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읽는 그리스도인> 이정일 목사 (下)
“소설 읽기는 새로운 생각과 부드러운 감성이 싹을 틔울 토양을 만드는 작업이고, 세상을 감지하는 더듬이 하나를 더 갖는 일이다. 소설은 우리가 날마다 직면하는 고된 일상에 위로를 주는 동시에 자신과 타인이 살아가는 삶의 맥락을 깊이 들여다보게 만든다. 그래서 소설을 읽을수록 우리의 시야는 넓어지고 삶은 풍성해질 뿐 아니라 나를 둘러싼 세계와 하나님에 관한 계시에도 눈을 뜨게 하는 것이다.”
이정일 목사는 <소설 읽는 그리스도인>에서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작가를 우리 곁에 보내신 이유에 대해 “‘내가 원하지 않는 나’가 되거나 ‘다른 사람이 원하는 나’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인생은 한 번이어서 실수를 피하기 어렵기에, 하나님께서는 작가를 우리 곁에 보내 인생을 후회로 채울 여지를 줄이신다는 것이다.
소설은 결과가 나빴어도 그걸 경험이 되게 하고, 실패를 교훈 삼아 우리가 자신을 성찰하도록 도와준다.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는 겸손과 인간다움을 배우고, 동시에 내 안의 어둠과 그늘을 보게 된다. 이를 통해 문해력이 좋아지면, 성경을 읽을 때 들려오는 하나님 음성을 정확히 들을 수 있다. 전편에 이은 이정일 목사의 소설과 신앙 이야기.
모세, 믿음의 결단과 헌신만 생각
미디안 광야 속 성숙의 과정 거쳐
소설 등장인물, 심리적 죽음 통과
문제 해결 하는 동안 혼란들 겪어
소설 도입과 전개 내내 나오는 것
그 눈으로 읽으면 깊은 세계 열려
-소설의 재미에 빠지면, 성경을 더 놓아버릴 것 같은데요.
“소설 <데미지>와 성경 속 다윗에 대한 내용을 함께 읽을 때 보이는 풍경이 있잖아요. 소설을 읽으면서, 가끔씩은 그런 상상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모세를 항상 믿음으로 결단하고 하나님께 헌신한 사람으로만 이해합니다. 하지만 미디안 광야에서의 모세는 어땠을까요? 장인 집에 거주하던 모세는 들녘에 나가 양들을 돌봤겠죠. 하루종일 말할 상대도 없었을 것입니다.
한때 파라오의 왕자로서 천하를 호령하던 사람이 초라한 모습으로 양을 지킬 때, 그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하나님은 분명 계신 것 같은데, 그 하나님 뜻에 헌신하려 했지만 아무도 자신을 신뢰하지 않았던 그때를 생각하면서, 어떤 생각들을 했을까요?
우리는 이런 부분을 고민하지 않고, 항상 홍해를 가르는 모세만을 생각합니다. 홍해를 가르는 모세가 있으려면, 그 많은 일들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해진 모세가 필요하겠죠. 그 성숙해진 모세가 태어나기까지의 시기를 우리는 생각하지 않아요.
소설이 바로 그 시기에 대한 이해를 도와줍니다. 소설 속 등장인물은 어느 순간 ‘심리적 죽음’을 통과하면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동안 혼란을 겪습니다. 소설의 도입과 전개 내내 나오는 내용이죠. 그 과정을 이해하면, 왜 사람이 저런 실수를 하는지 눈이 확 열립니다.
그런 눈으로 야곱도 모세도 다윗도 이해한다면, 깊이 있는 세계가 열리겠죠. 그런 차원에서, 소설은 성경 읽기를 위한 너무나 좋은 도구입니다.”
-성경을 위한 소설 읽기네요.
“성경 자체도 4분의 1이 문학입니다. 성경을 해석할 때 문학적 기법을 활용하지만, 우리 삶 자체도 이야기가 중심이잖아요. TV 드라마나 영화, 넷플릭스 같은 OTT 작품들 모두가 이야기 중심이고, 광고도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는 스토리텔링 기법을 사용하죠. ‘이야기’는 오랜 세월 우리와 함께했지만, 그간 눈여겨보지 않았을 뿐입니다.
문해력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어떤 이야기를 드러내실 때 그 과정이 눈에 띕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이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고 합니다(창 21:33). ‘영원’이란 개념이 역사 속에서 인간의 머릿속에 처음으로 떠오른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100년도 못 사는 인간이 ‘영원’ 개념을 한순간 떠올렸어요.
이건 어마어마한 생각의 도약이죠. 마치 마르셀 뒤샹이 소변기를 가져다 사인한 뒤 작품으로 내놓은 것과 같은 정도입니다. 우리에게 문학적 눈과 문해력이 생긴다면, 성경을 읽다 그런 부분들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리고성을 매일 한 바퀴씩 일곱 바퀴 돌라고 하셨어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왜 도는지를 모르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가나안 땅에 정착하기 전 미리 훈련시키신 것입니다. 일주일째 성이 무너지는데, 이를 문학으로 비유하면 ‘허구’의 힘입니다. 경제로 비유하면 ‘신뢰’의 힘이고요.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150년 전 소설이 본격 태동했습니다. 사람들이 허구를 이해하는 힘이 생겼어요. 보이지 않는 허구의 힘이 탄탄하면, 그 위에 보이는 세계가 딱 얹힙니다. 보이는 현실을 뒷받침하는 보이지 않는 허구를 보는 눈이 없다면, 그 사회는 설 자리가 없어요. 눈에 보이는 것만 쫓아다니면, 물물거래밖에 할 수 없습니다.
서양이 동양을 압도할 수 있었던 근원도 ‘허구’에 대한 이해에 있었어요. 1615년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를 쓰고 나서 한 세기 만에 영국에서 소설이라는 장르가 확 일어나는데, 그때부터 영국이 전 세계의 주도권을 잡은 것입니다.”
안 보이는 허구, 보이는 현실 받쳐
서양의 동양 압도, 허구 이해 통해
이상한 작품, 굳이 읽을 필요 없어
‘벤허’처럼 좋은 작품들부터 읽길
성경은 보물단지, 이야기 재미있어
어마어마한 관점들 뽑아낼 수 있어
-이게 이렇게 확장되네요.
“중국에서는 2000년대 초까지 허무맹랑한 이야기라는 이유로 SF소설을 금기시했어요. 그래놓고 미국을 따라잡겠다고 했지만, 어떻게 됐나요? 상상은 자유로움에서 나오는데, 요즘엔 그쪽 작품들에서 그런 유연함을 찾아보기 힘들어졌죠.
문학가들도 ‘자기 검열’을 합니다. 위화의 소설을 읽어보면, 어느 순간 딱 멈추는 것이 느껴집니다. 이 선을 넘어가면 통제받는다는 걸 작가가 무의식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그러니 작가가 어느 정도 묘사를 하다 딱 끝내요. 우리나라는 그런 게 없이 자유롭죠. 한국 영화나 소설에서는 그런 자유로움이 나오죠.
하지만 동성애 등 장르에 따라 지나치게 선을 넘는 이야기들도 있죠. 하지만 우리는 기본적으로 크리스천으로서 상식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어야겠죠. 가끔 ‘굉장히 이상한 문학 작품들도 읽어야 하느냐?’는 질문을 받아요. 좋은 작품들이 이렇게 많은데, 그런 작품들을 왜 읽겠어요? <벤허> 같은 소설, 얼마나 좋아요?
우리는 다양한 시선으로 사건을 바라보는 경험이 많지 않은데, 소설과 문학은 그걸 훈련시켜 줍니다.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보이는 풍경도 분명하지만, 주인공 아닌 조연이나 여러 등장인물들의 눈으로 비친 세계도 있죠. 그 세계가 어떨지 상상하면 새로운 차원이 열립니다.
성경의 ‘룻기’가 그런 ‘마이너 캐릭터’를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의지할 것 하나 없는 사람의 눈으로 본 그 시대의 모습이 나오죠. 그러면 사사기 속 혼란들도 이해할 수 있고, 그 다음 세계도 이해할 수 있어요. 다음엔 이새의 아들, 다윗이 새로운 길을 열어줍니다. 이렇듯 문학의 눈으로 보면, 성경 속에 기가 막힌 작품들이 많고 너무 재미있어요.”
-소설은 ①나는 누구인가 ②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③어떻게 죽을 것인가 3가지를 알려준다고 하셨습니다. 성경은 어떤가요.
“성경도 똑같죠. 성경도 내가 누구인지, 자아에 대해 항상 고민하고 물어요. 그리고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것인지 고민하게 합니다. 마지막에는 하나님 앞에 어떻게 설 것인가를 생각하게 하죠. 그 마지막 모습을 요한계시록이 보여줍니다.
드라마를 보면, 등장인물이 실수할 때가 있습니다. 양심의 가책이 있지만, 그 실수를 살짝 덮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등장인물은 그런 갈등 속에 고뇌하는데, 우리 크리스천들은 그냥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모든 걸 맡겨버려요.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하면서.
저는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 밖으로 내치신 이유 중 하나로, 그런 고민을 직접 해보라고 하신 거라고 봅니다. 선택에 대한 결과를 어떻게 책임져야 하는지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고민 대신, ‘죄’라는 개념 하나로 싹 밀어버리고 맙니다.
아담과 하와가 인생을 살면서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까요? 아이들을 낳았는데, 둘이 서로 죽고 죽였잖아요. 그런 고민들에 대한 이해가 우리에게 필요해요. 아담은 그렇게 고민하고 갈등하면서 하나님을 새롭게 이해하지 않았을까요? 에덴동산에 살 때는 고민할 게 없었어요. 그러나 거기서 과연 성장할 수 있었을까요?
에덴동산 안에서 아담은 천사 같았어요. 모든 것이 완벽하고, 아무런 고민이 없었죠. 하지만 성장도 하지 못했겠죠. 그런 아담이 에덴동산을 나오는 순간, 고민을 시작합니다. 뭐 하나 되는 일이 없거든요. 뜻대로 되는 것도 없죠. 그런 상태에서의 깨달음들이 우리를 성장시키는 것이고, 소설이 바로 그것을 보여줍니다.
소설에서 주인공들은 실패하죠. 성공하는 사람들은 소설에서 전혀 다뤄지지 않아요. 아담처럼 100% 실패한 사람들만 다룹니다. 그런 걸 이해하고 나면, 성경이 기가 막힙니다. 우리가 성경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거예요. 성경은 보물단지입니다.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고, 그 속에서 어마어마한 관점들을 뽑아낼 수 있어요.”
-끝으로 독자들에게 해주실 말씀이 있다면.
“목회자들에게 쉼이 꼭 나쁜 것은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한국 목회자들은 너무 부지런하고, 모든 일을 완벽하게 해내고 싶어해요. 그런데 어떤 깊은 깨달음은, 바쁠 때보단 조금 여유로울 때 나와요. 쉬는 시간은 그냥 노는 시간이 아니라, 생각이 도약할 수 있는 순간입니다.
길지 않아도 그런 규칙적인 쉼의 시간을 반드시 확보하시길 바랍니다. 일주일에 반나절이라도 생각의 시간을 가지시면 좋겠습니다. 스마트폰 없이, 소설도 전체를 읽는 것이 아니라 한 챕터만이라도 꼼꼼하게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소설을 잘 읽는다는 것은 전체를 읽고 내용을 잘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그중 한 장면에서 어떤 느낌을 받는 거예요. 그 느낌이 섬세해지면 성경 말씀 속에 담긴 하나님의 모습들이 눈에 팍팍 들어옵니다. 우리 교회 목사님 설교가 깊어지길 원한다면, 성도님들이 그런 시간을 부여해 주셔야 합니다.
제가 소설이나 시를 읽고 있으면, 사람들은 노는 줄 알아요. 신학교 때도 그랬어요. 하지만 그게 아니라, 하나님 말씀을 캐기 위해 준비하는 워밍업의 시간입니다. 요즘 말로, 쉬는 게 아니라 깊어지는 중입니다(웃음).
그리고 독서 모임 때마다 읽은 책을 바로 써먹으려고 하지 말라고 말씀드려요. 제가 지금 쓰는 글은 최근에 읽은 것들에서가 아니라, 10-20년 전에 정리해 놓은 것들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럴수록 깊은 사고가 나와요. 하지만 우리는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금방금방 올리는데 익숙해졌죠. 하지만 깊어지는 시간이 없어집니다. 그리고 10개 준비해서 6-7개를 쓰려고 해선 안 됩니다. 많은 경우의 수를 갖고 여유 있게 준비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