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세대 다시 보기 27] 부모교육, 부모다운 부모로 성장하기 (1)
부모 역할 하지 않으면 직무유기
자녀는 하나님의 선물이자 기업
부모가 언젠가 놓아줘야 할 화살
친구 같은 아닌, 부모 같은 부모
#처음부터 친구 같으면, 자녀교육 망친다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 물론 부모 자식 사이는 이기고 지는 싸움은 아니다. 그러나 가끔 너무한다 싶을 때도 있다. 종종 마트에서 볼 수 있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아이들 그리고 땀을 뻘뻘 흘리는 부모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자녀가 고집을 부리면 뭐든 다 해주는 부모들을 보게 된다. 필자가 그런 부모님들에게 살짝 말한다. “거절을 조금 하시면 좋겠어요.” 겸연쩍게 웃으면서 말씀하신다. “아는데, 그게 잘 안 되네요.”
언젠가부터 ‘친구 같은 부모가 되어 주자’는 말이 입에 자주 오르내린다. 무슨 뜻인지는 알겠다. 유독 권위적인 우리 사회에서 부모만은 공감과 소통의 관계가 되자는 말이다. 좋은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한 번 더 깊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친구 같은 부모, 그게 정말 우리 아이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칠까? 성경적으로 올바른 자녀 양육법일까?
필자는 강력하게 반대한다. ‘친구 같은 부모 되면, 자녀교육 망한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처음부터’ 친구 같으면 안 된다.
필자의 경우 부모님과 친구처럼 지낸다. 솔직히 어투도 반존대이다. “아빠 엄마! 식사는 드셨어?” 장난도 많이 치는 편이고, 전화도 자주 한다. 대화만 들으면 그냥 친구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런 관계였나고 묻는다면, 절대 아니다.
그 시절, 대부분의 부모님이 그렇듯 필자의 부모님 역시 자녀교육에 무척이나 엄격하셨다. 물론 시도 때도 없이 울어버리는 필자의 여린 감수성(?) 덕분에 안 맞아도 되는 것까지 맞으면서 자라긴 했다. 그렇게 맞으면서, 필자는 단 한 번도 부모님을 친구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우리에게는 지켜야 할 선이 있었다. 당시 필자의 부모님은 어른들을 모시고 살았다. 특히 필자는 할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인물이었다. 생각해 보라. 아버지의 아버지, 어머니의 시아버지를 등에 입은 저 버릇없는 아이를.
그러나 필자는 버릇 없게 굴 수 없었다. 선을 넘는 그날은 반드시 매타작이 벌어지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예의가 무엇인지를 알게 됐다.
부모님 역시 부모로서의 선을 잘 지켰다. 필자의 기억으로 공부를 강요받아본 기억이 없다. 고등학교 선택 시절, 어느 고등학교에 입학할지도 필자가 선택했다.
대학도 마찬가지다. 부모님은 ‘네가 가고 싶은 대학 한 곳을 정해 오라’고 했다. 성적에 맞춘 대학은 허용되지 않았다. 그리고 딱 대학교 졸업까지만 학비를 책임져 주셨다. 선택은 오롯이 자녀의 몫이었다.
부모는 부모로서, 자녀는 자녀로서 삶을 살았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 어느 순간 돌아보니 그 선이 희미해졌다. 희미해졌으나 여전히 서로가 서로를 존중했다. 그때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었다.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인물 중 한 분은 손웅정 씨다. 졸작들을 저술하면서도 손웅정 씨의 책은 유독 많이 인용했고, 강의를 나갈 때마다 이야기한다. 이번에 새롭게 출간한 《나는 읽고 쓰고 버린다》에서 손웅정 씨는 자녀교육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흔히들 자식에게 친구 같은 부모가 되어 줘야 한다고들 하는데 저는요, 그거 직무유기라고 봐요. 어떻게 친구 같은 부모가 존재할 수 있겠어요? 보세요. 애하고 나하고 친구야. 근데 애가 습관적으로 뭘 좀 잘못해서 고쳐야 할 부분이 있어. 근데 친구끼리 그게 돼요? 아니, 못 고쳐. 친구가 지적은 할 수 있어도 안 되는 건 안 된다고 끝끝내 말해줄 수 있는 건 부모뿐이라고요.”
하나님께서는 부모를 친구로 부르지 않으셨다. 부모에게는 부모의 역할이 있다. 그 역할을 하지 않는 것은 ‘직무유기’가 맞다. 손웅정 씨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나님은 부모에게 ‘권위’를 주셨다
‘직무유기’ 하지 않기 위해서는 일단 자녀에 대한 정확한 성경적 이해가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녀는 어떤 의미일까? 성경은 자녀에 대한 많은 언급들이 있는데, 세 가지 정도를 기억하면 좋겠다.
첫째, 자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야곱과 에서가 만났다. 그때 야곱이 자신의 식솔들을 소개하며 말한다. “하나님이 나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들입니다(창 33:5, 현대인).” 은혜란 값 없이 받아 누리는 선물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자녀는 하나님의 은혜다. 즉 자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 없이 주신 선물이다.
요즘 불임과 난임이 문제다. 현대인의 바쁜 생활과 나쁜 식습관, 더하여 여러 가지 환경적인 문제로 갈수록 불임과 난임이 증가하고 있다. 작년 5월 25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발표한 불임과 난임 시술 현황 분석 결과에 따르면, 최근 5년 새 불임 치료와 난임 시술 진료비는 각각 96.5%(연평균 18.4%), 68%(연평균 13.9%) 증가했다고 한다.
무슨 뜻인가? 자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안 된다. 기억하자. 자녀는 부모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
둘째, 자녀는 하나님께서 부모에게 맡겨주신 ‘기업’이다.
시편 기자는 자녀를 ‘기업’으로 표현한다.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시 127:3, 개역개정)”. 기업에는 철학이 있고, 철학에 따라 기업이 운영된다. 주먹구구식으로 운영하는 기업은 없다.
자식도 마찬가지다. 자식이 하나님의 기업임을 인정한다면, 우리가 지켜야 할 철학이 있다. 즉 성경적 가치에 따른 양육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더불어 NIB 성경은 ‘기업’이라는 부분을 ‘유산(heritage)’으로 번역한다. 유산은 내가 무엇을 잘 해서 받은 것이 아니다. 나의 공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결국 자녀교육은 성경적 가치 위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의미한다.
셋째, 자녀는 부모가 놓아주어야 하는 ‘화살’이다.
시편 127편은 부모는 화살통, 자녀는 화살에 비유한다. 하나님께서 멋진 화살을 만들어 화살통에 넣어주신 것이다. 때가 되면 화살은 화살통을 떠나야 한다. 목표를 향해 날아가야 한다.
부모는 자식들이 날아갈 그 순간까지 잠시 보호하는 것이다. 때가 되면 날아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평생 화살통에 넣어두겠다는 것은 화살을 만든 장인을 비웃는 것이며, 화살에게도 본래의 목적과 의미를 상실하게 만드는 것이다.
자녀교육에서의 핵심은 친구 같은 부모가 아니다. 핵심은 하나님께서 왜 자녀를 우리에게 보내주셨는지, 더불어 그런 자녀를 어떻게 성경적으로 키울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힘들고 어렵지만 그런 고민을 교육에 녹여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부모는 부모의 사명을 다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사명의 길에서 언젠가 자녀와 둘도 없는 친구도 될 수 있다. 잊지 말자. 친구 같은 부모 말고, 부모 같은 부모가 먼저다!
김정준 목사
울산대흥교회 교육목사
영남신학대학교 신학과·신학대학원
전남대학교 대학원 문학 석사
한남대학교 대학원 박사 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