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읽는 그리스도인> 이정일 목사 (上)
2020년 <문학은 어떻게 신앙을 더 깊게 만드는가>로 혜성처럼 나타난 이정일 목사가 2022년 실제 9편의 소설을 소개한 ‘실전편’ <나는 문학의 숲에서 하나님을 만난다> 이후 다시 2년 만에 <소설 읽는 그리스도인>으로 돌아왔다.
<문학은 어떻게…>에서 “예수를 잘 믿는다는 것은 성경에 밑줄을 긋는 일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긋는 것”이라고 했다면, <소설 읽는 그리스도인>에서 이정일 목사는 “소설은 한 사람을 알게 하는데, 그게 나일 수 있다”고 말한다.
“성경을 읽고, 어른이 되고, 소설을 읽는 게 다 다른 것 같아도 사실은 연결돼 있다. 성경을 읽는 것은 영적인 일 같고, 어른이 되는 건 현실적인 삶 같고, 소설을 읽는 것은 개인의 취미 같지만, 이 셋은 연결돼 있고 동시에 저마다 혼자서도 중요한 작업을 한다. 그건 바로 새로운 사고 회로를 만들어내는 작업, 즉 사고의 확장이다.”
책에서는 그리스도인에게 소설이 왜 필요하고, 이게 어떻게 신앙을 자라게 하는지, 소설을 읽을 때 내면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등을 말하고 있다. 저자는 이 모든 것이 앞으로 교회를 지켜갈 하나님의 사람들의 내면을 든든히 세워가기 위함이라고 강조한다. 이정일 목사가 들려주는 소설과 신앙 이야기는 두 편으로 나뉘어 연재된다.
목회자들 설교 위해 소설 읽어야
현실과 부딪치는 설교 위한 읽기
읽으면 딱 이해가 되는 소설부터
<노인과 바다>, 실화를 소설로
<분노의 포도>는 1권이 출애굽,
2권은 가나안 정착 이야기 같아
-세 번째 저서 출간 후 근황이 궁금합니다.
“목회자들과 독서 모임을 갖고 있습니다. 소설 읽기와 독서 모임의 잠재력을 알아보시는 것 같아 힘이 됩니다. 목사님들이 현실과 부딪히지 않는 설교를 하기가 쉽지 않으니, 이런 모임 요청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소설은 다 현실에서 부딪히는 이야기를 하잖아요. 설교가 성도들 현실에 가서 부딪쳐야 하는데, 그 부딪치는 지점이 너무 작은 거예요. 메아리가 약한 거죠.”
-소설이 정말 현실에 잘 부딪치나요. 안 그런 적이 꽤 있어서….
“유명한 소설이 아니라, 내 필요를 채워주는 소설을 읽어야 합니다. 심리 소설 같은 난해한 작품들에서는 아무래도 어렵죠. 아, 요즘 우리나라에서 고등학생들에게 소설을 많이 읽히고 있어요. 청소년들은 삶의 경험이 약하잖아요. 그들에게 현실에서 부닥치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법을 길러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능력은 수업 여러 번 듣는다고 해결되지 않잖아요. 그 상황에 들어가서 주인공이 겪는 일들을 관찰하고 경험하면서 이해하는 시간이 필요하거든요.
대박이 났던 창비의 <아몬드>나 비룡소의 <순례 주택> 같은 청소년 소설들을 읽게 되면, 말씀드린 현실과 부딪치는 ‘접촉점’이 뭔지 단번에 이해하실 것입니다. 10대나 20대 아이들은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습니다.”
-어떤 소설부터 읽으면 좋을까요.
“저는 <노인과 바다(The Old Man and the Sea)>나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처럼 읽으면 딱 이해 되는 소설을 좋아합니다. <분노의 포도>는 1930년대 미국 사람들이 처음으로 대공황을 겪고 농사가 안 되면서 겪는 삶의 실제적 이야기였어요. 그래도 희망을 찾아 캘리포니아까지 갔는데, 거기서는 더 큰 고난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내용을 성경과 견줘 보면, 출애굽과 가나안 정착 과정 같아요. 우리나라에서는 번역본을 두 권으로 분리했는데, 1권이 출애굽이고 2권이 가나안 땅 이야기입니다. 설교자들이 이 소설을 읽는다면, 출애굽기나 가나안 정착 이후 여호수아나 사사기 등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감이 확 잡힐 것입니다.
출애굽기는 우리나라 이야기도 아니고, 몇천 년 전에 일어난 일이잖아요. 설교에서 당시 사람들이 어떤 느낌이었을까를 설명해 줘야 하는데, 설교자들은 주제만 설명해 버립니다. 그러면 와 닿지 않겠죠.
<분노의 포도> 작가 존 스타인벡(John Ernst Steinbeck, 1902-1968)은 소설을 쓰기 위해, 이주민 행렬을 따라 소설 속 내용과 똑같이 걸어갔다고 합니다. 작가는 이주민들의 말과 행동을 관찰하고, 상상과 문장력을 더한 거예요. 그러니 소설이 살아있잖아요. <노인과 바다>도 실제로 쿠바에서 들은 이야기를 메모했다가 2-3주 만에 완성했다고 해요.”
소설 읽기, 재충전에 필요한 도구
‘기도하면 된다’? 이분법적 메시지
삶은 그렇지 않아, 함께 문제 해결
감정적 혼란 겪지 않으려 하지만,
겪어야 성숙해져, 심리적 죽음도
믿음으로 결단, 과정은 순간 아냐
-독서 모임 대상 소설은 직접 정하시나요.
“그렇죠. 목회자들은 아직 소설을 읽은 경험이 적으니, 쉬운 책 위주로 하고 있습니다. 부교역자들까지 한 교회 목회자들과 하는 모임도 있습니다. 설교 준비에 있어 시야를 넓히기 위한 모임이에요.
지난 달에는 <대부>를 읽었습니다. 우리는 늘 이야기해요. ‘기도하면 하나님이 도와주실 거야.’ 그런데 실제 삶의 현장에서는 어떻습니까? 모든 문제가 해결되나요? 직장 끝나고 집에 오면 왜 힘이 쭉 빠질까요? 재충전이 금방 안 돼서 그래요. 그럴 때 기도하면 된다는 생각을, 저는 의심해요. 물리적으로 안 되거든요. 퇴근하고 집에 와서 가장들이 한동안 TV 앞에 앉아있는 것도 그런 이유예요.
저는 소설이 바로 그 재충전에 가장 필요한 도구라고 생각해요. 건강한 재충전, 그리고 번아웃되기 전에 미리 저축하는 것과 같아요. 사역자들에게 방전되기 전 삶을 주기적으로 재충전하는 걸 연습시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설교를 준비할 때뿐 아니라, 성경을 읽고 해석할 때 그리고 사회 모든 이슈를 다루고 해석할 때도 힘이 됩니다.
그런 눈이 생기지 않으면, 모든 것을 이분법적으로 해석하기 쉽습니다. 간단명료하게 ‘기도하면 된다’고 하죠. 지금 그런 메시지가 먹힐까요? 삶의 현장 속에서 기도해도 안 되는 경우가 수두룩하니, 사람들이 왜 ‘사적 복수’라는 콘텐츠에 끌리고 있잖아요? 이를 이해한다면,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바로바로 답을 주시지 않는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겠죠. 이런 눈을 열어주고자 합니다. 모든 것을 단순하게, 이분법적으로, 일방적으로 설명하고 해석하지 않는 것 말입니다.”
-이분법적이 아니라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설명하시는 건가요.
“‘나라면 이렇게 했을 텐데’ 하면서, 함께 문제를 풀어가는 것입니다. 예전에 설교할 때도 똑같이 했습니다. 상황을 설명하고,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해결하겠느냐’고 한 명씩 물어봅니다. 직접 의견을 내보면, 시야가 확 달라집니다.
이것이 소설과 같아요. 작가가 어떤 상황을 만들어놓고 등장인물을 들여보내잖아요. 우리는 제3자 입장에서 관찰하고요. 등장인물이 어떻게 될까 생각하는 것이 사고력이고,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됩니다. 이것이 마사 누스바움이 시카고 로스쿨에서 학생들을 훈련시키는 방식과도 같습니다.
소설은 나의 이야기가 아니지만, 등장인물을 해석할 때 내 감정이 묻어나고, 그 속에서 공감도 생깁니다. 내가 굳이 드러나지 않은 상태에서 깊이 있는 내용으로도 들어갈 수 있어요. 그러면 자연스럽게 자기 이야기도 나누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독서 모임 참석자들이 변화하게 되겠죠.
많은 사람들이 감정적 혼란은 굳이 겪으려 하지 말고, 빠른 길로 곧장 가라고 합니다. 하지만, 사실 감정적 혼란을 겪어봐야 성숙해지는 것 아닙니까. 심리적 죽음도 그런 것이고요. 우리가 믿음으로 결단했지만, 그 과정이 얼마나 힘들었습니까?”
다윗 시에는 자신 희로애락 선명
다른 시에는 하나님 경외만 가득
입체적 인물, ‘믿음’만 보면 아쉬워
다윗 주변 인물 입장에도 서 보라
한국 사회는 ‘모범 답안’만 존재해
소설 통해 다양한 생각 표출·공유
-일반 성도들 독서 모임은 어떤가요.
“2년째 하고 있는데, 제가 이끄는 세 군데 모임 중 수준이 가장 높아요(웃음). 대부분 사람들이 소설을 설명할 때 줄거리를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저는 거의 말하지 않아요. 예를 들어 작가가 첫 장에서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왜 이런 방식으로 썼는지, 왜 이렇게 구성했는지, 언어적으로 어떻게 표현했는지, 작가의 숨은 의도가 어떤 방식으로 전개되고 그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지 등을 살펴봅니다. 이런 부분들이 잘 보이는 소설이 따로 있죠.
저는 다윗이 어떻게 그런 통찰력 있는 글을 시편으로 썼는지 항상 궁금했어요. 다윗은 그 시대에 제대로 된 교육도 하나 받지 못했는데, 어떻게 시편 속에 나온 그런 깊은 사고를 했을까가 미스터리였어요. 제가 시(詩) 전공인데, 시와 소설을 많이 읽다 보니 연결고리가 생겼어요. 다윗과 시편 속에 소설이 들어가니까, 선명하게 과정이 보였어요.
다윗 시에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이 선명해요. 다른 사람들의 시에는 그게 없고, 모두 하나님 경외로 꽉 차 있어요. 시야가 좁은 거죠. 하지만 다윗은 지금으로 말하면 입체적 캐릭터예요. 실수투성이에 심리적 죽음도 경험하고, 착실하지만 때로 즉흥적으로 행동하고, 그러면서도 통찰력 있게 결단하죠.
다윗은 이렇게 참 연구할 내용이 많은데, 그저 ‘믿음의 사람’으로만 설명하는 것이 다소 아쉬웠어요. 다윗이 가진 그 통찰이 어디서 왔는지 조금 더 세밀하게 설명한다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부분이 훨씬 많아질 것입니다.
문학이 주는 힘은, 미갈의 시점으로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책에도 썼지만, 이미 다른 남자와 결혼한 미갈을 다시 데려오잖아요. 지금 시점에서 보면 굉장히 잔인한 행동이죠. 이처럼 설교자들뿐 아니라 일반 성도들도, 위치를 바꿔서 보면 다른 무언가가 보일 것입니다.
우리는 다윗 이야기를 늘 다윗의 시점에서 읽게 되죠. 하나님께서 다윗을 고생시킬 때마다, 다윗은 다른 시점으로 사물을 보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성숙해 가는 모습을 설명해 본다면 어떨까요. 익숙한 길로만 늘 달리지 말고, 가끔은 새 길로 다니면서 풍경을 바라보는 건 어떨까요. 드라마 <미생> 속 ‘서 있는 곳이 달라지면, 풍경도 바뀐다’는 대사처럼요.”
-성경이 읽기 힘든 건 결말을 다 알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린이들에게는 성경 교육을 어떻게 시켜야 하나요.
“굉장히 창조적으로 시킬 수 있습니다. 저는 성경을 다 읽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한 장 읽고 덮으라고 해요. 그 다음 장이 어떻게 진행될지 상상해 보라고 하죠. 그러면 아이들은 상상해 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일방적으로 끝까지 읽기 때문에,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면 진보가 없어요. 소설은 결말을 모르고 읽잖아요. 그러니 추론해 가면서 따라가게 됩니다. 재미가 없으면 덮어버리겠지만, 재미 있다면 어떻게든 끝까지 가면서 그 과정에서 느끼는 점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과정이 필요해요.
그런데 교회에서는 해답을 먼저 찾아 봅니다. 답부터 알게 되면, 생각하고 추론하는 과정이 날아가죠. 독서 모임도 그렇지만, 저는 가르칠 때 답을 절대 가르쳐 주지 않아요. 답을 알려주면, 독서 토론의 의미가 없어요. 성경을 가르칠 때도 답을 가르쳐 주지 않으니 자유롭게 토론하고 스스로 결론을 내립니다.”
-어찌 보면 위험하게 느껴질 수도 있고, 깊이 있게 알고 싶은 이들은 아쉬워할 수도 있을 텐데요.
“마지막에 정리는 해주지만, 깊이 있게 설명하진 않습니다. 그것도 편견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에요. 답을 하나 내려주면, ‘모범 답안’이 돼 버려요. 한국 사회는 모범 답안이 선정되면, 다른 답안들을 다 무시해 버려요. 딱 조선 시대 성리학이 그런 방식이었습니다.
소설을 읽으면서 다양한 생각들이 표출되고 공유돼야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그런 훈련이 되면, 교회에서 갈등이 확 줄어들 것입니다. 하나의 주장에 익숙해지면, 차이를 견디지 못합니다. 불안하거든요.
그런데, 불안한 건 내 안에 콘텐츠가 없기 때문이에요. 내 안에 콘텐츠가 풍부하면, 절대 불안하지 않아요. 그 콘텐츠란 나만의 생각이나 느낌입니다. 실력 있는 운동선수가 막 초조해하는 경우 봤어요? 느긋합니다. 자신을 믿거든요.
내 것이 약하고 남에게 보여줄 만한 나만의 콘텐츠가 없다는 걸, 목회자는 피부로 느끼죠. 매번 자신을 바라보는 수많은 눈동자들을 보면서, 고민하지 않겠습니까? 뭔가 기대하고 와서 앉아있는데, 그걸 충분히 채워주지 못한다면 설교자 자신이 가장 먼저 느끼겠죠. 그런 고민들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소설을 읽는 눈을 배워서 목회에 활용하시라는 것입니다.”
-참 어렵네요.
“성경에 대한 팩트만 설명하는 설교가 많습니다. 하지만 저는 항상 설교자들에게 말씀드립니다. ‘검색해서 나오는 이야기는 절대 하지 말라’고요. 이미 다 알고 있는데, 왜 똑같은 걸 반복해야 하나요?
저는 예전 청년과 군인들에게 설교할 때, 뭐라도 건질 내용을 주고자 했습니다. 신앙이 없는 생짜배기라도 뭔가 건져갈 수 있는 걸 설교에 담고자 노력했어요. 그래서 인기가 좋았습니다(웃음).
성경이라는 서사 자체가 얼마나 풍요로운 콘텐츠인데, 우리는 그걸 너무 활용하지 못하고 있어요. 성경의 전체 서사는 이 세계에서 감해 비교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어요. 이렇게 방대한 서사를 거의 활용하지 못한다는 거죠. 소설을 읽으면서, 그 활용법을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