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에 ‘어진’ 그린 스타 작가, 민족 구원 소망 담은 ‘부활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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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록, 한 점의 그림] 이당 김은호

작품 제작도 3.1운동 수감 출옥후
십자가 따라갈 때 부활 있단 소망
단순한 신앙 고양 위한 작품 아냐
작가 개인 넘어 민족적 신앙 승화

▲3.1운동 직후 민족의 부활 신앙을 담은 이당 김은호의 ‘부활 후’, 미국 프레밍출판사에서 발간한 ‘Each with his Own(1938)’에 실렸던 그림 사진. 작품은 6.25 때 소실됐다.
▲3.1운동 직후 민족의 부활 신앙을 담은 이당 김은호의 ‘부활 후’, 미국 프레밍출판사에서 발간한 ‘Each with his Own(1938)’에 실렸던 그림 사진. 작품은 6.25 때 소실됐다.

이당 김은호(1892-1979)는 화조·신선·산수에 뛰어났지만, 그중에서도 주요 분야는 인물화였다. 이를테면 1921년 서화협회전에는 ‘축접미인’을 출품했고, 1922년 조선미전에는 ‘미인승무’를 출품해 4등상을 받는 등 인물화 분야에서 그의 존재감은 뚜렷했다.

이 밖에 김은호는 유명 인사의 초상을 비롯해 외출한 여인, 달빛 아래의 여인, 단장한 신부, 나물을 깨는 소녀들, 장구를 치는 여인 등을 단아한 색상과 섬세한 필치로 묘출하기도 했다.

그의 인물화 중에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조선미전’에 부활한 그리스도를 주제로 한 작품을 출품했다는 사실이다. 그가 종교적 작품을 제작한 것은 기독교 신앙과 연관이 있다.

김은호는 청소년 시절부터 안동교회에 출석했고, 교회에서 발간되는 주보 작성을 도맡을 만큼 봉사에도 적극적이었다. 인천에서 서울 계동으로 이사온 것이 17세 즉 1909년이니 계동 정착 이후부터 교회에 출석했다고 추정할 수 있고, 안동교회 이주완 장로가 운영하던 영풍서관에서 고서 필사를 시작한 것이 1912년이므로 청년 시절부터 교회 출석을 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던 중 영풍서관 단골손님 김교성과 현채의 눈에 띄어 동양화 아카데미 서화미술회 화과(畫科) 2기생 반에 편입하게 됐으니, 그의 삶에서 기독교가 갖는 의미는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서화미술회 교수 안중식과 조선진에게 사사를 받은 후 그의 실력은 커다란 진척을 보였다. 이당의 천재성은 겨우 스무 살에 어진(御眞)을 그리게 된 것에서 보듯, 일찍이 스타성을 입증했다.

김은호는 이어 1924년 조선미전에 출품한 <부활 후>로 3등상을 수상했다. 당시에는 기독교 신앙과 관련된 작품을 출품하는 작가가 흔치 않던 시절이었는데, 김은호가 부활하신 예수님 좌우편으로 베드로와 야고보를, 어머니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를 주인공으로 한 3폭 병풍 그림을 그린 것이다.

이 그림에선 작가가 모필과 채색을 한 것 외에는 등장인물들을 서구적으로 표현했다. 토가를 입은 예수님은 손을 펼쳐들고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있는데, 손에는 성흔(stigmata), 즉 십자가에 달리신 못 자국이 새겨져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은 6.25 전쟁 때 소실되는 바람에 서울기독교청년회 총무 전택부의 요청으로 1960년대 초 재제작됐다. 작품 원작이 없어 미국 다니엘 플레밍(Daniel J. Fleming)이 발간한 작품집 ‘Each with His Own Bruch(1938)’에 실린 도판을 참고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후속작 <부활 후>(1962, 서울 YMCA 소장)를 보면, 양쪽에 배치됐던 인물들을 분리시키고 그리스도만을 화면에 위치시켰다. 예수 그리스도는 역시 전작과 마찬가지로 토가를 착용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신성을 나타내기 위해 인물 뒤에 후광을 넣었다.

이전 그림과의 차이점이 있다면 배경의 드라마틱한 명암대비를 줄이는 대신 바탕을 곱게 선염 처리를 했다는 것과, 옷 주름을 세필로 표현한 조형적 특징을 포착할 수 있다. 인물 표현과 옷차림에 있어 원작보다 훨씬 간결하면서도 자연스럽게 묘출하였다. 특히 1962년 작품의 경우 전통채색을 바탕으로 한 맑고 투명한 색의 구사가 이채롭다.

우리는 이 작품을 ‘그리스도의 부활’을 주제로 한 것으로 풀이해 왔다. 신앙을 지닌 화가가 예수님의 부활을 그렸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는 다른 의미가 숨겨져 있다. 마음 둘 곳을 잃어버린 우리 민족에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는 점이 필자의 생각이다.

이 그림을 제작하기 몇 년 전, 그는 혹독한 시련을 치렀다. 청년 김은호는 3.1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문을 직접 등사하고 태극기를 그려 목이 터져라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다녔다. 그때 일경에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형을 받고 홍의(紅衣)의 기결수가 되었다.

외아들 김성원 씨에 따르면, 부친은 “8번에 걸친 고문으로 사경을 헤매다 각혈과 피를 토하며 반죽음 상태로 석방되어 평생을 고문으로 얻은 병으로 고생했다”고 말했다.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을 때 병고로 형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가출옥해 1920년 2월 형기 만료처분을 받은 것도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김성원 씨는 부친이 그림을 팔아 비밀리에 독립군 자금을 대줬다고 밝히기도 했다. 김은호가 3.1 만세운동 시위로 형무소에 구금되었을 때 민족 지도자 길선주·최남선·한용운 등이 건너편 방에 있었고, 본인은 민족대표 33인의 한 분이었던 신석구 목사와 같이 있었는데, 그의 자서전에는 “감방에서 신 목사에게 성서와 한문을 배웠다”고 회고했다.

이때 김은호는 독립과 해방을 위해서라면 어떤 고난이라도 감수하려는 의지로 불타는 신석구 목사로부터, 그리스도인의 역사적인 책임과 민족 구원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작품이 제작된 시점도 평범하지 않다. 1924년이라면 그가 감옥에서 출옥하고 어느 정도 건강도 회복했을 시점이다. 여러 가지 주제를 놓아두고 그가 굳이 예수님의 <부활 후>라는 테마를 택한 데는 민족 구원의 희망이 십자가의 복음에 있다는 확신이 섰기 때문이리라. 지금은 비록 고난을 받고 있지만, 십자가의 길을 따라갈 때 부활의 기쁨을 맞이할 수 있다는 소망이 작품에 깔려 있다는 말이다.

일각에서는 이 작품 도상이 불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즉 예수의 포즈는 아미타불에서 온 것이며, 특히 손동작은 불상의 수인(手印)에서 비롯됐다고 말한다. 코스튬도 불교의 장삼과 가사로 풀이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부활 후> 도상의 손동작은 ‘시무외인’, ‘여원인’와 다르다. 불상 손바닥이 그저 편 것에 불과하다면, <부활 후>의 손은 뚜렷한 지향성을 지닌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른손 검지로 하늘을 가리키고 있고 왼손은 내린 것이 아니라 올린 상태에서 며칠 전에 있었던 십자가의 고난을 상기시키고 있다. 코스튬도 장삼가사가 아니라 로마 시대의 토가 복장으로, 이탈리아 고전 미술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 그림을 단순히 신앙을 고양시키는 경건한 그림으로 분류하는 것은 신중을 요한다. 그 이유는 이 작품이 발표된 시점과 연관돼 있다. 즉 이 작품은 3.1운동이 좌절돼 국민 대다수가 실의에 빠져 있던 시기에 발표되었다.

김은호 자신도 처참한 현실을 어떻게 타개해 나갈 수 있을지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작가가 부활의 메시지를 통해 소망의 메시지를 던지려 했다는 추론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의 기독교 신앙이 개인 차원을 넘어 나라의 존망을 걱정하고, 이집트·바벨론 유수 당시의 이스라엘이 그러했듯 구원을 소망하는 민족 신앙으로 승화됐음을 알려주는 명확한 표지이다.

서성록 명예교수
안동대 미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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