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티, 열쇠는 문해력이다! 42] 쉬운 큐티의 도구 (7) 남의 신발 신기 ②
룻기, 미등록 이주 아동 떠올라
다문화 친구들 배려 실천하게 돼
룻 신발 신으면, ‘하나님 은혜’가
일렁이게 해, 일렁임 출렁임으로
이웃들에 사랑 흘러나가게 된다
큐티할 때, 남의 신발 신는 이유
‘미등록 이주 아동’이란 용어가 있다. 이주민 부모를 따라 한국으로 이주했거나 한국에서 태어난 아동 중 체류 자격이 없는 아이들을 말한다. 그 이유는 부모의 체류 자격 상실, 난민 신청 실패 등 다양하다고 한다. 이 땅에서 이방인으로 사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 그들은 법적으로도 인정받지 못하는 투명 인간이다.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조금씩 해결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 혹시 더 알고 싶은 분이 계시면 <있지만 없는 아이들>을 보시면 된다. 국가인권위원회 기획과 지원을 받아 은유 작가가 쓴 책이다.
‘미등록 이주 아동’이 떠오르는 성경이 있다. 룻기다. 룻은 모압 여인이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보기에는 너무 작은 나라의 하잘것없는 여인이다. 당시 베들레헴 사람이었던 나오미가 기근을 피해 남편, 그리고 두 아들과 함께 모압으로 이주했을 때 며느리가 되었다.
하지만 남편과 두 아들을 모두 잃은 나오미는 고향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래서 며느리들을 친정으로 보내려 했지만, 룻은 시어머니를 따라 이스라엘로 온다. 자신을 떠나라는 시어머니를 따라온 과부 룻, 그녀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룻기 2장 1-13절(쉬운성경)을 큐티하며 살펴보기로 하자. 대개 이 본문을 큐티하면 시어머니께 순종해 그리스도의 계보를 잇는 복 받은 룻을 기억하게 된다. 좋은 묵상이다.
하지만 큐티가 이 지점에서 끝나면, 내 일상이 신앙생활이 되기 쉽지 않다. ‘나도 순종해서 복 받자’는 적용은 우리 마음에 오래 머물기 어렵기 때문이다.
순종은 마음 속의 사랑이 표현되는 방식이다. 그러니까 사랑이 충만하면 넘쳐나오는 게 순종인 것이다. 적용은 억지로 실천사항을 꿰어 맞추는 것이 아니다.
깊은 묵상을 통해 깨달아 내 마음에 담은 말씀이 차고 넘치는 것이 적용이다. 쉽게 표현하자면 하나님 말씀이 나를 일렁이게 하고, 그 일렁임이 내 마음을 출렁여 차고 넘치는 게 적용이다.
그렇게 되려면 ‘남의 신발 신기’를 해야 한다. 룻의 심정을 이해해야, 그녀처럼 나도 살 수 있는 까닭이다. 그녀가 신은 신발을 신으면, 그녀의 심정이 나를 일렁이게 한다. 남의 신발을 신으면 불편해지고 그 불편한 이유에까지 마음이 닿으면 그녀의 심정이 내 마음에 들어오는 까닭이다.
2절이다. [어느 날, 모압 여자 룻이 나오미에게 말했습니다. “밭에 나가게 해주십시오. 혹시 친절한 사람을 만나게 되면, 그 사람이 밭에 떨어뜨린 이삭을 줏어오겠습니다.” 나오미가 말했습니다. “그래. 가 보아라.”]
이 문장을 묵상하며 며느리인 룻의 지극한 효심이 보인다.
그러면 ‘룻의 신발’을 한번 신어보자.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이주했다. 그녀는 동네 사람들을 모르지만, 그들은 그녀를 다 안다. 이스라엘 백성과 모습이 다른, 모압의 이방인인 까닭이다. 룻도 그들의 시선을 느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오로지 시어머니를 따른다.
필자는 ‘룻의 신발’을 신으며 동네 사람들의 시선이 주는 불편함을 느꼈다. 그러면서 필자의 마음에 떠오르는 아이들이 있었다. 큐티를 하던 당시 청소년 교육문화센터에서 중학생 방과후 아카데미에서 독서 글쓰기 수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필자가 가르치는 아이 중 다문화 친구들이 몇 명 있었다. 필자는 그들을 우리나라 아이들과 똑같이 대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그 것이 배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묵상하며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그곳에서 배우는 사실 자체가 쉽지 않은 시간일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들을 우리나라 아이들보다 더 배려해야 한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들 중에는 우리 단어 뜻을 너무 모르는 친구가 있다. 그 친구에게 시간이 들더라도 더 알려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겠다. 사실 강사에게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기 때문에 쉽지 않다. 그럼에도 조금이라도 한 걸음이라도 더 기도하며 그 친구에게 가까이 가야겠다는 다짐할 수 있었다. ‘룻의 신발’을 신으니까 가능한 부분이다.
룻은 동네 사람들의 시선을 넘어선다. 오히려 ‘혹시 친절한 사람’ 을 만나기를 바란다. 이방인이 받는 대접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혹시 친절한 사람’이 아니라, ‘전적인 배려를 해주는 사람’을 만난다. 하나님의 은혜이다.
룻의 신발을 신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일렁이게 한다. 그 일렁임이 출렁임이 되어 이웃들에게 사랑이 흘러나가게 된다. 큐티할 때 남의 신발을 신어야 하는 이유다.
이석현 목사
블로그 읽고 쓴다 운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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