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세대와 개혁교회 3] 바람직한 개혁교회상
3. 바람직한 개혁교회상
1) 개혁주의 신학원리가 적용된 개혁교회
개혁주의, 이성 한계 극복 신학
5백 년 걸쳐 형성된 거대한 체계
잘못 발견되면 언제나 수정 자세
이론·지식 넘어 삶으로 드러내야
설교만 개혁주의 신학 기초하고,
예배와 성례, 직분은 복음주의?
진정한 개혁교회, 교회 이루는
실제 원리 적용·실천되는 교회
건축을 위해서는 설계도가 필수적이다. 개혁교회의 설계도는 성경이다. 무엇이 성경적인가 하는 것은 각자가 가진 신학에 따라 이해된다.
여러 신학사조 중 굳이 개혁주의 신학을 지향하는 이유는 개혁주의 신학이야말로 인간 이성의 한계를 알고 극복할 수 있는 신학이기 때문이다.
우리 이성은 오류가 많고, 의지가 수용한 것은 옳다고 증명하는 충실한 하인 역할을 감당한다. 이로 인해 오류 없는 신학함(Doing Theology)은 이 세상에서는 불가능하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최선의 방법은 인간의 부패와 타락을 인정하고, 끊임없이 성경적으로 개혁해 가는 길이다. 개혁주의 신학이 그것이다.
개혁신학은 한 세대 안에 만들어진 한 개인의 신학 체계가 아니다. 종교개혁 이후 5백여 년에 걸쳐 형성된 거대한 신학 체계이며, 하나님의 구속 역사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맥을 같이해 온, 가장 성경적인 신학이다.
개혁주의는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진리 체계이며 성경이 절대 기준이 되는 신학이기에, 성경에 비추어 잘못된 것이 발견될 때는 언제나 수정할 자세를 갖는다. 우리가 개혁주의 신학을 지향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개혁주의 신학은 이론과 지식만으로가 아닌 삶으로 드러내야 하며, 교회를 세우는 실천 원리로 삼아야 한다. 설교는 물론 예배와 성례 시행, 직분자 선출 등 교회를 구성하는 모든 면에서 실천 원리로 작동되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한국교계 안에 개혁신학을 배움과 연구의 대상으로는 여기지만, 현실성 없는 신학으로 여김으로 교회를 세우는 실천 원리로 적용하지 않는 이들이 있다. 개혁신학을 입술로만 외칠 뿐, 일상에서 그리고 목회 현장에서 실천 원리로 적용하지 않는 것이다. 한국교회에서 개혁주의 신학이 환영받지 못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이것이다.
개혁교회는 개혁주의 신학에 근거하여 교회를 건설해야 한다. 개혁주의 신학에 기초한 교리를 기반으로 하지 않는 교회는 개혁교회라 할 수 없다. 교리는 털실로 만든 인형 속에 있는 철사 골격과 같고, 건물의 기초나 골조와도 같다. 교리 없는 교회는 뼈대 없는 연체동물처럼 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집인 교회는 반드시 교리적 기초와 뼈대 위에 세워져야 하는데, 그것은 개혁주의 교리여야 한다. 개혁교회는 이 기초 위에 말씀과 성례와 권징을 올바로 시행하는 것은 물론, 직분과 교회 정치 등 교회를 이루는 전반적인 면에서도 개혁교회의 모습을 이루도록 해야 한다.
어떤 교회는 설교는 개혁주의 신학에 기초하여 선포되지만, 예배와 성례와 직분에 있어서는 현대 복음주의 교회와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인다. 이런 교회는 ‘개혁교회’라 말하기 어렵다. 설교는 물론 예배와 성례와 직분과 교회 질서 등 모든 면에서 개혁신학에 기초한 틀을 가지고 있어야 명실상부한 개혁교회라 할 수 있다.
요약하자면 개혁주의 신학이 교회를 이루어가는 실제 원리로 적용되고 실천되는 교회라야 진정한 의미에서의 개혁교회라 할 수 있다.
개혁교회의 틀을 처음부터 완벽하게 갖추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하나님께서도 한 번에 모든 세계를 만드실 수 있었지만, 6일 동안에 걸쳐 이 세상을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좋은 상태로 만드셨다. 개혁교회를 건설하는 일도 이런 방식을 따라야 한다.
그럼에도 개혁교회에 대한 이해가 너무 엄격한 이들은 처음부터 완벽한 틀을 만들고 교회를 그 틀에 맞추려고 한다. 그러나 어떤 보조 장치도 사용하지 않고서 온전한 교회를 세울 수는 없다.
아이가 기어 다니면서 다리에 힘을 키우고 그런 다음에는 가구나 물건을 붙잡고 일어서고 넘어지기를 반복하면서 걷게 되는 것처럼, 교회를 세워가는 과정도 이러해야 한다. 건축자가 건물을 지을 때 먼저 비계를 설치하고 작업을 마친 다음에 비계를 걷어낸다. 개혁교회를 건설하는 과정에도 이와 같아야 한다.
2) 정체성과 상관성의 균형을 이루는 교회
거룩성·보편성, 정체성·상관성
한쪽만 강조 아닌 균형 이뤄야
16세기 종교개혁 시대 전통·틀
21세기 모범, 최종 권위 아냐
현 시대 상황만 고려해서도 X
시대정신·문화 알고, 개혁신학
원리 상황과 형편 맞게 적용을
비본질적 차이, 교제 속 수용
교회는 정체성과 상관성 이 두 요소 중 어느 하나만 강조해서는 안 되고, 둘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도록 해야 한다. 교회의 거룩성을 위하여 교회 문턱을 지나치게 높이면, 세상을 구원하는 기관이 될 수 없다. 상관성을 중시한 나머지 세상과 소통하는 데 지나친 주의를 기울여도 동일한 결과를 얻게 된다. 따라서 개혁교회는 거룩성과 보편성, 정체성과 상관성의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16세기 개혁교회 전통과 틀, 그리고 서구 개혁교회가 가진 질서를 따르지 않으면 개혁교회가 아니다”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개혁교회’는 말 그대로 ‘끊임없이 개혁하는 교회(Ecclesia reformata est semper reformanda)’다. 이 말은 종교개혁 시대의 전통과 틀이 21세기 교회가 본받아야 할 모범이 될 수는 있으나 최종적 권위를 가질 수는 없다는 말이다.
개혁주의 전통의 정신은 고려해야 하겠지만, 개혁교회의 전통을 그대로 따른다고 당장 개혁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다. 물론 현 시대 상황과 형편을 너무 헤아린 나머지 종교개혁의 전통과 틀이 가져다주는 유익을 전혀 누리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16세기 종교개혁 시대가 아닌,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다. 그것도 한국 사회 속에 살고 있다. 따라서 개혁교회의 전통을 외형적으로 무조건 따르기보다, 개혁자들이 예전과 질서를 만들었던 이유와 동기를 고민하는 동시에,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정신과 문화를 알고 개혁신학의 원리를 지교회 상황과 형편에 맞게 적용해야 한다.
예배와 성례와 권징과 교회 정치 등 모든 면에서 개혁주의 전통과 원리를 따른다 할지라도, 국소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자세와 태도가 필요하다.
교회 역사는 교리와 실천에 있어 얼마나 위대하고 다양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따라서 신학을 교회에 적용할 때는 신학적 안목만이 아니라 교회사적인 안목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개혁교회는 일반 찬송가가 아닌 시편찬송만 불러야 하며 그것도 무반주로 불러야 한다거나, 성찬 전에는 반드시 가정 심방을 해야만 한다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종교개혁자들이 이 시대에 무덤에서 다시 살아 나와도 16-17세기 교회의 전통과 틀을 그대로 적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반드시 현대성을 고려해야 한다. 조엘 비키, R. C. 스프롤, 데인 C. 오틀런드와 같은 서구 개혁주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저술한 책들이 많이 팔리는 이유가 이에 대한 고려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복음의 본질과 관련되지 않는 비본질적인 차이들은 보다 넓은 교제 안에서 수용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진리에 대한 명확한 이해와 아울러,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을 분별해야 한다.
개혁주의 신학을 지향하는 이들 중 개혁교회의 기준에 대하여 엄격한 입장을 취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다소 느슨한 입장을 취하는 이들도 있다. 어떤 이들은 너무 높은 기준을, 어떤 이들은 너무 낮은 기준을 가지고 있다.
교회에 대해 너무 낮은 이상을 가지게 되면 거룩성을 상실하게 되어 교회인지 세상인지 구분되지 않는 상황에 처하게 될 확률이 많고, 너무 높은 이상을 취하게 되면 보편교회와도 분리되고 세상과도 단절된 외딴 섬 같은 교회가 될 가능성이 많다.
최덕수 목사(현산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