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재 선교사의 ‘아프리카에서 온 편지’ 안식 (2) 아펜젤러의 죽음
안식년을 맞아 한국에 잠시 체류 중인 이윤재 아프리카 선교사님이 묵상의 글을 보내 주십니다. -편집자 주
선교의 근본 정신이 무엇인가
군산 어청도 앞바다서 순직한
아펜젤러 선교사를 생각한다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
선교는 무엇으로 평가되는가? 선교가 업적이 되고 심지어 사업이 되는 시대에, 선교의 근본적인 정신이 무엇인지 깨우쳐 주는 모델을 그나마 예기치 않은 데서 만난다면 그것은 분명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고대도에서 귀츨라프를 만나고 돌아온 다음 날, 밤늦게 어청도 한 교회에서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은 나는 깜짝 놀랐다. 오래 전 신학교에서 함께 공부한 후배 목사였기 때문이다. “이 목사님, 한국에 와서 군산까지 오셨다는 말을 들었는데, 어청도도 왔다 가셔야지요.”
전혀 예상치 못한 전화였다. 어청도라니. 내가 생각한 어청도는 중국에 가까운, 아주 먼 섬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어청도에 가야 할 이유가 떠올랐다. 어청도 앞바다에서 선교사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1858-1902)가 순교했다는 이야기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님이 주신 뜻밖의 기회에 감사하며, 후배 때문이 아니라 아펜젤러 때문에 서둘러 군산항으로 향했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은 한국교회가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아펜젤러 부부가 언더우드와 함께 선교사로 처음 제물포에 도착한 날이기 때문이다.
본래 아펜젤러 부부는 의사 스크랜턴 부부 그리고 그의 모친과 함께 미국 감리교의 파송을 받고 샌프란시스코를 같이 출발했다. 그때 아펜젤러의 나이 27세, 스크랜턴은 29세, 그의 모친은 53세이었다. 아펜젤러는 제물포에 발을 딛는 역사적인 날, 다음과 같은 기념비적 기도를 남겼다.
“우리는 부활주일에 이곳에 왔습니다. 부활절에 죽음의 장벽을 산산히 부순 주님, 이 백성을 속박하는 굴레들을 깨뜨리시며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빛과 자유로 인도하소서.”
(We came here on Easter. May who on that day burst asunder the bars of death. break the bands that bind this people, and bring them to the light and liberty of God’s children.)
딸은 서울에서 태어난 첫 서양인
배재학당 설립, 첫 서양식 건축
첫 세례·성찬·결혼 예식, 안수도
첫 기독교 신문 창간, 신약 완역
이렇게 입국한 아펜젤러는 한국교회사에 아주 특이한 ‘처음’의 기록을 많이 보유했다. 1885년 11월 9일, 딸 앨리스가 한국 최초의 서양인으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1886년 6월 8일, 한국 최초 교육기관인 배재학당이 시작됐다. 1887년 9월, 한국 최초 르네상스 양식의 배재학당이 건축됐다. 1887년 10월 9일, 벧엘(정동감리)교회 예배가 시작됐다. 같은 달 16일 한국 최초 세례 예식(최씨 부인)이 있었고, 같은 달 23일 한국 최초 성찬 예식이 있었다.
1888년 3월 14일 한국 최초 기독교 결혼 예식(한용경과 박씨 부인)이 있었고, 1888-1890년, 2년간 한국 8도 중 6도를 걷거나 말을 타고 1,800마일 가량 선교 여행을 했다. 1897년 2월 2일, 한국 최초 기독교 신문 <조선 그리스도인 회보>를 창간했고, 1900년 9월 9일 한국 최초 신약전서를 완역했다. 1901년 5월 14일 평양 김창식, 제물포의 김기범, 다음 해 서울의 최병헌을 목사로 안수했다. 이 모든 기록이 선교사 아펜젤러로 인해, 아펜젤러 때문에 생긴 영광스러운 기록이다.
그러나 선교사 아펜젤러로 인해 하나님이 받으실 더 큰 영광은 전혀 다른 곳에서 나왔다. 1902년 6월, 아펜젤러는 감리사의 일을 수행하던 중 성서 번역자 모임을 위해 목포로 내려가게 됐다. 남장로교 선교사 레이놀즈 자택에서 모일 모임이었다. 그는 성서번역을 돕던 조수 조한규와 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내려가던 정신여학교 학생과 함께 인천에서 일본 선박 구미가와마루 호에 올랐다.
그런데 일행이 탄 배가 남쪽으로 내려가던 중 군산 앞바다 어청도 부근에서 또 다른 일본 배 기소가와마루 호와 충돌하는 일이 발생했다. 두 배는 동일한 여객선으로 오사카 철공소 사쿠라지마 공장에서 건조한 현대식 기선으로 길이 48.79미터, 깊이 5.66미터로 1889년 12월(메이지 22년)에 진수한 배였다.
배가 충돌하자 침몰이 시작됐고, 함께 배에 탄 아펜젤러의 비서 보울비는 급히 계단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이미 배 앞부부은 침수되고, 선미는 물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보울비는 가라앉은 배에서 구명정을 잡고 45분간 떠 있다 결국 구조됐으나 아펜젤러는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그가 증언한 아펜젤러의 마지막 모습은 필사적으로 조규성과 정신여학생을 구하려 노력하던 것이었다. 결국 세 사람은 모두 익사하고 말았다. 그곳은 인천항에서 85마일(136킬로) 떨어진 어청도 서북 해상 2.3마일, 주소는 전북 옥구군 미성면 어청도리였다.
아펜젤러는 곧 마포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안장되었으나, 시신은 없는 빈 무덤으로 하나님께 돌아갔다. 그의 나이 44세였다.
내가 탄 배에서 같은 일 생기면,
그들 위해 목숨 바칠 수 있을까
작은 섬을 25년 섬긴 후배 목사
누리며 만족 못한 것 부끄러워
선교란 본질적으로 무엇인가?
희생하며 사는 것, 가장 소중해
군산항에서 어청도까지는 약 72km 정도로, 배로는 약 2시간 30분이 걸렸다. 어청도가 가까워오자 내 가슴은 뛰기 시작했다.
때마침 쏟아지는 폭우와 파도로 인해 배는 심하게 요동쳤다. 넘실거리는 파도에 몸을 흔들리며 그 옛날 어디쯤에서 자신의 안전과 생명은 돌아보지 않고 어린 학생을 구하기 위해 몸을 던진 아펜젤러가 떠올랐다. 그것은 1902년의 사건이 아니라 바로 오늘의 사건이었다.
제자나 교인이 탄 같은 배에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나는 아펜젤러처럼 그들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을까? 나는 확실히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남을 위해 죽는 일은 아름다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 죽음과 희생이 따르는 오늘의 현실적 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배에서 내렸을 때 후배 목사가 마중을 나왔다. 노을 진 바다를 바라보고 차를 마실 때 얼마 동안 여기서 목회했느냐고 묻자 그가 한 25년 된다고 웃으면서 대답했다.
순간 나는 충격을 받았다. 신학교에서 공부도 잘하고 장래가 촉망되던 후배였다. 그런데 이 작은 섬에서 25년을 목회하다니. 인구 300-400명의 작은 섬에 무슨 다른 희망이 있었을까? 이 작은 섬에서 젊음을 바쳐 25년을 목회하다니. 그의 머리도 희끗희끗 희어지고 있었다.
나는 차마 그들 앞에 얼굴을 들 수 없었다. 큰 교회에서 누릴 것은 다 누리면서도 만족하지 못하고, 항상 더 크고 더 나은 곳만 사모했던 내가 부끄러웠다. 25년을 섬에서 목회해온 그들의 삶은, 어쩌면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내던진 아펜젤러의 죽음과 같은 것이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며 무엇을 남길 것인가? 생각컨대 아펜젤러의 죽음을 통해 이룬 선교는 그가 미국의 명문 마셜대학교, 드루대학교를 나온 것보다 더 위대하다. 그가 서양 교육기관 배재학당을 세운 것보다, 최초 감리교회 정동감리교회를 세운 것보다, <조선 그리스도인 회보(신문)>를 만들고 <신약전서>을 번역하고 수많은 신학 교과서를 쓴 것보다, 그가 스크랜턴, 로제타 홀 등과 함께 의료 선교를 한 것보다, 최초로 한국인에게 목사 안수를 주고 그가 세운 47개 교회보다, 그가 전도한 수천 수만의 사람들보다 더 크고 위대한 선교인지 모른다.
우리 자녀들은 누가 키우며 그들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그의 아내 엘라 도지 아펜젤러(Ella Dodge Appenzeller, 1854–1916)는 40대 후반의 나이에 갑자기 남편을 잃고 힘들게 살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자녀들을 끝까지 인도하셨다.
큰 딸 앨리스 레베카 이펜젤러(Alice Rebecca Appenzeller, 1885-1950)는 이화학당(현 이화여고, 이화여대) 교장으로 아버지가 죽은 땅에서 끝까지 선교하다 죽었다. 아들 헨리 도지 아펜젤러(Henry Dodge Appenzeller, 1890–1953)는 아버지가 나온 드루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된 후 1917년 한국 선교사로 자원해 1921-1941년, 20년 간 배재학당 교장으로 일하면서 학생들을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게 했으며, 1941년 미국 하와이 제일감리교회에서 목회하다 1950년 6.25 이후 다시 아버지의 땅 한국에 와 선교하다 1953년 죽어 아버지와 함께 양화진에 안장됐다. 막내 딸 메리(Mary Ella Appenzeller, 1893-1963)는 미국에서 태어나 학교를 졸업한 후 역시 한국 선교사로 나와 이화학교, 감리교 신학교에서 가르치다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우리는 아펜젤러에게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무엇이 선교의 정신이고 선교란 본질적으로 무엇인가? 출렁거리는 어청도 바닷가를 거닐며 나는 다시 물었다.
세상에 사는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 남을 위해 희생하며 사는 것이 아닐까? 예수 그리스도가 소중한 이유가 그것이고, 우리가 그를 따르는 사는 이유도 그것이 아닐까?
아펜젤러의 죽음의 의미를 아프리카 선교사 스터드의 말로 되새기며 나는 조용히 어청도를 떠났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며 나를 위해 죽으셨다면, 그 분을 위한 나의 어떤 희생도 결코 크다고 할 수없다(If Jesus Christ be Gosd ad died for me, then no sacrifice can be too great for me to make for Him, Charles T. Studd, 1860-1931).”
이윤재 선교사
우간다 쿠미대학 신학부 학장
Grace Mission International 디렉터
분당 한신교회 전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