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터스 세미너리 제14차 오픈강좌
“‘청교도’라는 명칭은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에 의해 만들어졌다. 여왕은 자신의 정책에 사사건건 저항하며 까다롭게 구는 개혁가들을 귀찮게 여기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런 그들을 ‘매우 까탈스러운 사람들’ 혹은 ‘아주 꼼꼼한 형식주의자들’이라는 뜻의 ‘precisian’이라 불렀는데, 이 말에서 ‘puritan’ 즉 청교도라는 말이 유래했다.”
마스터스 세미너리 제14차 오픈강좌가 지난 9월 28일 오전 서울 은평구 북한산국립공원 앞 바로선개혁교회에서 ‘청교도를 만나다’를 주제로 개최됐다.
이날 오픈강좌에서는 마스터스세미너리 책임연구원 최더함 박사(역사/변증신학)가 ‘청교도를 아십니까?’를 제목으로 발표했다. 1559년 엘리자베스 1세의 종교 통일령 발표부터 1662년 찰스 2세의 대추방령 발표까지 약 100년의 기간을 ‘청교도 시대’라 부른다.
최더함 박사는 “청교도(Puritan)란 16세기 후반 영국에서 일어난 종교개혁파 즉 칼빈주의(Calvinism)를 모범으로 태동된 한 부류”라며 “이들은 가톨릭적 영국 국교회(성공회)의 개신교 탄압에 저항하고, 영국 교회를 바른 신학과 신앙의 토대 위에 건설하기 위해 부단히 투쟁했다. 이들은 신앙을 삶으로 살아내기 위해 화려한 의식과 호의호식을 물리치고 모든 오락을 죄악시했다”고 소개했다.
최 박사는 “이후 청교도들은 ‘종교 통일령(the Act of Uniformity, 1559)’에 규정된 것보다 더욱 급진적으로 교회의 예배와 질서를 개혁하기를 원했던 영국 국교회(the Church of England) 회원들을 가리키는 말이 됐다”며 “이 청교도들은 미신적 의식들과 가톨릭 관구 조직을 타파하고, 성직자들의 동등성을 주장하며 편협한 징계에 대항하고 더 나은 설교와 목회를 위해 진력했다”고 전했다.
그에 의하면 17세기 들어 ‘청교도’라는 이름은 포괄적으로 사용됐다. 즉 칼빈주의 신조를 고수하고 진지한 경건 생활을 실천하는 감독교회·장로교회·독립교회 교인 모두를 일컫는 용어가 된 것. 이후 ‘청교도주의(Puritanism)’는 부유한 문화 속에서도 검소한 생활과 고상한 전통 및 윤리와 도덕을 숭상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 목회를 지향하는 하나의 신학적 사상으로 발전했고, 이는 영국뿐 아니라 신대륙 뉴잉글랜드에서 18세기에 복음주의를 고취하는 동력이 됐다.
청교도들은 ‘신대륙 이주’를 통해 오늘날의 미국을 건설한 주역으로 잘 알려져 있다. 1620년 9월 6일 영국 플리머스 항에서 102명이 ‘메이플라워(Mayflower)’호를 타고 9주일간 항해 끝에 북아메리카 동해안에 도착했다. 본래 목적지는 버지니아였지만, 해풍에 밀려 더 북쪽에 도착해 그곳을 ‘플리머스(Plymouth)’라 불렀다. 당시 102명을 기념해 세운 건물이 102층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1931년 완공)이라고 한다.
이들은 지도자 윌리엄 브래드포드(William Bradford)를 중심으로 이미 항해 도중, 개척지는 성인 남성들이 참여하는 ‘민회’에 의해 통치한다는 ‘메이플라워 서약(Mayflower Compact)’을 체결했다. 이는 훗날 미국 헌법의 기초가 됐다. 자유를 찾아 미지의 세계로 온 102명의 메이플라워호 사람들을 후세 사람들은 ‘필그림 파더스(Philgrim Fathers’라 불렀다.
춥고 황량한 곳에서 6개월 동안 절반 이상이 스러졌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굳센 신앙심으로 혹독한 겨울을 이겨냈다. 봄이 되자 생존자들은 길을 닦고 집을 짓는 등 건설에 힘을 기울였고, 함께 예배 드릴 장소도 만들었다. 그곳 이름은 고향을 생각하며 뉴잉글랜드(New England)라 불렀다. 이는 지금의 미국 북동부 여섯 주(매사추세츠, 코네티컷, 로드아일랜드, 버몬트, 뉴햄프셔, 메인)를 뜻한다.
길이 열리자, 청교도들의 이주가 이어졌다. 영국에서 10년 동안 1만 8천여 명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이민을 떠났다. 1630년, 찰스 1세로부터 ‘식민지 건설 허가장’을 받은 새로운 형태의 청교도들이 매사추세츠에 도착했다. 지도자 존 윈드롭은 청교도들만의 ‘언덕 위의 도시’를 건설하고자 했다. 이곳 모든 시민은 청교도 교회 소속이어야 하고, ‘최고 법정(General Court)’의 통치에 예속됐다. 이곳에서는 청교도들이 종교는 물론, 정치 주도 세력이 됐다.
그러나 로저 윌리엄스라는 젊은 목사가 ‘최고 법정’의 권위에 도전했다. 그는 매사추세츠 식민지가 인디언 땅을 빼앗는 것과, 영국 교회와의 관계를 반대했다. 추방당한 그는 1636년 지금의 로드아일랜드에서 인디언들로부터 땅을 매입해, 정치와 종교가 완전히 분리된 아메리카 최초 식민지를 건설했다.
이민자가 계속 늘어났고, 비옥한 땅을 찾아 내륙으로 들어가는 청교도들도 늘어났다. 새로운 공동체들은 성도가 아닌 사람에게도 투표권을 줬다. 그러나 청교도 지도자들은 경건한 사회를 위해 이민 허가와 시민권 부여는 기독교인으로 제한한다는 헌장을 제정했다. 이 헌장은 이주의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선을 위함’이라고 천명했다.
최더함 목사는 “이후 새로운 약속의 땅에서 오직 성경에 약속된 자유와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며 미지의 세계를 정복하고 대자연에 감사를 드리는 믿음의 사람들이 계속해서 신대륙을 많이 찾았다”며 “오늘날 미국 역사의 정신적 지주는 바로 청교도 신앙이다. 청교도(Puritan) 권위자인 페리 밀러(Perry Miller)도 ‘청교도에 대한 이해 없이는 미국에 대한 이해가 불가능하다’고 했다”고 밝혔다.
최 목사는 “청교도들의 신앙은 하나님 뜻대로 개인의 삶을 살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교회와 사회를 세우자는 것이었다. 이것이 그들의 목표이자 대전제였다”며 “이를 위해 청교도 성직자들은 먼저 스스로 설득되고, 사람들을 설득시키며, 그 목표에 도달하도록 신앙적·사상적 힘을 불어넣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는 “바로 그 구체적 틀과 정신적 내용이 ‘언약 사상’이었다. 언약 사상은 이미 유럽 대륙에 소개됐지만 영국으로 넘어오면서 발전됐고, 청교도들은 이를 ‘개인 언약, 교회 언약, 사회 언약’ 세 가지로 발전시키면서 삶의 모든 부분을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로 정리했다”며 “청교도 개혁운동은 바로 이 언약 사상의 뒷받침으로 전개됐다. 청교도 언약 사상은 자발적 참여의식을 낳게 했고, 이는 개혁의 원동력이 됐다”고 평가했다.
청교도 운동의 7대 기준은 ①성경 중심 신앙 ②주일 성수 ③직업에 대한 소명 정신 ④자녀들에 대한 책임 ⑤바른 교회 세우기 ⑥예언서 기준을 따라 정의로운 사회와 국가 세우기 ⑦재물에 대한 청지기 정신과 십일조 생활 강조 등이다. 그들의 신학 사상은 ①오직 성경(Sola Scriptura) ②오직 믿음(Sola Fide) ③오직 은혜(Sola Gratia) ④오직 하나님의 영광(Soli Deo Gloria) ⑤오직 그리스도(Soli Christo)였다.
최 목사는 “초기 청교도들은 칼빈주의 전통을 따르는 장로교였으나, 이후 여러 개신교의 산실이 됐다. 그러나 독립파들도 많았다”며 “종교의 자유를 찾아 미국과 유럽 대륙으로 떠난 청교도들에 의해 개신교회가 여러 유형으로 발전했다. 이에 영향을 받아 영국 개신교도 장로교회, 회중교회, 분리주의교회, 감리교회 등으로 발전했다. 이처럼 청교도들은 미국 개신교회의 밑거름이 됐다”고 말했다.
최더함 목사는 “청교도를 알아야 하는 이유는, 피터 루이스의 말처럼 성경 밖에서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성경적인 사람들이고, 이들을 통해 한국교회의 현주소를 읽을 수 있기 때문”이라며 “청교도의 가정윤리는 심각한 상태의 한국 사회와 가정 파괴 예방의 지침이 될 수 있고, 한국 목회 현장의 신학 부재 현상을 ‘청교도 신학’으로 치유할 수 있다. 우리는 청교도를 통해 개혁교회의 뿌리를 볼 수 있다”고 의의를 밝혔다.
그러면서 “영국의 종교개혁(국교회)은 당시 왕이었던 헨리 8세의 이혼이라는 개인적 문제에서 출발했기에, 진정 하나님 뜻이라 보기 어려웠다. 그 개혁의 실패가 청교도를 낳았고, 그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이주해 가장 참된 성경주의자이자 모범적인 신앙인으로 살았다”며 “칼빈주의자라면 ①종교개혁의 정신 ②장로정치에 대한 자부심 ③청교도 신앙 등 3가지를 늘 가슴에 품어야 한다”고 정리했다. 이후 서문강 목사(중심교회 원로)가 ‘청교도 저작 읽기’에 대해 발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