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나영 칼럼] 마티아스 그뤼네발트의 ‘십자가 처형’
고난과 부활 계절, 그림 통한 묵상
예수님 캐릭터? 다른 신학적 논란
자기 생각으로 예수님 축소? 우상
교회력 간결해도, 간과해선 안 돼
그뤼네발트 그린 이젠하임 제단화
고통스러운 십자가형 현장 묘사해
죽어가는 피부병자들 섬긴 수도원
소외되고 병든 이들 그림으로 위로
개신교에서는 예수님의 얼굴을 그리지 않는다. 조각은 더더욱 만들지 않는다. 길고 일었던 성화상 논쟁과 파괴의 역사에서는 종교개혁을 기점으로 절대로 넘어서면 안 되는 ‘38선’이 그어졌는데,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및 주요 개신교 교리문답에서 예수님을 자세히 그리거나 조각하거나 표현하는 것은 우상숭배라고 결론지었다.
최근 30-40년간 빠른 변화를 겪은 교회들과 그리스도인들은 독특한 예술문화를 만들어온 듯하다. 예수님이 등장하는 영화나 뮤지컬은 괜찮지만, 가톨릭 전통의 성화상에는 여전히 알러지 반응을 일으킨다. 예수님이 어린 양을 치고 있는 그림은 괜찮지만, 성모 마리아와 함께 그려진 그림은 애써 보려 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행적을 그리고 있는 장면은 괜찮지만, 예수님의 모습만 드러나 있는 자화상 같은 그림은 피한다.
오늘날 개신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예수님은 주일학교 교재 속 하얀 고급 히마티온(고대 그리스에서 1장의 큰 모직물 천으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남녀가 두루 입은 겉옷 -편집자 주)에 당시 철학자들이 두르던 빨간 베일과 같은 띠를 입고 있는 만화 주인공일 경우가 많다.
때로는 가슴이 넓게 그려진 사랑의 예수님, 때로는 어린아이들을 안고 계신 예수님의 캐릭터를 자주 볼 수 있다. 그뿐 아니다. 많은 목회자들과 교회 리더들은 예수님이 표정을 짓고 선한 반응을 하는 카카오톡 같은 SNS 이모티콘을 즐겨 사용한다. 자기 감정을 실어나르는 캐릭터로 예수님 형상을 재미있게 사용한다.
2018년 조앤 테일러(Joan E. Taylor)는 실제 예수님의 얼굴 행적을 연구한 작업을 출판했다. 그녀는 현대 교회가 표현하는 예수님의 고급스러운 옷과 모습을 비판하며, 실제 예수님의 모습과 얼마나 다른지 조심스럽고 섬세하게 파헤친다. 그녀의 요지는 예수님의 얼굴이 궁금해 실사화를 하자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지나며 왜곡된 예수님의 이미지에 대한 반문이며 비판이다.
예수님을 그리는 것은 우상숭배를 할 수 있는 위험한 일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예수님을 자신의 생각으로 축소하는 것도 강력한 ‘나’라는 우상의 모습이다. 예수님을 신학적으로 가장 안전하게 표현한다 해서, 예수님을 그대로 잘 표현하는 것도 아니다. 예수님을 마음으로 그릴 수 없다면 이신론적 신앙의 전형적인 모습이며, 예수님을 캐릭터화하는 것은 또 다른 신학적 논란을 일으킬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논란이 두려워, 오늘날 개신교 신자들은 주옥 같은 작품들을 감상할 기회를 많이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고난주간과 부활절을 앞두고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가장 중요한 구속사역을 기념해야 한다.
미국 예배신학자 제임스 화이트(James F. White)는 저서 <기독교 예배학 개론>에서 “교회력이 간결하다 해서, 그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오늘날 우리는 너무 쉽게 많은 의미를 생각하고 경험할 수 있는 의식과 형식의 틀을 무시한다. 너무 쉽게 즉흥성에 의지하며, 너무 자주 중요한 것들을 생략한다.
주님의 고난과 부활을 깊이 묵상하는 것은, 주님의 사역에 함께 참여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의 선물이다. 그 ‘시간의 선물’은 교회력을 따라 부여되고, 우리가 곧 맞이하는 고난주간이며 부활절이다. 일회용 성찬키트와 부활절 칸타타가 불려지는 교회행사 정도로 이 중요한 시간을 무시해 버리는 것은 아닌지, 우리는 고심하며 마음을 써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고난주간과 부활절, 이 경천동지(驚天動地)한 사건의 계절에, 우리의 묵상의 깊이를 더해줄 한 작품을 소개하려 한다.
마티아스 그뤼네발트(Matthias Grünewald, 1470-1528)의 이젠하임 제단화다. 그뤼네발트는 16세기 초 독일에서 활동한 화가로, 그의 화풍을 볼 때 르네상스보다는 말기 고딕 양식과 북유럽 회화로부터 사실주의 기법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의 활동기에 대해 알려진 것이 많지 않지만, 목판 유채화인 ‘이젠하임 제단화’에 의해 당대의 뛰어난 화가로 존경받고 있다. 이 제단화는 이젠하임에 있는 성 안토니우스 수도원을 위해 그렸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 부활에 이르는 이야기들을 묘사한 아홉 개의 패널로 구성되어 있다.
아홉 패널 그림들 중 중앙에 위치한 ‘십자가 처형(Crucifixion, 1515)’이라는 작품은, 고통스럽게 죽어가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형 현장을 묘사한 그림이다.
못에 박혀 고통 속에 뒤틀어지는 손가락, 신경을 잃어가는 발가락의 시든 모양과 죽어가는 피부색, 가시 면류관을 쓰신 예수님의 얼굴 속 고통스러운 표정, 상처로 가득한 그의 모든 피부 표현, 고통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좌우로 휘어져 있는 십자가…, 이 모든 장면은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 고난이 어떤 것이었는지 느끼게 한다. 그리고 대신 지신 우리의 죄악의 무게와 크기를 가늠하게 한다.
왼편에는 애통하고 있는 성모 마리아와 그녀를 위로하는 사도 요한이 그려져 있고, 향유 옥합을 깨트려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했던 막달라 마리아는 무릎을 꿇은 채 십자가를 향해 두 손을 모아 들고 오열하고 있다. 오른편 아래 어린양은 십자가를 지고 성배를 받쳐 피 흘릴 준비를 마쳤고, 성경 속 성금요일 묘사처럼 해가 빛을 비추지 않는 어두운 배경을 묘사했다.
오른편 세례 요한은 왼손으로는 성경을 펴들고 오른손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는데, 예수를 중심으로 향하는 요한의 몸의 방향 묘사는 요한의 겸손함을 강조하고 있다. 요한의 손 옆에는 붉은 라틴 글자로 요한복음 3장 30절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말씀이 새겨져 있다. 그의 왼손으로 펼친 성경 속에는 요한복음 1장 29절 후반절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말씀을 가리킨다.
이 그림은 중요한 사람일수록 더 크게 그리는 당시 상징주의 기법으로 그려졌는데, 예수님의 몸 크기가 제일 크고 막달라 마리아를 제일 작게 그렸다. 그뤼네발트가 당시 이미 처형되고 이 땅에 없던 세례 요한이 십자가 죽음 앞에 세워 놓은 장면, 십자가를 지고 있는 어린 양을 의인화해 예수님으로 비유하고 있는 모습, 이미 깨트린 향유 옥합을 막달라 마리아의 발 밑에 둔 장치 등은 사실주의 기법과 잘 어우러져 신비함과 복음의 내용 전달 모두에 집중했음을 알 수 있다.
이 그림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당시 그 지역에 일어난 일들과 성 안토니우스 수도원에 대해 알아야 한다. 그 무렵 유럽에서는 흑사병을 비롯한 여러 전염병이 돌았고, 호밀빵에 생긴 균으로 인한 맥각병 등 죽음의 병에 걸린 자들이 유난히 많았다.
그 중에 맥각병은 나병처럼 먼저 피부가 손상되고, 그 피부 상처가 곪아 신경과 혈관에 오염되어 고열과 경련, 환각과 절단 등의 고통을 겪다 사망에 이르는 질병으로 많은 이들이 그 끔찍한 병에 걸려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이들을 불쌍히 여겨 치료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믿었던 수도승들은 성 안토니오를 주보로 수도원을 만들어 환자들을 돌보기 시작했고, 그 수도원은 심각한 피부 질병으로 죽어가는 이들이 머물 수 있던 피난처와 같은 곳이었다. 당시 나병과 페스트, 맥각병은 하나님이 내린 재앙으로 여겨졌지만, 수도원은 이들을 예수님처럼 섬겼다는 기록이 있다.
바로 이곳에서 그림을 의뢰받은 그뤼네발트는 예수님의 고통과 그들의 고통을 묵상하며, 세기에 남을 강력한 소망의 작품을 완성한 것이다. 당시 미술 작품들의 폐쇄 회로는 귀족들의 전유물로 그들의 개인적인 종교적 욕심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 작품은 소외되고 극악의 고통 가운데 거하는 병든 자들을 위로하려는 목적으로 그려진 희귀한 그림이다. 현재까지도 이 그림을 보고 치유와 위로를 얻고자, 프랑스 콜마르 운터린덴(Unterlinden) 미술관에 수많은 사람들이 방문한다.
독일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는 이 그림의 모조품을 자신의 서재에 50년 간 걸어 놓았다. 그리고 이 그림으로 받은 영감이 자신의 신학의 실천 방향의 핵심을 바꾸어 놓았다고 고백했다.
바르트의 관심은 십자가 오른쪽에 있는 인물인 세례 요한에게 집중돼 있었는데, 메시아의 길을 닦은 가장 위대한 마지막 선지자인 세례 요한이 ‘자신을 그저 모든 영광과 찬양을 받기에 합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순수한 안내자’로 여겼다는 메시지 때문이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성경구절과 함께 오직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그 태도를 자신의 신학 신조로 삼은 것이다.
이 그림의 내용과 배경이 가진 메시지 앞에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오늘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기쁘고 기쁜 부활절을 맞이하며,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자들을 돌아보고 있는가? 오늘날 우리가 쉽게 추구하게 되는 부와 명예와 인기, 화려함과 편리함은 예수님의 제자로의 삶과 부합하는가? 오늘날 교회 리더들은 세례 요한처럼 낮아짐을 추구하며 예수님만을 가리키고 있는가?
우리는 이 선물 같은 계절,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기쁨을 맞이하며 깊은 회개로 나아가야 한다. Soli Deo Gloria.
서나영 박사
미국 남침례신학교(SBTS)에서 교회음악(MM)과 신학(M.Div.equi.)을 공부하고, 기독교예술학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총신대학교 객원교수, 미국 스펄전 대학교 초빙교수로 있으며, 서울기독교세계관연구원에서 문화예술 전임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