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재 선교사의 ‘아프리카에서 온 편지’ 안식 (4) 이세종, 우리의 스승
누구도 이세종처럼 못 사나
누구나 이세종처럼 살아야
화순 생가, 특별한 것 없어
거룩한 장소가 거룩 안 낳아
특별한 사람이 성지 낳는 법
복음 능력 통해 성경적 회심
예수 믿은 후 바보처럼 살아
기도의 사람, 많은 제자 배출
“청하건대 옛 사람에게 물으며 조상들이 터득한 일을 배울지어다(욥 8:8)”.
내가 오랫동안 짝사랑해온 사람이 있었다. 이세종 선생. 신학교 때 엄두섭 목사가 쓴 <호세아를 닮은 성자 이세종>을 읽고 나는 ‘뿅 갔다’. 세상에 그런 사람이 있다니.
머슴을 살다 예수님을 만난 후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고, 어렵게 결혼한 후 동네 영감과 눈맞아 도시로 도망간 아내를 찾아가 돌아오라고 기도해 준 사람, 마지막엔 그 아내가 회개하고 돌아와 남편이 묻힌 화학산 기슭에 같이 묻혔다는 이야기는 내 젊은 시절 영성의 모델이요 이상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이세종에 대한 변함없는 두 가지 사실이 있다. 하나는 누구도 이세종처럼 살 수 없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누구나 이세종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세종을 찾는 나의 순례는 마치 첫사랑을 찾아 떠나는 여행과 같이 설렜다. 군산을 떠나 화순에 도착했을 때, 영성대학 제자 성금란 목사와 이세종 기념사업회 이사장 고재호 목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성금란 목사는 자녀가 없던 이세종의 딸처럼 그를 따르고 배우는 일을 쉬지 않고 있다. 아마 그는 성 베네딕트에게 동생 스코라스티카오 같거나 성 프란치스코에게 여제자 클라라와 같은지 모르겠다.
그의 수고와 연구로 한국교회에서 이세종 연구는 많은 발전을 이뤘다. 다만 나는 이세종을 연구하는 학도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로서 그의 발자취를 밟고 싶었다.
먼저 성금란 목사를 따라 이세종의 생가를 방문했다. 생가가 개천산 아래 있는 등광리에 있으니, 하늘이 열리는 산에 불빛을 발하는 마을에서 이세종이 태어난 셈이다. 이세종이 태어나고 자란 마을은 여느 마을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다. 마을 앞 느티나무 옆에서 이야기하는 아낙네들, 티없이 뛰어노는 아이들, 마을 뒷산에서 흘러내리는 시냇물, 동구밖 논두렁, 밭두렁, 어느 것 하나 특별한 것은 없었다.
거룩한 장소가 거룩을 낳지 않는다. 거룩한 사건이 거룩한 장소를 만들 뿐이다. 특별한 장소가 특별한 사람을 낳지 않는다. 특별한 사람이 특별한 장소를 낳을 뿐이다. 성 프란치스코의 고향 아시시가 그렇고, 프랑스의 작은 마을 떼제가 그렇고, 예수님이 태어난 베들레헴 작은 마을이 그렇다.
이세종이 태어난 집 앞에는 마을 공동 우물이 있었고 그가 자식을 소원해 지성을 드렸다는 기도처가 집 뒤에 있었다. 이세종이 앉아 있었을 마루에 그의 양자의 딸과 함께 앉아 보았다. 그의 마루는 지금도 따뜻하게 느껴졌다.
이세종이 어떻게 예수를 믿었는지는 잘 전해지지 않는다. 그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그가 예수 믿은 뒤 일어난 놀라운 변화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이 부분은 앞으로 더 많은 연구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가 그 시대의 사회적 관습인 후손을 얻기 위해 산당을 짓고 거기서 집중적으로 기도하면서 하나님과의 만남에 한 걸음을 더 가까이 다가간 것은 맞는 것 같다.
어떤 사람은 그가 기도하다 환상을 보았다거나 영음을 들었다고 하지만, 그보다는 그가 생활 속에서 만난 기독교인들을 통해 간단한 전도를 받고 그들로부터 얻은 성경을 통해 스스로 구원의 능력과 접촉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것 같다.
많은 간증자들이 복음보다 복음을 받은 사람의 결단과 용기에 집중하지만, 이세종은 자신의 결단보다는 성경 자체가 주는 복음의 능력을 통해 회심했기 때문에 더 성경적인 회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믿는 자의 결단이 능력이 아니라, 복음이 구원의 능력이기 때문이다(롬 1:16).
하나님은 예수를 믿은 이세종에게 많은 거룩의 선물을 주셨다. 그가 예수를 믿자마자 한 첫 번째 일은 머슴질로 번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는 것이었다.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마 19:21)”는 모든 회심자가 제자가 되기 위한 첫 번째 부름이다.
이집트의 성 안토니가 19세에 이 말씀을 듣고 사막으로 향한 것처럼, 이세종도 그러했다. 비움은 모든 거룩의 시작이다. 이세종의 호가 빌 공(空)자, ‘이공’인 것은 이 까닭이다. 그는 추울 때나 더울 때나 홋바지에 저고리 하나로 살았고, 걸인과 같이 떨어진 베옷, 구멍 뚫린 모자를 쓰고 다니기를 좋아했다.
예수를 믿은 후 하루 한끼만 식사했고 그나마 육식은 금했다. 그는 결혼했으나 거의 해혼 상태로 살았다(이 부분은 동의하지 않아도 좋다). 한번은 광주 지역 부흥사경회에 참석하기 위해 9일분의 양식을 짊어지고 80여 리를 걸어갔다가, 가난한 자를 만나 짊어지고 간 양식을 다 주고 9일간 금식하고 돌아온 적도 있다.
그는 예수를 믿은 후 바보처럼 살았다. 이 부분에 대한 예화는 참 많다. 한번은 이세종이 허름한 옷차림에 구멍난 모자를 쓰고 사거리 마을을 지나는데, 동네 불량배들이 그를 불러 세워 송덕비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으라고 시비를 걸었다.
그들이 해질녘에 다시 지나가다 보니 이세종이 그때까지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래서 물었다. “아니 왜 여태까지 않아 있소?” 이세종이 대답했다. “명령을 내렸으니 명령을 내린 분이 일어나라 해야 일어나지요.” 그들이 “일어나시오” 했더니, 이세종은 고개를 숙여 “고맙소” 하고 일어났다.
어느 날 이세종이 마을 앞을 지나가는 데 아이들 네 명이 어깨동무를 하며 길을 막아섰다. 그리고는 가만히 서 있는 그에게 침을 뱉으며 ‘바보, 문둥이’라고 놀렸다. 그가 아이들을 피해 왼쪽으로 가면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가면 오른쪽으로 우르르 몰려들어 막아섰다. 멀리서 이 광경을 본 한 남자가 “이놈들, 어른을 놀리면 못써” 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이세종은 “내 안에는 더 큰 문둥병이 있는데” 하고 말했다.
예수를 믿은 후 그는 기도의 사람이 되었다. 성 목사의 인도로 개천산 기슭에 있는 그의 기도처를 방문했다. 수풀로 덮혀 있는 그곳에서 이세종은 매일 기도하고 성경을 가르쳤다. 이 자리에서 그의 제자들, 맨발의 성자 이현필, 고아와 한센병 환자의 아버지 최흥종, 사랑의 목자 강순명, 그리고 그를 생명처럼 따르던 수많은 제자들이 기도를 배우고 성경을 배워 어떤 사람은 목회자로, 어떤 사람은 사랑의 사도로, 성자로, 수도원으로, 독립운동가로, 선교사로 나갔을 것이다.
그가 몸소 보여준 기도와 실천의 모범이 제자들을 따르게 한 것이다. “기도를 배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기도하는 것이다(E. M. 바운즈).”
예수를 믿은 후 그는 자연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는 피는 ‘생명’이라고 믿어 일생 육식을 하지 않았다. 그는 독에 빠진 쥐를 놓아주기도 하고, 자신을 문 지네를 집어 풀속에 놓아주기도 하고, 부엌에 든 독사를 달래 나가게 하고 걸으면서 개미를 밟을까 조심했다.
어느 날은 길을 가다 고사리를 밟아 물이 나오자 고사리의 피라며 미안해 했다. 또 어느 날은 가뭄으로 웅덩이가 말라가는데 미꾸라지와 올챙이들이 죽어가자, 그것들을 옷에 담아 냇가에 풀어주기도 했다. 그에게 모든 생명은 하나님의 피조물이었고 그의 형제와 자매였다.
이세종이 태어난 지 올해로 150년(그는 1879년 태어났다), 별세한 지도 78년(1944년 별세)이 지났는데 왜 사람들은 그를 그리워하는가? 한국교회에는 그동안 수많은 목회자, 부흥사, 신학자, 선교사가 있는데, 왜 사람들은 150년 전 가난하게 살다 간 한 사람을 여전히 잊지 못하는가?
그는 신학교도 나오지 않았고 안수도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누구를 가르치거나 교계의 지도자도 아니었는데, 왜 사람들은 그에 대해 더 많은 연구와 관심을 갖는 것일까?
오늘날 교회가 그 많은 과거의 영광에도 불구하고 도덕적 지탄을 받으며 스스로 무너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목회자인 당신은 왜 목회하고, 선교사인 나는 어떻게 선교해야 하며, 예수 믿는 우리는 왜 살며 어떻게 살아야 할까?
침체와 혼란의 시대를 사는 오늘의 기독교적 삶에서 이세종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는가? 우리가 다시 옷깃을 여미며 옛 사람 이세종에게 배워야 할 절실한 이유다.
이윤재 선교사
우간다 쿠미대학 신학부 학장
Grace Mission International 디렉터
분당 한신교회 전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