하고 올바른 삶을 살기로 서약한 후 평생 그 약속을 준수하고자 힘쓴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는 남한에 내려와 수많은 풍속화와 기록화 등 귀중한 문화적 유산을 남겼다.
그가 월남하게 된 것은 북한 당국의 교회 탄압과 그리스도인에 대한 핍박에 기인한다. 공산주의 치하에서 신앙의 자유를 억압당했을 뿐만 아니라, 신앙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불이익을 받아야 했다.
작가는 생전에 갑작스런 이별에 따뜻한 말 한마디 해주지 못하고 떠나온 아내의 얼굴이 눈에 어린다고 슬퍼했다. 아내와 자녀에 대한 그리움과 죄책감에 시달리며 반 세기 이상을 독신으로 지냈다.
남한에서 그의 삶은 고난으로 점철됐다. 부산에 도착한 그는 영도 대한도자기 회사에서 도자기 그림을 그리며 생계에 도움을 받았고, 그러면서 함께 피난 온 청년들(그들은 평양 성화신학교에서 한문·서예를 가르치던 제자들이었다)에게 먹을 것과 보금자리를 제공해주었다. 그가 돌본 청소년들이 45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작가는 자서전 <은총의 70년>에서 “그 아이들이 마치 두고 온 자식 같았습니다. 오갈 데 없는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도움을 줌으로써 위안과 보람을 맛보게 된 것을 오히려 기쁘게 생각합니다”고 술회하였다. 서울 수복 후 청파동에 살 때는 고정 가족 외에 새 가족을 받아들여 그들을 돌보며 지원했다.
그런데 김학수는 박문원만치 화려한 경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 박문원이 일본 동경제국대학 유학에다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한 엘리트인데 비해, 김학수는 정규 교육이라고는 소학교를 졸업한 것이 고작이다. 16살 때 부친, 18살 때는 모친이 돌아가셔서 학교에 더 다닐 형편이 되지 못했다.
박문원이 자신의 능력을 사회주의 사회건설을 위해 사용한 것에 반해, 김학수는 끼니를 거르고 전쟁 트라우마를 겪는 이웃을 구제하고 섬기는데 헌신했다. 교회에서 배운 것과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이 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 셈이다.
우리 각자는 세계관, 즉 삶의 모든 경험들을 해석하는 줄거리나 안내지도를 지닌다. 그것은 현실과 자신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방식과 직면한 문제에 대처하며 이를 해결하는 방식을 정하기도 한다.
그러면 두 사람이 지닌 세계관은 어떤 것이었을까? 먼저 박문원의 세계관은 사회주의적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 그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통해 노동계급을 해방함으로써 착취와 압박과 계급이 없는 공산주의 사회건설을 목표하며 투쟁하였다.
반면 김학수의 세계관은 기독교 신앙에 뿌리를 두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지금까지도 인간과 역사와 현실을 그 분의 선하신 뜻대로 돌보신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어떤 환경에서도 감사할 줄 알며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이웃 섬김을 위해 사용하는 삶을 살았다.
박문원과 김학수는 동시대에 살았으면서도 전혀 다른 삶의 모습을 보여줬다. 사회현실을 받아들이는 관점도 달랐고 그 상이한 관점에 따라 각각 월북·월남이라는 결정을 내렸으며, 이후에도 자신의 확고한 신념에 따라 말과 행동에 일치를 보였다.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세계관이 존재하지만, 가장 두렵고 무서운 것은 그것이 세상을 변화시킬 힘을 지닌다는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은 이것을 스스로 고안한 것임에 반해, 그리스도인들은 계시의 형식을 통해 이것이 인간의 경험 외부에서 온다고 믿는다.
기독교 세계관은 김학수에게서 보듯 동료 인간을 긍휼히 여기고 섬기는 마음이며, 이는 선하신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다고 믿는다. 어느 철학자는 각자 훌륭한 이론을 받아들여 “그것을 인생을 항해하는 뗏목으로 삼아야 한다”고 조언한 바 있다.
김학수에게 기독교 세계관은 인생 항로를 헤쳐가는 데 없어선 알 될 ‘뗏목’이었다. 박문원은 그런 ‘뗏목’을 갖추기보다, 스스로의 힘으로도 얼마든지 목적지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던 인본주의자였다. 그의 삶을 보면, “모든 과목에서 A학점을 받아도 인생에서 낙제할 수 있다”는 워커 퍼시(Walker Percy)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서성록 명예교수
안동대 미술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