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재 선교사의 ‘아프리카에서 온 편지’ 안식 (11) 말 타고 온 선교사
남원 가까운 곳 작은 주막집에
한 외국인 말 타고 들어와 묵어
성경 놓고 떠났다 다시 와 전도
그 선교사 발자취 찾으러 美로
유진 벨과 보이열 선교사 후보
가장 근접 후보 루이스 테이트
우리 신앙의 뿌리는 어디인가? 두말할 것 없이 2천 년 전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다. 그러나 전한 사람이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믿겠는가? 보낸 사람이 없다면 누가 우리에게 전하겠는가(롬 10:14-15)?
모든 사람은 누군가로부터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는다. 나에게도 복음의 은인이 있다. 어릴 때 할아버지에게 들었던 낯선 외국인이다. 그가 미국에서 온 선교사라는 것 말고,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젊은 시절 나는 오랫동안 그를 잊고 있었다. 그러나 철이 들면서 나는 다시 그를 기억했다. 그리고 아프리카로 떠난 후 나의 작은 선교 경험을 통해 나는 그를 더 그리워하게 되었다.
오래 전에(정확한 때는 돌아가신 할아버지만 아신다) 우리 증조할머니는 젊어서 남편을 잃고 과부로 4남매를 키우고 있었다. 유난히도 가난하던 시절, 할머니가 살았던 지리산 골짜기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여자 혼자 먹고 살 방법이 없었다.
그래도 생활력이 강한 할머니는 네 남매를 키우기 위해 남원 가까운 곳에 식당 하나를 차렸다. 말이 식당이지 아마 밥이나 술을 팔고 손님도 재우는 작은 주막집 같은 곳이었을 것이다.
어느 날 이 마을에 한 외국인이 말을 타고 들어왔다. 할머니는 낯선 그에게 정성껏 음식을 대접하고 잠자리도 돌보아 드렸다. 다음 날 손님은 감사하다며 책 몇 권을 놓고 떠났는 데, 그 책은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이었다.
무슨 책인지 몰라 궁금하던 차에, 얼마 후 또 다시 그가 나타났다. 아침 일찍 떠나려는 그를 할머니가 붙잡고 물었다. “당신은 누구며, 이 책은 무슨 책입니까?” 그는 자신이 미국에서 온 선교사라고 말하고, 이 책은 하나님 말씀인 성경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할머니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할머니는 자식들과 함께 예수님을 영접했다.
얼마 후 전주에 신흥학교라는 미션스쿨이 생겨나 할머니는 그중 둘째 아들을 보냈고, 후에 그가 고향에 교회를 세우고 자신의 형을 영수(장로)로 세웠다. 그가 바로 우리 할아버지다.
이 이야기가 얼마만큼 사실에 근거한지는 모르지만, 나는 어릴 때 이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들었고, 나중에는 만나보고 싶은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목회하는 어느 날 나는 결심했다. 그가 누구인지 반드시 알아보겠다고, 그리고 그에게 감사하겠다고.
2년 전 나는 이스라엘 베들레헴 BBC(Bethlehem Bible College)에서 한 학기 동안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때 만난 사람이 미국의 황재진 목사였다. 그는 한국교회에 온 초대교회 선교사들에 대한 각별한 애정과 함께, 그들을 현장에서 연구하고 있었다.
나는 그때 무슨 영감에 사로잡혔는지, 만일 내가 후에 미국에 가면 선교사들이 남긴 발자취를 밟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2년 후 하나님은 인식년을 맞은 나를 미국 동부 지역(사우스캐롤라이나, 노스캐롤라이나, 버지니아, 메릴랜드, 뉴욕 등)을 지나가게 하셨다. 그리고 황재진 목사와 그의 형 황재경 장로가 그 길을 인도하게 하셨다.
불랙마운틴에서 황 목사를 만났을 때부터, 나는 오래 전 할머니에게 복음을 전했던 이름 모를 선교사가 숲 속에 있는 선교사들의 집에서 “웰컴” 하며 뛰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가 누구인지 특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미국장로교 내한선교사 총람(1884-2020)’을 통해 후보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1884년부터 2020년까지 136년 동안 950명의 장로교 미국 선교사들의 출신, 학력, 사역 등이 소개돼 있었다. 그 중에서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당시 호남과 충청은 미국 남장로교 선교지역)를 집중적으로 살펴보았다.
두 사람의 후보자가 나왔다. 유진 벨(Eugene Bell, 1893-1925)과 보이열(Boyer Timothy Elmer, 1893-1976)이었다. 그러나 유진 벨은 주로 전남 지역에서 활동했고, 보이열은 1920년대부터 사역했기 때문에 할아버지 상황과 맞지 않았다. 1897년생인 할아버지(큰할아버지는 1887년생) 나이로 보아, 그는 1900년대 초 전북 지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여야 했다.
황재진 목사와 토론 끝에, 가장 가까운 후보가 나타났다. 1892년부터 전주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루이스 테이트(Lewis Boyd Tate, 崔義德) 선교사였다. 북장로교 출신으로 의대를 중퇴한 그는 시카코 맥코믹 신학교를 졸업했다. 때마침 언더우드가 안식년을 맞아 미국에 와 맥코믹을 방문해 한국을 소개할 때부터 그는 한국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어 테네시의 내슈빌 집회에서 또 다시 언더우드의 강의를 들을 때, 그는 멀고 가난한 나라 조선을 향해 선교사로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의 여동생 매티 테이트(Mattie Tate)가 포함된 7명의 선교사들과 함께 1892년 11월 3일, 일본을 통해 한국에 도착했다.
1895년 전주에 부임해 1925년 은퇴할 때까지 테이트는 30년 동안 전주 지역에서만 활동했다. 당시 전주 선교본부는 네 지역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그는 동부 지역을 맡았다. 동부지역은 임실, 남원 운봉, 정읍, 금구, 태인이었다.
그는 이 지역을 일일이 말을 타고 다니며 전도했는데, 그가 생전 개척한 교회는 78개였고 직접 세례준 사람도 1,500여 명에 이르렀다. 그가 세운 교회 중에는 전북 지역 첫 교회인 전주 서문교회와 조덕삼·이자익 이야기로 유명한 김제 금산교회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가장 큰 선교 방법은 순회전도였다. 그는 말을 타고 가가호호 방문해 전도했다. 그가 전주를 떠나 순회전도를 하면 보통 20여 일을 지방에 머물렀다. 그는 마을 구석구석을 방문해 전도하고 성경을 나눴으며, 하루 보통 9시간을 걸었고 낮에는 거의 야외에서 지내야 했다. 우리 할머니처럼 그에게 쉴 곳을 마련해 주는 것은 그에게 특별한 대접에 속했다. 기록에 의하면 1905년 한 해동안 그는 500여 마을을 방문해 4천 권 이상의 성경을 나눠주었다.
테이트는 1905년 전주에서 의료선교를 하던 잉골드(Mattie Barbara Ingold Martha)와 결혼했다. 잉골드는 전주 초가집에 진료소를 열어 많은 환자들을 치료했으며(1902년 상반기에만 1,586명 진료, 51회 말 타고 왕진), 이것이 전주 예수병원의 시작이었다.
몸이 약한 테이트에게 한계가 오기 시작했다. 1918년 순회전도 중 걸린 독감으로 크게 고생한 후 지병인 심장병, 동맥경화, 고혈압이 악화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은 채 하루 28km 이상을 걸어서 순회전도를 계속했지만, 건강이 악화되자 1925년 은퇴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심장병에 유리한 따뜻한 플로리다에 정착했다. 그러나 고질병인 심장마비로 끝내 1929년 별세했고, 여동생 매티는 1940년, 부인 잉골드는 1962년 각각 별세했다. 그리고 지금도 예수병원 선교사의 무덤에는 태어난지 며칠만에 죽은 테이트와 잉골드의 딸이 묻혀 있다.
아, 지금도 이 세 사람이 없었으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들이 너무 많다. 만일 테이트 선교사가 없었다면 100년 이상 된 전북 지역 교회 100여 곳이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전주 서문교회도 김제 금산교회도 없었을 것이다. 만일 여동생 매티가 없었다면 기전여고가 없었을 것이고, 잉골드가 없었다면 예수병원도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 가정의 수많은 교인들, 목사, 장로도 없었을 것이고, 나 또한 여기 없었을지 모른다.
무엇으로 감사할까? 그렇게 자신을 희생하며 우리에게 준 사랑을. 무엇으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할까? 그들의 땀과 눈물과 헌신을. 우리 모두는 알아야 한다.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은 우연히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누군가 우리 앞서 희생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도 그들이 한 것처럼 남은 생을 희생하고 봉사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그들처럼 우리도 멀고 가난한 또 다른 나라에 가서 사랑의 꽃씨를 뿌리거나 최소한 우리가 사는 곳에서 믿음의 꽃을 피우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가 이 땅을 떠난지 100년 후에도 테이트 남매처럼 기억될 만한 인생을 살고 있는지 물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사랑하는 테이트와 매티, 잉골드, 그리고 이 땅에 와서 수고하고 헌신한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하며 사랑의 마음을 영국의 아프리카 선교사 찰스 토머스 스터드(C. T. Studd)의 말로 전하고 싶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며 나를 위해 죽으셨다면, 그분을 위한 나의 어떤 희생도 결코 크다고 할 수 없다(If Jesus Christ be God and died for me, then no sacrifice can be too great for me to make for Him)”.
“한 번뿐인 인생은 곧 지나가리라. 그러나, 그리스도를 위해 한 일만 영원하리라(Only one life, will soon be past, only what’s done for Christ will last)”.
이윤재 선교사
우간다 쿠미대학 신학부 학장
Grace Mission International 디렉터
분당 한신교회 전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