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기쁨’ 전하는 배준영 목사 (下)
“기다리던 대작 영화가 드디어 개봉했어요. 당신은 상영시간에 늦지 않으려 택시를 탔고, 관람 에티켓을 지키려 미리 휴대폰을 진동모드로 바꿨고, 팝콘에 콜라까지 샀어요. 이제 시간이 되어 상영관으로 들어가려는데, 직원이 가로막는 겁니다. 그리곤 요구하는 게 있어요. 그게 뭘까요? 맞아요, 티켓이에요. … 당신이 죄를 깨닫고,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나아가 그분께로 들어가려 해도 ‘입구 컷’을 당할 수밖에 없어요. 당신에게 ‘의’가 없다면 말이에요.”
“똑, 똑, 똑! 들리나요? 예수님이 당신의 마음 문을 두드리시는 소리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마음에 노크하기를, 당신의 이름을 부르기를 멈추지 않으셨답니다. 이제 예수님의 이 노크 소리가 들린다면 당신이 할 일은 닫힌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맞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놀라운 선물을 들고 당신 마음에 들어가 함께하실 거예요. 끝까지 떠나지 않고 영원히 함께.”
배준영 목사는 ‘어떻게 하면 복음을 있는 그대로 잘 전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 깊은 복음의 원리를 어렵지 않게 찰떡같이 알려 줄 수 있을까?’를 치열하게 고민해 왔다. <복음을 들고 너에게 갈게>는 지난 10여 년 동안 복음을 가르치며 해온 고민들을 정리한 결과물이다. 다음은 “더없이 값진 최고의 선물, 삶을 송두리째 바꿀 복음을 들고 우리에게 오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고자 땀흘리고 있는 배준영 목사의 남은 이야기.
자기중심적 사고, 요즘 더 심해져
이타성 도덕적 목소리 없어지고
오히려 이기적으로 살라 부추겨
성경의 권위 먼저 이야기할 필요
-‘요즘은 죄도 쿨하게 받아들인다’는 지적이 공감이 됐습니다. 말씀하신 부분도 그렇고, 오늘날 문화가 복음을 받아들이기 힘들게 하는 지점이 더 있을까요.
“복음이 변하지 않듯, 사람의 본질 역시 변하지 않습니다. 다만 말씀드렸듯 자기중심적 삶의 방식이나 하나님이나 죄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하려는 순간, 이를 합리화시키는 시대정신이나 문화가 좀 더 세련되게, SNS나 유튜브처럼 생각하지 않아도 시간이 흘러가게 하는 도구들이 더 가까워진 것 같습니다.
동성애 같은 문제도 마찬가지죠. 오늘날 문화가 ‘그래도 돼’라고 부추겨요. 성경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지만, 마음이 편해지니 그쪽으로 쏠리는 것 같아요.
자기중심적 사고도 그래요. 예전엔 이 정도는 아니었어요. 물론 자기중심적이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일반계시적 차원에서 ‘그래도 남을 먼저 생각해야 해. 도덕적으로도 그게 맞아. 이타적으로 살아야 해’ 하는 마음이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게 아예 없어져 버렸죠. 오히려 ‘너는 좀 이기적일 필요가 있어’ 하고 문화적으로 부추기고 있어요. 복음이 들어가기 더 힘든 상황이 되고 있죠.
그래서 어떻게 보면 ‘권위’를 먼저 세워줄 필요도 있어요. 대부분 사람들이나 시대정신이 ‘너는 괜찮다’고 이야기하기보다, 성경의 권위를 먼저 이야기하는 거죠. 어차피 하나님에 대해선 성경으로 알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이 정말 계시다면 우리에게 가장 높은 권위는 성경이라고요.
성경이 진짜 어마어마한 거라고 던져주면서, 네 생각이 아닌 성경의 생각을 이야기해 보자고 하는 거죠. 실제로 ‘내 생각도 네 생각도 다 맞는 건데, 왜 목사님 생각만 맞다고 하느냐’는 말을 들어본 적도 있어요.”
아담 이후 인류, 절박·공허 느껴
하나님 아닌 것으로는 안 채워져
전도에는 성령의 역사 필요하나
그럴수록 제대로 알고 준비해야
-생각해 보면 과거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건 경제적 조건밖에 없는 것 같은데, 사람들이 신을 찾지 않습니다. 절박함 대신 공허감을 느끼는 사람이 많아졌으니 비슷하다고 봐야 할까요.
“예, 맞습니다. 사실 절박함과 공허함은 한끗 차이 같아요. 아담과 하와 때부터 사람들은 절박함과 공허함으로 무화과 나뭇잎을 마련해 자기를 가려 절박함을 해결하고 공허함을 채워 만족하려 했지만,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영역이니 본질은 달라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결국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아무리 완벽하게 복음을 잘 설명하고 좋은 교재를 써도 안 되고, 마음만 열리면 대충 설명하고 부족해도 은혜를 받는 것 아닌가요.
“마음이 열리는 부분은 성령의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가 있어야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우리 입장에서 구원과 관련된 말씀을 제대로 알고 잘 전해야 하겠죠. 사역자라면, 베드로전서 말씀처럼 복음에 대해 경험하고 알게 된 것을 잘 말할 수 있도록 준비가 돼 있어야 합니다.
물론 이것만으론 부족하죠. 사람은 절대 들을 수도 깨우칠 수도 없는 존재임을 염두에 둬야 합니다. 사람의 힘이 아닌,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지 않으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이 사람이 거듭나 있지 않으면 깨달을 리 없죠.
청년들에게도 거듭남에 대해 물과 성령으로, 그러니까 말씀과 성령의 도우심이 있을 때 가능하다고 이야기해요. 그러면 ‘나는 안 믿기니까 교회에 안 올래’라고 하는데, 저는 ‘안 받아들여지는 거 알아. 그래도 네가 교회에 나왔으면 좋겠어. 적어도 네가 어떤 길이나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말씀이 들리는 그 자리에 있을 때 깨달을 수 있겠지만, 말씀이 들리지 않는 자리에 있으면 계속 깨달을 수 없어’라고 이야기해요.
반대로 말하면, 사람들의 아집과 들리지 않는 귀를 해결하는 방법은 준비된 사람들이 복음을 들고 찾아갈 수밖에 없다는 거죠. 복음을 들고 그에게 갔을 때, 하나님께서 마음을 열어 주셔서 거듭나 복음을 받아들이면 할렐루야 땡큐이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제가 자책할 필요는 없죠.
복음을 잘 전했다면 기도해 주면서, 살아가면서 잘 안 되는 부분이 있을 때 찾아오라거나 다시 네게 연락할 수 있게 기회를 달라고 하는 방법뿐이죠.
존 파이퍼는 거듭나면 ‘개안된다’는 표현을 써요. 눈이 열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경험하는, 심미안이 생기는 거죠. 그게 맞다고 생각해요. 정말 그런 순간이 있거든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열어주지 않으시면, 하나님이 존재하심과 예수님이 나를 위해 돌아가심이 받아들여질 리가 없죠. 그게 전제이고,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참 쉽지 않은 작업이죠? 하지만 하나님께서 먼저 일하십니다. 그러니까 저는 오히려 마음이 더 편해요(웃음). 물론 어떨 때는 자괴감을 느끼고 동굴에 빠져 들어가기도 했죠. 하지만 이후로는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라 생각하고 맡겨드리는 쪽으로 가고 있어요.
제대로 준비된 복음은 듣는 이들이 자기를 위해 갖고 있던 우상들과 그들이 지금껏 갖고 있던 신념 체계를 무너뜨립니다. 그리고 은혜의 복음이 무엇인지 더 풍성하게 경험할 수 있게 하며, 복음으로 자기 정체성과 세계관을 세우게 합니다. 그래서 여전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여전히 복음을 전하는 일을 사람을 통해 하시는 까닭인 것 같습니다.”
교회 밖 사람들에 익숙한 용어로
교회 안 사람들에겐 새로운 접근
믿고 입으로 시인해야 구원 얻어
미래 죄 용서, 죄 지으란 말 아냐
-시작을 창조가 아닌 ‘하나님(The Origin)’, 죄를 ‘문제(The Problem)’ 등 보통의 사영리 언어와 다르게 쓰셨네요. 그리고 구원을 예수님(The Solution)과 구원(The Problem Sloving)으로 세분화하셨는데요.
“동전의 양면 같은 두 가지 이유입니다. 교회 밖 사람들에게는 교회 안에서 사용하는 익숙한 용어들이 바로 와 닿지 않고, 실제 대상들의 뉘앙스를 온전히 살리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밖, 그러니까 교회 문화를 모르는 이들이 들었을 때도 좀 더 쉽게 마음에 와 닿고, 머리에 그려지는 이미지가 필요했습니다.
반면 교회 안의 언어와 문화에 익숙한 이들은 해당 용어를 들을 때 바로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고민해야 할 대상을 고민하지 않고 넘어가는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죄'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 어떤 이들은 너무 익숙해서 이것이 위기와 위험으로 여겨지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과 구원을 세분화한 이유는 예수님의 어떠하심을 아는 것이, 구원으로 곧바로 연결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지식적으로 아는 것을 넘어 그 분이 대속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일이 실제로 대속의 효력 있는 방법으로 내 마음에 와 닿는가, 그래서 예수님을 대속주(主)로 고백할 수 있는가를 명확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교회 안에 의외로 구원을 ‘자연스럽다’고 이야기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회개도 없고, 대속 사건을 나의 유일한 속죄 방법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자기의 왕 됨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진정한 왕으로 진지하게 고백함도 없이 구원 받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더러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행하신 일이 나에게 적용되는 순간이 필요합니다.
물론 죄인임을 깨닫고, 하나님의 영화로우심에 대한 심미안을 얻고, 그 분을 유일한 대속주로 인정하고 고백하는 모든 것이 거듭남으로 말미암아 가능한 것이지만, 성경은 명확하게 ‘마음으로 믿어 입으로 시인함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이후 구원의 확신과 관련해서도 중요한 증거가 됩니다. 거듭나지 않은 이가 진정으로 그렇게 고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론에 대한 오해가 많습니다. 미래의 죄까지 용서받았다는 것을 오해해서 구원파가 되기도 하고, 반대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행위 구원으로 가기도 하는데 어떻게 하면 간단히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대속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포함한 우리의 모든 죄과를 해결하실 수 있을 만큼 엄청난 것이 맞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다만 미래의 죄까지 용서 받았다 하여, 계속 죄를 지어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성도가 죄를 지을 때 하나님과 거리가 멀어지게 됩니다. 마치 아담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나무 뒤에 숨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죄인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를 두려워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 안에서 얻을 수 있는 참된 기쁨을 상실하고 괴로움과 두려움에 좌절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회개’라는 방식으로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음에도 이미 이루신 십자가의 공로에 근거하여 ‘하나님, 내가 다시 하나님께 돌아가기 원합니다. 여전히 죄인이고 죄를 범하지만 예수님의 공로를 힘입어 돌아가오니, 나의 기쁨을 회복시켜 주소서’라고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담력을 얻지요.
성도는 이 땅을 살아가며 세상의 유혹과 어려움으로 죄에 넘어질 수 있습니다. 다만 십자가의 공로를 힘입어 회개하며 나아갈 때 다시금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구원파나 행위 구원과의 차이점이 될 수 있겠습니다.”
스타터 키트, 자라가는 방향 제시
구원 이후, 성장반 통해 말씀 보며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와 기도로
하나님 기뻐하실 일 통한 기쁨까지
-구원 이후, 신자의 삶(The New Identity) 속 ‘스타터 키트’ 이후에는 어떤 프로그램이 있고, 주로 어떻게 교육을 하시는지요.
“‘스타터 키트’는 방향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우리가 자라가야 할 방향이 무엇인지 알려주어,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성장반’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을 알아가는 유일한 방법인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는 방법들을 가르치고, 또 나누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인격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누려가도록 기도에 대해 가르치고, 실제로 하나님 안에서의 풍성한 기도를 누리도록 교제하며 돕습니다. 그리고 소그룹으로 모여 말씀이 삶으로 나타나도록 말씀의 교제를 하도록 돕고 있습니다.”
-끝으로 복음을 알고 받아들이게 되면, 뭐가 얼마나 어떻게 행복해지나요.
“처음에는 감정적으로 그분이 날 사랑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행복하고 너무 즐거웠어요. 그런데 이 복음을 받아들이면, 시간이 지날수록 말씀이 읽히더라고요. 나를 너무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하신 분에 대해 모르면 되겠어요? 더 알고 싶고 궁금증이 생겨요. 알아가는 자체가 너무 행복하죠.
소개팅을 했을 때 정말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면, ‘너무 행복하다’로 끝나지 않잖아요. 그 사람이 너무 궁금하잖아요. 잘 때도 생각나고, 무슨 옷을, 무슨 음식을 좋아할까 궁금해하면서 그 자체가 너무 행복한 과정이 되는 거죠.
그 사람을 생각만 해도 행복한 데서부터, 시간이 지나면 그 사람이 좋아하는 걸 하고 싶어져요.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죠. 그 사람을 좋아하는 제가 좋고 행복하죠.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도 너무 좋고, 받아서 누리는 것도 너무 좋고,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다가, 점점 그 사람이 좋아하는 걸 하고 싶은 욕망이 생기더라고요. 이게 진짜 행복해요. 내가 행복해서 복음을 전하는 것도 마찬가지죠. 그분께서 새로운 영혼이 태어나는 걸 좋아하시니까, 제가 하는 거죠.
제가 아내를 처음 봤을 때, 예배드리는 모습이 너무 좋았어요. 밤 사이 생각이 나고, 연락해 볼까 생각하고, 다음부터 하나님과 말씀으로 교제하듯 밤새도록 연락을 주고받는 자체가 너무 행복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 자매가 내 생각과 조금은 다르다는 걸 느끼면서 갈등이 생기죠.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과 내가 원하는 것이 달라요. 그러면 갈등이 생기고 때로는 실족하는 마음도 들죠. 하지만 이 자매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경험하고 내가 이 자매를 더 사랑하게 되면, 이 자매가 좋아하는 걸 이미 하고 있더라고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내가 하면서 기뻐하는 데까지 가는 거죠.
이것이 복음이 주는 진짜 기쁨이에요. 복음을 처음 만났을 때, 그 분께서 나를 아시고 나를 용납하시는 게 너무 즐거웠던 때가 있다면, 그 복음을 더 알아가고 기뻐하면서 기도가 바뀌어 가죠. 처음에는 ‘하나님 해 주세요’, 나중에는 ‘하나님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원하는 곳에 내가 가고 싶습니다.’ 기도가 바뀌는 이유가 그런 맥락 속에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 복음이 주는 기쁨은, 시간이 갈수록 더 커져요. 하나님은 알면 알수록, 사랑할 수밖에 없는 분이시거든요. 그분의 풍성함은 말로 다할 수 없어요. 이건 처음 알았을 때의 기쁨과 약간 다른 느낌이예요. 더 대단하시고 더 기뻐요.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야, 나도 왕년에 그랬어’ 하시는 분들이에요. 뜨거운 냄비처럼 막 끓어오르던 기쁨이 시간이 지나면서 약간 무미건조해진다는 것이 저는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이건 복음을 처음 느낀 다음, 더 이상 신경을 안 쓴 거죠. 그 복음을 계속 음미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면, 더 깊이 있고 기쁘게 하나님과 만날 수 있어요.
존 파이퍼 목사님의 <하나님을 기뻐하라>에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장을 이렇게 표현하시거든요. 원래는 ‘인생의 최고 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이거든요. 그런데 이 둘이 하나라는 거예요. 질문이 하나였으니까요. ‘인생의 제일 되는 목적이 뭐냐고 물었는데, 왜 두 개로 대답하냐. 그리고 여기 동사가 단수다.’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과 그분을 즐거워하는 건 같다.
그 말씀은 우리가 뭔가를 해서 하나님이 즐거워하시는 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즐거워하면 그분은 영광을 받으신다는 거예요. 제가 이걸 경험한 다음, 세계관이 바뀌었어요.내가 뭘 해서 기쁜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자체를 즐거워하면 되는 거죠. 뭔가를 하겠다는 의무감과, 뭔가를 해야 그분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책임감을 내려놓게 됐어요. 지금은 그분께서 즐거워하실수록, 그 분이 좋아하시는 일을 하고 싶어요.
제가 뭔가를 해서 그 분께 돌려드리는 게 아니라, 주님의 시선이 어디 있는지 보게 되는 거예요. 제 목회관과 인생관에서 중요한 것이 ‘기꺼이’거든요. 억지로 하는 게 아니죠. 대부분 교회 사역은 억지로, 시키니까 하잖아요. 저는 시킬 필요도 없다고 생각해요. 진짜 하나님을 즐거워하면, 그냥 가 있는 거예요. 복음이 가득 차면, 당연히 교회 안의 필요를 볼 수밖에 없고 기꺼이 세상을 섬기고자 하게 되겠죠. 복음이 없으니, 그게 안 되는 거라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