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세대와 개혁교회 4] 바람직한 개혁교회상 (2)
3. 바람직한 개혁교회상
개혁 칼날, 상대방 찌르는 데 사용
비평가·저격수가 개혁하는 것 아냐
동지를 적으로 규정, 덤벼선 안 돼
머리만 커선 안 돼, 마음 넓어져야
신학적 균형감각+성숙한 신앙인격
3) 성숙한 신앙인격
개혁주의 신학이 전파되면서 다양한 신학 주제들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자기주장을 펼치는 이들이 많아졌다. 문제는 신학을 입술로만 진술하고 삶으로는 부인하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점점 세속화되어 가는 기독교계의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비성경적이고 인간 중심적인 한국교회의 세속화 현상을 매섭게 비판하는 일로 자기를 증명하려 한다. 개혁의 칼날을 시퍼렇게 갈아서, 상대를 찌르기만 하는 것이다.
이들은 수술 부위를 찢기만 하고 꿰매지는 못하는 의사와 같다. 안타까운 일은 개혁주의자로 자처하는 이들 중 상당수가 극단으로 치우쳐 있고, 따뜻하고 너그럽기보다 비장하고 엄격하며, 관용하고 용납하기보다 재단하고 끊어내는 일을 더 잘한다는 것이다. 화합과 일치를 이루는 일보다 진리를 드러내고 변호하는 일에 능한 이들이 많다.
실제로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모임에 가 보면 분위기가 살벌하다. 거짓과 비진리가 난무하는 세상에서 진리를 사수하기 위한 싸움을 벌이다 보니 다소 마음이 거칠어진 탓이라며 자위할 수 있겠으나, 이런 태도로는 올바른 개혁교회를 세울 수 없다.
개혁은 현실을 비판하는 비평가들이나 저격수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랜 기간에 걸쳐 치석처럼 굳어진 비성경적 전통과 틀을 허무는 일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말씀 사역자들은 기존 잘못된 관행과 오류를 깨부수는 일에만 열심을 내어서는 안 되고, 예레미야처럼 싸매고 위로하며 심고 건설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렘 1:10).
본질과 비(非)본질을 구분하지 못한 채 객관성을 상실하고 자신의 주관적 견해를 가장 성경적인 진리라고 생각하거나, 개혁주의 신학과 개혁교회에 대한 편협한 이해로 인해 좁아진 마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함께 상속받을 동지를 적으로 규정하고 싸우려 덤벼드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교회를 세우는 일꾼들은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자로서 믿는 자들의 본이 되어야 한다. 개혁교회를 설립하고 사역하는 일에 있어 가장 중요한 두 가지 덕목은 개혁신학에 대한 올바르고 균형 잡힌 이해와 성숙한 신앙인격이다.
개혁교회 목회자는 신학적인 균형감각을 가지고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성숙한 신앙인격도 구비해야 한다. 머리만 커져서는 안 되고, 마음까지 넓어져야 한다. 개혁주의 신학이 매력적이라도 개혁신학을 가르치는 교회 교사들과 목회자, 그리고 성도들의 인격이 고매하고 성숙하지 못하면 건강한 개혁교회를 세울 수 없다.
하나님의 주권 강조해야 하지만
운명론주의자나 인본주의자 안 돼
모두 손 놓고 있으라는 말 아니야
하나님:인간이 50:50, 신인협력설
하나님:인간이 100:100, 개혁신앙
회개 필요하나, 구원의 조건 아냐
4)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에 대한 올바른 이해
개혁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주권이란 피조물과 구별되는 신성에 기초한 하나님의 수위권, 하나님의 왕권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자신의 주권으로 세상만사를 주관하시며 온 우주만물을 다스리신다.
이때 하나님은 다른 어떤 존재의 영향을 결코 받지 않으시고 모든 일들은 자유롭고도 독립적으로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신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완전하고도 주권적인 법칙에 의해 통치될 뿐이다(출 4:11; 사 45:7).
헤르만 바빙크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그 어떤 피조물도 하나님의 의지와 작정과 상관없이 존재한 일이 없다. 또한 이 작정이 모든 것을 가져온다(습 2:2).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만물의 최종 근거이다. 그것 이상으로 우리는 갈 수 없다. 왜 어떤 사물이 있고, 왜 그것이 여태 있어 온 것으로 있는가에 대한 종국적 대답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따라 하나님께서 그것을 의도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일들을 하나님께서 다 이루어 가신다고 하여, 우리 편에서는 손 놓고 있어야 되는가? 성경은 타락한 인간에게 회개하고 믿고 순종할 것을 요구한다. 물론 회개하고 믿는 조건을 우리 편에서 충족하는 것은 우리가 받아야 할 구원에 인간이 무엇을 첨가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책임 있는 존재로 만드셨고, 그리하여 사람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약속과 요구 앞에 서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기억하도록 성경은 우리 편에서 해야 할 것을 요구한다.
이 요구에 합당하게 반응하기 위해,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과의 관계를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이 주제는 신앙생활은 물론 개혁교회를 이루는 일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하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 곧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면, 다시 말해 ‘만사를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면 인간이 편에서 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라고 생각하게 되면, 신앙생활은 수동적이 된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이루신다는 말은 신학적인 진술일 뿐, 실제로는 우리가 다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인본주의로 기울게 된다.
어떤 이들은 기독교인은 운명론주의자도 아니고 인본주의자도 아니라는 사실에 기초해, 하나님의 주권과 신자의 책임을 상호 조화시키려 한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오십 대 오십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는 신인협력설이다.
하나님이 일하실 때 우리가 쉬고, 우리가 쉴 때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일할 때 우리가 일하고, 우리가 일할 때 하나님이 일하신다. 우리가 백 퍼센트, 하나님이 백 퍼센트 일하신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 이 둘이 동시에 백 퍼센트다.
그러나 우리 이성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 가진 합리성이 가진 한계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면 인간의 책임이 자꾸 약화되는 쪽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책임을 간과하지 않는다. 책임은 그 일을 할 수 있는 자격과 실력을 갖춘 사람에게 요구된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무언가를 요구하신다. 명령받은 것을 행할 수 있고 하고자 하는 의지력을 인간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책임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타락한 인간에게도 주어진다.
오순절날 사도 베드로는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라며 복음을 전했다(행 2:38).
따라서 무조건적으로 주어지는 구원의 은혜를 받아 누릴 때도 우리는 회개하고 믿으라는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회개하고 믿지 않고 구원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회개하고 믿는 조건을 우리 편에서 충족하는 것을 우리가 받아야 할 구원에 무엇을 첨가하는 것으로 오해하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책임있는 존재로 만드셨고, 사람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약속과 요구 앞에 서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기억하도록 하시기 위해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것이다.
복음전도도 마찬가지다. 개혁교회를 이루는 목회자들 중 말씀을 올바로 전하기만 하면 교인들을 보내주시리라 믿는 이들이 있다. 이는 바른 자세가 아니다.
운명론은 모든 것이 다 정해졌으니 어떤 것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모든 것이 다 정해졌으니 ‘기도하라, 복음을 전하라,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것이다.
최덕수 목사(현산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