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연호, 빈민들 섬긴 희생적 삶과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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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록, 한 점의 그림] 목사이자 작가

서부이촌동의 빈민가 평생 지켜
병들고 애처로운 사회적 약자들
빈민들 돌보면서 미술 기본 익혀
넝마꾼들 한솥밥으로 목회 시작
이촌동 생활 낭만적 묘사하기도
고통받는 이들 공감, 가장 값져

▲이연호, 도시공원이 된 언덕, 종이위에 수채, 1952.

▲이연호, 도시공원이 된 언덕, 종이위에 수채, 1952.

이연호(1919-1999)라는 이름 앞에는 여러 수식어가 붙지만, 그에게 가장 어울리는 것은 ‘빈민을 위한 삶’이었다고 본다. 그의 생애는 가난하고 병들고 애처로운 이른바 사회적 약자들과 맞물려 있기 때문에, 이들과 분리한다면 그의 예술이나 목회철학을 이해하기 어렵다.

이연호는 일제강점기 상록회 사건으로 4년간 투옥, 사상범 교화기관 대화숙(大和塾)에서 억류생활, 춘천고보 퇴학과 배재중학교 편입, 감리교신학교 입학 등 부침이 심했다. 부친의 뜻을 거역하고 신학교에 입학함으로써 집에서 쫓겨나는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해방을 맞이하였지만 기쁨도 잠시, 대다수 국민은 가난과 질병에 시달려야 했다. 그런 영향을 가장 피부로 느낀 사람들은 공동체 울타리의 가장자리에 있는 사람들, 곧 빈민층이었다. 이연호는 그들이 눈에 들어왔고 그들을 저버릴 수 없었다. 신학생 시절에는 길거리를 헤매는 거지 아이를 기숙사에 데려와, 자기 방에 재우고 재학생들에게 하루 한 끼씩 제공되는 죽을 나누어 주기도 했다.

그는 서울 아현동 호반재에서 3년간 걸인과 불구자들을 섬기다 서울의 큰 홍수로 대규모 빈민 지역이 된 한강다리 옆 서부이촌동으로 이주한다. 평소에는 동네 아이들을 한강 모래밭에 모아 예배를 드리다가, 비가 오면 자신의 방을 예배처로 개방하였다. 서부이촌동의 ‘바라크(임시로 지은 작은 집)’는 얼마 전 있었던 홍수로 침수되어 벽이 뜯겨나갔고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지붕 위 천막조각들이 바람에 펄럭이는 곳이었다. 전쟁으로 피난을 다녀온 것과 미국 유학 기간을 제외하고 이연호는 이곳을 지켰다.

1950년대 서부이촌동은 우범자들의 집단 거주지였다. 걸인, 술주정꾼, 도박꾼, 벙어리, 장님, 부랑아, 병자 등, 그들은 툭하면 서로 고함을 지르며 싸웠다. 환경이 오염되어 있었고, 각종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그런 지역을 가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의료봉사를 왔다가 이연호를 만나 양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한 젊은 여의사 정용득은 빈민의원을 개원해 무료진료 활동을 펼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했다. 정용득 여사는 자녀를 돌보며 병자들을 치료한, 이연호의 든든한 동역자였다.

이연호는 쓰레기를 줍는 넝마꾼들과 함께 한솥밥을 먹으며 목회를 시작하였다. 이촌동에서 함께 지내던 여인이 폐병으로 죽었고, 돌보던 고아는 미군부대에서 사고를 당해 다리를 잃어버리는 등 크고 작은 사건들이 잇달았는데, 그런 와중에도 그들을 위한 도움을 멈추지 않았다. 값싼 동정은 그들을 하대하는 결과를 낳으므로 먼저 ‘인격적 교류’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철학을 지니고 그들을 대했다(이연호, “외국의 빈민사업과 한국의 빈민사업”, 『새가정』,1961. 2월호, p.29).

그에 관한 소식이 ‘타임’지를 타고 세계 각국에 알려졌고, 구호물품과 성금이 답지했다. ‘타임’지 발행인 제임스 린넨(James, A. Linen)은 국내에 파견되었던 유명한 사진작가 칼 마이던스(Carl Mydans)의 말을 인용하여 “그(이연호)는 미국에서 받은 선물에 감격하며 그 기금으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주변 사람들이 대부분 병들었거나 가난에 시달리기 때문에 시급히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돕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 그는 ‘병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 교회를 짓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느낀다고 말한다.” (Time, 1948. 5. 24, 그에 관한 동정은 1948. 2. 16, 1948. 5. 24, 1950. 11. 27, 1950. 12. 11, 1953. 3. 23 등 ‘타임’지에 다섯 차례에 걸쳐 게재됐다.)

이연호 목사는 이촌동 생활이 하루하루 고역스러웠지만, 그것을 꼭 부정적으로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때 생활을 다소 낭만적으로 묘사한 대목도 찾아볼 수 있다.

“내 집은 하늘에 가깝다고 외쳐대곤 했다. 낮에는 밀레의 <농부> 그림에서도 찾을 수 없는 떨어진 옷차림을 한 절호의 모델들이 <골탄밭>에서 불을 피워가며 일을 한다. 석양이 그들의 등을 비출 때 더욱 좋다. 때때로 불후의 명작을 보는 듯한 느낌에 도취될 때가 있다(1956).”

그는 빈민을 돌보면서도 틈날 때마다 미술의 기본을 익혔다. 미국 로렌스 대학에서 유학할 때 토마스 디트리히(T. Dietrich) 교수에게 미술지도를 받았고 프린스턴대학에서 목회심리학을 전공할 때 코치 박사(Dr. Korch)로부터 기독교미술 과목도 수강한 적이 있다.

▲이연호, 왕의 손님들, 종이 위에 펜, 1961.

▲이연호, 왕의 손님들, 종이 위에 펜, 1961.

1955년 그의 개인전이 동방화랑에서 열렸을 때, 시인 구상은 빈민들의 삶을 주제로 한 그의 작품을 보고 “심각한 충격과 경탄”을 느꼈다고 운을 뗀 다음 “인류나 동포나 형제의 불행을 자신의 혈육의 불행으로 각성하고 통고(痛苦)하고 또 헌신하고 순사(殉死)하려는 자세 속에서만이 이를 조명할 수 있다”고 이연호의 실천적인 삶에서 비롯된 작품세계를 높이 샀다(구상, “작가와 현실과 소재, 그 통고의 자세를 위하여”, 경향신문, 1955. 10. 21).

<도시공원이 된 언덕>(1952)은 이연호의 초기 작품 성격을 엿볼 수 있다. 아마도 이촌동 풍경을 모티브로 한 것 같은데, 화면에는 여러 채의 집이 들어서 있고 집 앞이나 길 사이로 사람들이 나와 있는 모습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집은 지금과 같이 콘크리트나 벽돌로 지은 것이 아니라 판자를 지어올린 임시가옥 형태를 띠고 있고 지붕에는 천막과 방수종이, 그리고 널빤지로 간신히 비바람을 막을 정도의 빈민 주택이 들어차 있다.

이런 곳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은 반바지 차림의 인물들이다. 등장인물들은 집안에서 무슨 일을 하거나 바깥을 내다보거나 동네 공터에서 강아지 먹이를 챙겨주거나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 <도시공원이 된 언덕>은 전쟁의 참화에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이웃들의 모습을 담았다.

소묘 <왕의 손님들>(1961)에서는 시대의 암울한 풍상을 엿볼 수 있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시대의 불행에 무감각해진 사람들의 망각을 환기시키려 했을까. 작가는 우리 사회의 어두운 구석을 조명한다.

다리를 잃고 거리로 나온 사람은 고개를 떨구고 있으며 어깨에 지게를 인 일꾼, 구두닦이 소년과 그 뒤를 따르는 강아지, 우산을 옆구리에 낀 중년의 남성, 바닥의 장애인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작가는 펜으로 아주 세세하게 인물들의 턱수염, 이마의 주름살, 심지어 헝겊으로 기운 바느질 흔적까지 재현하고 있다. 빈민을 주제로 삼은 작품으로, 제목처럼 하나님 나라에 초대를 받은 손님임을 알려준다.

그의 삶은 시종 굶주리고 병든 이웃을 향한 애린 사상과 희생적 실천에 맞추어져 있었다. 시인 구상은 그의 작품에 대해 “피 흐르는 현실에서 작가의 고통 없이는 이 비참을 헤아릴 수 없다”고 했다. 이연호는 예수님이 그랬던 것처럼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 살며 그들의 슬픔에 공감하는 일이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값진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분명하다. 거인의 삶은 화려하지도, 거창하지도 않았다.

서성록 명예교수
안동대 미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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