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성록, 한 점의 그림] 천병근, 언약적 기반 위에 세운 예술
작가들 전쟁에도 작품 활동 계속
<삶>, 불안 속 주님 신뢰 전달해
1954년 첫 개인전, 신앙 주 테마
기독 미술 토착화에도 깊은 관심
C. S. 루이스는 ‘전쟁의 학문(『영광의 무게』, 홍종락 역, 홍성사, 2019)’에서 “전쟁이 인간 영혼의 관심을 계속 사로잡기에는 본질적으로 부족하기에, 우리의 관심을 독차지하지 못하도록 전란 중일지라도 지적 활동과 미적 활동을 계속할 것”을 권고한 바 있다.
루이스에 호응이라도 하듯, 한국 크리스천 작가들은 6.25 전쟁 기간에도 붓을 놓지 않았다. 재료가 떨어질 때까지 작업에 전념했다. 천병근 작가가 그런 인물 중 한 명이었다.
일본 도쿄 YMCA 예술 주임이자 기독교 화가인 야마다 미노루(山田 稔)에게 사사하고 귀국한 천병근 화백(1928-1987)은 목포성결교회에서 목회하던 부친을 따라 목포에 정착했으며, 목포에서 미술 교사로 교편을 잡고 있었다.
그러던 중 6.25 전쟁 발발로 부산으로 피난을 가 있었다. 그의 작품 발표도 바로 이 시기와 일치한다. 1950년 민총 구국대가 주최한 <종군 속사미술전>(9. 7- 9)에 <기독 의용사(義勇士)>, 1951년 3.1절 미전에 출품한 <세례>, 8.15 기념전에 출품한 <이사야서의 권위>, 1952년 8.15 기념전에 출품한 <성모자> 등 기독교 신앙을 주제로 한 작품들로 특징지어진다.
1953년 대한미술협회전(부산 향상의 집, 4. 8- 4. 14)의 출품작 <삶>은 한복을 입은 노부부가 예배를 드리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전경에는 합장한 남성과 성경을 손에 쥔 여성, 후경에는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가 보인다. 예술, 역사,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주한 미대사관 토마스 캐실리(Thomas Cassilly Ⅲ, 1923-2021)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삶>이란 작품에서 느낀 첫 인상은 매우 진실한 예술작품이라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특징은 작가 자신이 느끼지 않고서는 도저히 착안할 수 없을 것이며 색채의 부드러운 솜씨와 작가의 훌륭한 구상력에 더욱 놀랍다. 작가의 대담한 필법은 인물의 두부(頭部)와 합장한 손과 부인의 손에 쥐어진 성서 등의 조각적인 수법으로 부부의 신앙생활을 한층 더 두드러지게 하며 검은 선은 경건과 강인함을 표현한다(캐실리가 작가에게 보낸 편지, 1953. 4. 17) .”
T. 캐실리를 매료시킨 부분은 노부부의 모습이었다. 특히 전란 중에서도 소망을 품은 부부의 경건한 모습이 특별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이 작품은 해당 인물을 단순히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힘 있는 필선과 임파스토, 그리고 후경에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배치하는 등 작가의 치밀한 화면구성이 만들어낸 결과이기도 하다.
작품을 발표한지 70년을 훌쩍 넘긴 지금 보아도 묵직한 울림을 안겨주는 작품이다. 지극히 불안한 상황에도 부부는 주님을 신뢰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려주고 있다.
참고로 이 작품은 캐나다 연합장로교 의료선교사 엘다 스트러더스(Elda Daniels Struthers,1906-1997)에 의해 캐나다 웨스트데일 연합교회(Westdale United Church)에 기증됐다가, 유족의 요청으로 65년 만에 국내로 반환돼 2019년 조선일보 미술관에서 개최된 유작전에 공개된 바 있다.
그의 생애에 큰 영향력을 미친 인물은 그의 부친 천세광 목사(1904-1964)였다. 천세광 목사는 일제시대 네 차례 옥살이를 했다. 그 중 한 번은 6.10 만세운동 때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일경에 의해 체포돼 옥고를 치른 일이다.
다른 세 번은 선교와 민족 복음화를 위해 힘쓸 때 일제가 교회의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이를 거부하는 운동을 펼쳤다는 이유로 1940년 진주 형무소에서 7개월간, 1943년 성결교회 강제 해산 시 전국 교역자들을 대상으로 검속할 때 붙잡혀 대구 형무소에서 9개월간 옥살이를 했고, 1945년 8월 11일 사상범 예비 검속 때 다시 체포돼 옥중에서 8.15 해방을 맞았다. 불의를 미워하고 교회와 나라가 곤경에 처했을 때 핍박과 희생을 피하지 않았던 지도자였다.
부자는 서로 다른 길을 걸었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 공통점이란 신앙을 일상의 양식으로 삼아 사는 것이고, 또 다른 점은 그것을 삶 속에서 구현하는 것이었다. 그로 인해 천병근은 기독교 신앙을 삶의 기준으로 삼은 예술가로 성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천병근의 첫 개인전은 휴전 직후인 1954년 광주 기독청년회관에서 개최되었다. 출품작은 <소묘>, <정물>, <수평선>, <언덕>, <소녀와 유자>, <귀향>, <포스>, <소녀와 망아지>, <목동>, <자화상>, <파도>, <아담과 하와>, <세례>, <살로메>, <주와 함께>, <피에타> 등 22점이다. 현존하는 작품은 제한적이지만 대체로 풍경과 인물이 주축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개인전의 주축이 된 것은 기독교 신앙을 테마로 한 것인데, 대표작으로는 <피에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1954년 전시장에서 찍은 사진 배경에 나타나 있다.
십자가에서 내려진 그리스도를 묘사한 <피에타>는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의 시신을 붙들며 애통해 하고 있다. 그림 우측에는 나무 십자가가 세워져 있고, 좌측에는 예루살렘 성전과 그 위에 떠 있는 태양이 목격된다. 흑백사진이라서 색조까지 파악할 수 없으나 윤곽을 두른 검은 필선효과와 디테일을 생략하는 대신 매스로 처리한 표현주의적 수법이 눈에 띈다.
두 번째 개인전은 다음 해인 1955년 광주 미문화원 화랑에서 개최됐다. 전시를 기획한 주인공은 앞에서 소개한 토마스 캐실리였다. 캐실리는 대한미술협회전에 출품된 <삶>을 보고 그의 초대전까지 마련하게 되었다. 이 개인전에는 <소녀와 망아지>, <월광>, <초상>, <해바라기>, <유자와 소녀>, <자화상>, <어린 양 예수> 등 22점이 출품되었다.
이 중에서 <어린 양 예수>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소년과 어린 양을 소재로 한 일종의 우의화로 그림 옆에 초가집과 성(城)을 배치했다. 이를 본 김환기는 “그의 예술은 향토적인 냄새가 강렬하다. 이 향토적인 것- 우리가 세계 미술에 들고 나갈 것은 이것이 아닌가 한다(천병근 기념사업회, 『천병근 화집』, 에이엠아트, 2019, 242쪽)”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작가는 기독교 미술의 토착화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1956년 제8회 대한미술협회전에 출품한 작품 <자애>가 예수에게 입 맞추는 마리아를 표현한 것이라면, 1959년 동화화랑 개인전 때 발표한 <월광>은 부엉이와 호랑이, 두 마리의 사슴 사이로 한복을 입은 여인이 성경책을 읽고 있는 구도로 되어 있다.
두 작품은 천병근이 선교사들을 통해 들어온 기독교가 문화적·정서적으로 수용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익숙한 민속적인 모티브를 배치했다.
평소 “가장 훌륭한 예술은 가장 종교적인 것”이라는 말을 좋아한 그는 기독교적 퍼스펙티브를 갖고 작품에 임했다. 1959년에는 그의 주도로 <성미술전(중앙공보관 화랑)>을 개최했는데, 주요 작가로 천병근, 박수근, 김순련, 이철경, 천병옥, 이항성, 천경자 등이 참여했다. 신자뿐 아니라 비신자도 참여한 친목 성격의 전시였다.
전시 기획 동기까지 자세히 파악할 수 없으나, 구한말 선교사들에 의해 개화를 맞이한 것처럼 새 시대를 맞아 기독교 신앙에 바탕한 문화를 확산하고 복음의 진리를 알리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는 불모지였던 1950년대 한국 화단에서 기독교 시각예술 발전을 위해 힘썼던 선구적 화가였다.
서성록 교수
안동대 미술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