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한강에게 보내는 삼촌의 편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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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 편지 이유, 조카의 소설 작품 세계에 대한 의견 등

한강 작가의 삼촌인 한충원 목사님이 페이스북에 작성한 공개 편지를 장문이라 두 차례로 나눠 게재합니다. -편집자 주

▲(왼쪽부터) 한충원 목사와 한강 작가.

▲(왼쪽부터) 한충원 목사와 한강 작가.

사랑하는 조카, 노벨문학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하네. 조카 개인의 크나큰 영광이요 아버지 한승원 작가 형님 가문의 영광이요 대한민국의 쾌거네. 나도 조카와의 관계를 아는 지인들로부터 꽤 많은 축하 메시지와 전화를 받았다네.

나도 지난 40여 년 동안에 100여 편의 논문과 연구보고서를 쓰면서 체험한 바로는 한편의 작품을 쓴다는 것이 마치 자신과의 씨름처럼 힘든 일인데, 하물며 상상의 세계를 글로 옮기는 창작은 얼마나 힘든 일이겠는가? 오죽하면 창작 활동을 임신과 출산에 비유하겠는가? 특히 분량 면에서 볼 때도 소설작품은 다른 장르에 비해 창작의 진통이 상상하기가 힘들 것이네. 나도 과거에 몇 편의 중․단편소설과 시와 수필 등을 써보면서 조금은 경험한 일이라서 공감할 수 있다네.

조카가 그런 세월을 30년 가까이 살아오면서 이룩한 위업에 대하여 어떻게 몇 마디 말로 존경과 찬사를 표현할 수 있겠는가? 여하튼 가슴 벅찬 축하를 보내네.

게다가 조카를 낳고 키우신 아버지 한승원 작가 형님 내외분에게도 뜨거운 축하를 보내드리고 싶네. 어쩌면 형님은 자제인 조카를 통하여 젊은 날의 고된 나날에 대한 보상을 받으셨다고도 할 수 있다네. 교사 생활과 창작 활동을 겸하면서 자녀 3명을 부양하고, 어린 동생 3명을 돌보시며, 대가족 집안의 가장 역할까지 하셨으니 형님은 인간적으로 거인이셨네. 그리스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희랍인 조르바”의 주인공 ‘조르바’나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초인과 같은 모습이었다고 할까?

그래서 17살 아래 동생인 나의 청소년 시절에 형님은 나의 영웅이었네. 형님은 내게는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한 분이었네. 어떻게 보면, 나는 그분의 분신처럼 성장했다네. 형님은 나의 문학적 재능을 알아보고 나의 병역특례 기간(5년)이 끝나면 김원일·김원우 작가와 같은 형제 작가로 살아가자고 제안하셨네. 나는 형님의 은덕을 갚고자 형님이 교사직을 그만두고 작가로 활동하시던 초기 4년 동안 나의 월급 절반 이상을 형님에게 보내드리면서 형님의 전업작가 생활을 도왔다네. (그때 조카는 초등 시절이었네.) 게다가 형님은 나의 결혼 주례로 작가 이호철 선생님을 세워 나의 작가 활동 발판을 마련해주실 만큼 나를 아끼셨다네. 마치 아들을 챙기듯이.

내가 손위·아래 누이 둘과 함께 형님 집에서 살았던 10년 세월의 힘들고 슬프고 어려웠던 시절이 떠올라 목이 메네. 아버지의 생전까지 꽤 괜찮았던 우리 집안(9남매)은 아버지의 소천 이후로 갖가지 비극적인 불행들이 덮쳐오면서 암울했고 가세까지 크게 기울었다네. 그래서 나는 중등 1년부터 누이 둘과 함께 광주에 사시던 형님에게 맡겨져 함께 지내게 되었네. 우리는 두어 번의 이사 끝에 형님의 처가에서 지어준 한옥집에서 살았네.

그 한옥집은 광주 신역(新驛) 뒤와 로켓 배터리 공장 옆에 위치하였는데, 비포장도로와 퇴비 적치장에서 몰려오던 먼지와 파리를 막아내야 했고, 밤마다 근처 판자촌 남정네들의 객기 부리는 소리를 들어야 했네. 그때 조카는 유년이었고 나는 고등․대학 시절이었네. 그 시절의 추억들이 가슴 아리게 되살아나네.

내가 고등 2년 어느 날 늦은 밤에, 형님은 술에 취해 퇴근해서 나를 툇마루로 불러내더니 나한테 이런 말씀을 하셨네. “우리 집안은 대대로 문필가만 있다. 무관도 있어야겠다. 네가 육군사관학교에 가는 것도 좋겠다. 이사장님이 나를 불러서 내가 그런 작품을 계속 쓰면 나를 해직시키라는 경고를 어떤 기관으로부터 받았다는구나. 군사독재정권이 싫지만, 네가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는 것도 괜찮겠다. 어떤 작가는 자기 형님이 고급장교라서 잡혀가도 바로 풀려나더라. 너한테 정말 미안하구나.” 형님과 나는 툇마루에서 서로 껴안고 한참을 울었네.

형님은 교사 생활과 창작 활동을 병행하기가 힘들었는지 자주 아프셨다네. 창작 활동에만 전념하길 갈망하셨지. 나는 거의 매일 밤과 새벽에 형님의 타자기 두드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중․고․대학을 마쳤다네. 측간(변소)에 들어가면 형님이 퇴고하신 원고지(휴지)를 읽느라 다리에 쥐가 나기도 했다네.

조카의 어린 시절의 모습이 눈에 선하네. 항상 차분하고 다소곳하며 혼자 방에 누워서 무슨 생각엔가 골몰하곤 하던 조카의 모습이 기억나네.
조카가 아기 때 엄마 형수님이 담장 없는 1층 양옥집 마당에서 밥 짓는 불을 지피는 동안에 조카를 업어주었는데, 조카가 하도 울어대는 바람에 짜증이 나서 내가 조카의 엉덩이를 꼬집어 더 울렸다네. (이 자리를 빌려 용서를 구하네.)

내가 대학 1년 때 교양 영어 작문 리포트를 써놨는데, 5살 조카가 내 책상에 올라가서 리포트에 색연필로 그림을 그려놓아 황당했다네. 리포트를 새로 베껴 쓸 시간이 없어서 색연필 그림이 그려진 이유를 리포트 위에 써서 그대로 제출했는데 교수님한테서 ‘Excellent’를 받았던 일이 떠오르네.

형님의 제안으로 조카가 중등 2년에 영어교과서를 다 외우면 상금을 주기로 했었는데 석 달 후에 조카는 거짓말처럼 한 자리에서 교과서 전체를 연습문제까지 단 한 문장도 틀리지 않고 다 외웠네. 나는 기겁했고 그때 이미 조카의 비범함을 직감했네. 나는 어깨에 힘주면서 형님 내외분 앞에서 조카에게 상금을 주었다네.

지금부터 18년 전에 형님의 김동리문학상 시상식에서 내가 조카의 얼굴을 본 이후로 편지로나마 대면하는 것은 처음이네. 지금부터 37년 전에 셋째형님의 장례식에서 그 형님의 구원 문제로 형님과 나 사이에 큰 충돌이 일어난 후로 형님 집안과 소원해져 있었지만, 그래도 나의 인생에서 은인이신 형님의 문학상 수상을 축하하려고 갔던 자리였네. 그 후로 지금까지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던 조카를 가끔 매스컴을 통해 보곤 했다네.

그 동안에 멀리서 조카의 맨부커상 수상 소식을 들었지만,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듣자 나는 복잡한 감정에 빠졌다네. 솔직히 말해, 기쁨에 앞서 적잖은 충격과 놀라움과 걱정에 빠졌다네. 노벨상 수상으로 인하여 오히려 형님 집안이 하나님의 구원에서 더 멀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과 조카의 작품에 대한 평가로 한국 사회가 두 쪽으로 갈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라네. 20여 일이 지나는 동안 충격과 놀라움이 많이 사그라지고 마음이 정리되어 이제야 축하 편지를 보내네. 형님 집안과 아예 단절된 상태에서 조카의 전화번호나 주소를 전혀 몰라 불가피하게 공개편지를 보내게 되었네.

사실, 조카와 나의 단절도 예수 그리스도 신앙을 미워하고 배척하신 형님에게서 비롯되었음을 이 자리에서 밝히고 싶네. 지금부터 39년 전에 2년 동안 형님과 나는, 알코올중독에 빠져서 인생이 망가져 가는 셋째형님의 치유 방법을 놓고 두 해 동안 서로 첨예하게 갈등하였네. 그러다가 셋째형님은 돌아가셨고 그 형님의 장례식 기간에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어떤 사람도, 어떠한 것(문학 포함)도 인간의 영혼을 구원할 수 없다”는 나의 주장에 분노하여 형님은 3일 동안 나를 가혹하게 핍박하셨네. (그 핍박이 어떤 것인지는 이 자리에서 말할 수 없네.) 형님은 “피를 뽑고 뼈를 갈듯이 글을 써서 너를 가르쳤는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면서 그 말을 취소하라고 요구하며 삼우제 날 새벽까지 나를 심문하셨다네.

문학을 목숨처럼 여기면서 작가 활동을 해오셨던 형님에게 “문학에는 구원이 없다”는 나의 말이 걷잡을 수 없는 분노를 일으켰던 것이네. 그때부터 형님과 나는 서로 다른 길을 걸어오게 되었네. 40대 중반에 잠깐 세속에 빠졌지만, 나는 지금까지 38년 동안 예수 그리스도 신앙으로 영혼과 인생이 망가진 이웃들이나 붕괴 직전의 가정들을 회복시키는 일에 전념해왔다네. 하지만 형님 집안의 구원에 대한 나의 눈물의 기도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네.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 이후로, 국내에서 노벨문학상의 권위는 물론 조카의 작품에 대한 외설성 비판과 청소년 유해성 시비가 일어나고(전국학부모단체의 반대와 국회에서 논란), 5.18 민주화운동과 4.3 사건에 대한 평가 시비가 새삼 일어나고, 주한 스웨덴 대사관 앞에서 노벨문학상 취소와 한림원 규탄 시위까지 벌어지며, 조카의 작품을 비판했던 어떤 작가가 특정시민단체에 의해 고발되는 상황을 보면서 나는 이 나라의 장래가 심히 걱정되었다네.

최근에 자주 SNS 단체방에 조카의 작품에 대한 비난 글들이 게시되고, ‘조카의 작품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지인들의 전화까지 받을 때는 참담하기 그지없었네. 온 국민이 함께 기뻐해야 할 일인데, 조카의 작품에 대한 극단적인 비난이 쏟아지고 나라가 두 쪽으로 갈라지는 지경에 이르니 그저 가슴이 아플 뿐이네.

나는 조카의 혈육이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도(신학)를 공부하여 안수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목양하고 있는 목회자요, 초등시절부터 29살까지 시간만 나면 국내는 물론 세계 문학․사상 서적들을 탐독하다가 21살에 처음 써봤던 단편소설이 대학문학상에 당선되고 22살에 두 번째 써 봤던 단편소설이 지방신문의 신춘문예(소설 부문)에 당선되었고 그 후로 29살까지 작가의 길을 준비했던 휴면(休眠)작가요, 또한 부강한 조국을 후손들에게 물려주려고 45년 동안 국방연구개발 현장에서 세 번이나 죽음의 고비를 넘기면서 일했던 공학자 출신이네.

이런 인생을 살아온 삼촌으로서 조카의 작품에 대한 논란거리를 중심으로 포괄적인 의견을 제시하고 조카의 앞으로의 작품 활동에 대해서 제안하고 싶다네. 어찌 되었건 나의 청소년 시절에 내게 은덕을 베푸신 형님의 자제요 내 등에 업어주기도 하고 예뻐하면서 함께 자란 조카의 작품에 대하여 논한다는 것 자체가 마치 가슴에 생채기를 난 것처럼 마음이 아프네.

▲노벨문학상 수상 후 한강 작가의 작품들이 한 서점에 전시돼 있다. ⓒ크투 DB

▲노벨문학상 수상 후 한강 작가의 작품들이 한 서점에 전시돼 있다. ⓒ크투 DB

이 글을 인터넷에 올리자마자 수많은 사람이 나를 향해 ‘나쁜 놈’이라고 돌팔매질할 수도 있음을 익히 알고 있지만 이 편지를 쓰지 않을 수 없네. 편지를 써야 할지 말지를 하나님께 여러 번 여쭤보기도 했네. 보름 남짓 기도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이 편지를 쓰면서 몇 번이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르겠네.

나는 대의를 위하여, 나의 조국의 백성들과 후손들의 영혼을 위하여 이 편지를 공개하기로 결심했네. 이 시대는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더욱 급속도로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성적으로 타락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네. 우리나라마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거스르는 동성애의 합법화가 시도되고, 영혼까지 파괴하는 성폭력이 수없이 자행되며, 이혼율과 자살률이 OECD 국가 중 거의 1위를 차지하는 것은 통탄할 일이네.

따라서 문학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에 대하여 사회․윤리적인 책임 의식을 갖게 하고, 우리 국민이 문학작품에 대하여 분별력을 갖도록 하며,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도록 애쓰는 목회자로서의 사명감으로 이 편지를 공개하게 되었네. 깊이 이해하길 바라네.

첫째, 노벨문학상의 권위에 관한 의견

노벨상은 어쩌면 세계 최고의 상이라고 할 수 있네. 매년 물리학, 화학, 생리학․의학, 경제학 분야에서 학문적 업적이 뛰어난 학자들에게 수여되는 영광스런 상이기 때문이네. 나도 과학기술 분야에서 종사해서 잘 알지만, 과학상은 우리나라의 과학․의학자들도 관심이 많은 상이라네. 한데, 문학상은 과학상과는 달리 대중적으로 더 큰 관심을 받는 상이지.

조카의 수상은 우리 국민에게 큰 충격과 감격을 안겨 준 거라네. 외국어로의 번역이 어려운 한글의 특성상 노벨문학상의 변방으로 여겨지던 한국에서 처음으로 수상자가 나왔으니 얼마나 놀랍고 기쁜 일이겠는가? 역사적 사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네.

그런데, 한편에서는 조카의 수상에 대하여 비판적이고 회의적인 얘기가 나오니 정말로 마음이 아팠다네. 왜 온 국민이 기뻐하지 않을까? ‘노벨번역상’이 더 낫겠다는 비아냥 조의 시비, 지구촌 지역 안배 차원이나 격년으로 남성․여성을 번갈아 가면서 수여하는 정치적 방식에 관한 시비, K-문화 세계화에 편승했다는 시비, 국내의 어떤 작가들이나 이웃 나라의 작가들과 비교하는 중량감 시비, 4.3사건과 6.25 전쟁과 5.18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시비가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네. 질투와 시기 때문에 비판한다고 이런 시비와 비판들을 무시할 수만은 없다고 생각하네.

사실, 나도 20대에는 소설 문학 작가로 살아갈까 하고 고민했던지라 노벨문학상에 관심이 지대했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찾아오셨던 30세 전까지는 매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품들을 사서 탐독했었다네. 그래서 노벨문학상 작품들과 소위 세계 명작이라고 일컬어지는 작품들을 비교해 볼 수 있었다네. 수많은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중에 그때만 반짝했다가 잊힌 작가들이 대부분이네.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겠지만, 노벨상 수상 작품 중에 나를 감동시킨 작품들이 별로 없었다네. 하지만 게오르규, 헤밍웨이, 스타인벡, 레마르크, 시엔키에비치 등의 작품들은 읽은 지 40여 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다네. 이처럼 노벨문학상 수상 작품이라고 후세 사람들에게 다 사랑받진 않는다네.

그리고, 노벨상위원회는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윈스턴 처칠’ 수상에게 평화상을 주기가 석연찮으니까 그의 자서전 ‘제2차 세계대전 회고록’을 근거로 그를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하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졌다네. ‘사르트르’는 노벨문학상을 거부했는데, 이는 작가와 철학자란 자신이 속한 체제나 이념에 얽매이거나 동조해서는 안 된다는 신념 때문이었다네. 사르트르의 이런 신념은 국내 작가들이 4.3 사건, 6.25 한국전쟁, 5.18 민주화운동 등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면서 작품을 써야 하는지를 교훈해주네.

내가 감동적으로 읽었던 세계명작소설들은 당시의 어떤 체제나 이념을 비판하거나 옹호하지 않고 주인공들이 처한 상황과 그들이 그 상황을 헤쳐나가는 모습을 보여주며 독자들에게 어떤 체제나 이념에 대한 판단을 맡기는 식으로 풀어갔다네.

또한,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지 않았네. ‘베토벤’이 악성(樂聖)이라고 불린다면, ‘톨스토이’는 성인(聖人)으로까지 불린다는 것을 잘 알 것이네. 그는 단순히 소설가만이 아니라 인류의 도덕적 방향을 담아낸 사상가였으며 자신의 소설작품인 ‘부활’ 속의 주인공처럼 살았던 작가였다네.

이처럼 노벨문학상은 분명한 수상 기준이 없이 수여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네. 따라서 조카는 노벨문학상을 받았다고 해서 작가로서 정상이요 전부라고 생각하지 말고 이제부터가 시작이라 생각하고 후세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명작’의 반열에 들어갈 작품을 남기길 기원하네.

둘째, 조카의 소설 작품 ‘채식주의자’에 대한 외설성 비난과 청소년 유해성 논란에 관한 의견

소설은 허구(虛構)이지만 현실을 기반으로 하는 글이네. 허구는 상상에서 오지만, 그 상상을 글로 표현할 때는 책임이 뒤따른다네. 그래서 상상을 글로 표현할 때는 절제가 있어야 하네. 숨겨야 할 것은 숨겨야 하네.

도둑놈도 자기 자식한테는 도둑질하는 것을 숨긴다네. 자식 딸린 매춘부도 자기 자식한테 몸 파는 장면은 안 보여준다네. 불량 식품을 파는 장사꾼도 자기 자식한테는 그 불량 식품을 먹이지 않는다네.

불의하고 못된 사람들도 이처럼 행동하는 것은 그들에게도 창조주 하나님이 주신 양심이 있기 때문이네. 그 일말의 양심도 없다면 인간은 영혼이 없는 동물과 다를 바 없네. 육체의 욕구가 이끄는 대로 행동하기 때문이지.

피해자인 내가 아무리 억울하다고 해서 할 말 다 한다면 내가 속한 공동체는 깨질 수 있네. 그래서 어떤 경우는 죽을 때까지 비밀을 품고 간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가해자가 죽은 뒤에 그 비밀을 말하거나 그 후손들의 명예를 생각해서 영원히 비밀에 부칠 경우도 있다네. 이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양심이며 기본적인 도덕률이네.

따라서 작가는 양심과 기본적인 도덕률을 지키는 범주 안에서 작품을 써야 하네. 자기가 속한 사회에 대하여 도덕적․윤리적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네. 돈 버는 데 혈안이 된 포르노 작가가 아닌 이상 작가에게는 그런 기준이 있어야 하네. 작품 구도상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면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스스로만이 아니라 인류 공동체를 파괴하는 행위이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상황 윤리로 패륜적인 것이 정당화된다면, 근친상간 행위도, 수간(獸姦) 행위도, 심지어는 인육(人肉)을 먹는 범죄 행위도 얼마든지 시적이고 서정적인 문체로 미화시킬 수 있네. 그것은 타락의 극치네. 그런 작가는 인류공동체 속에서 살아가길 포기한 사람이라고 지탄받을 만하네. 그런 작가는 윤리적 타락의 선봉장이 되는 것이고 그 사회가 소돔․고모라와 같이 불 심판을 받게 되는데 불쏘시개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네.

사람들의 영혼과 인생을 망가지게 하고 파괴하는 데 도움을 준 작품을 써서 유명해지고 돈을 많이 번다면, 그 작가는 30여 년 전에 아프리카 수단에서 독수리가 들판에 쓰러져 있는 아이에게 다가가는 광경을 촬영하고 그냥 지나쳤던 사진작가가 퓰리처상을 받은 것과 다를 바 없다네. (그 사진작가는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네.) 의과대학 교수가 위급 환자를 수술하려고 해부해놓은 뒤에 제자 학생들에게 환부를 보여주면서 강의하다가 환자를 죽게 만드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네.

하나님께서 창세에 우리 인류에게 일부일처제(一夫一妻制)를 주신 이유는 경건한 자녀를 얻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네.(말라기 2:15)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십계명(十誡命)을 주신 이유는 우리에게 주신 영혼(하나님의 형상)을 지키고 가정을 비롯한 사회공동체를 거룩하게 지키기 위함이었네. 성경(레위기 18장 1~30절)은 근친상간(近親相姦) 12가지를 비롯하여 형부와 처형․처제의 상간을 금지하며, 또한 간음(奸淫)과 동성애(同姓愛)와 수간(獸姦)을 엄금하고 있네. 그런 성적 범죄는 악행이며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만들어졌기 때문에(창세기 1:26~27) 동물이나 버러지와 같이 살지 말라는 것이네. 천륜(天倫)과 인륜(人倫)을 지키라는 뜻이네.

조카의 작품 “채식주의자”에서 형부·처제의 관계 및 장면 묘사는, 아무리 작품의 구성상 필수 불가결한 내용이라 할지라도, 작품의 극히 일부라 할지라도 충분히 비판받을 만하네. 시대가 다르지만, D.H. 로렌스의 소설 “채털리 부인의 사랑”도 그런 가학적이고 변태적인 묘사는 하지 않았네.

나의 어린 시절에 우리의 어머니들이 미혼 딸한테 결혼한 딸 집에 놀러 가지 말라고 당부하셨던 뜻은 무엇일까? 형부와 처형․처제 관계는 인간의 연약함으로 인륜을 깨뜨릴 위험이 있음을 아셨기 때문이네. 우리의 어머니들은 아무리 피곤해도 장성한 아들들이 안방에서 나간 뒤에 자리에 누우셨다네. 그분들은 동방예의지국 백성다운 윤리 의식을 지니고 계셨다네.

소설 “채식주의자”는 혈기 왕성하고 절제력과 분별력이 약한 청소년들에게 읽혀서는 결코 안 된다고 생각하네. 어른들에게도 추천하기가 두려운 작품으로 여겨지네. 노벨문학상 수상 작품에도 나오는 패륜 관계니까 괜찮을 것이라는 왜곡된 윤리 의식과 성 관념을 청소년들에게 심어주고 모방 범죄도 부추길 수 있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성’(性)은 쾌락의 도구이지만 자손 유지를 위한 거룩한 선물이네.(창세기 1:28) 그 선물이 음란하고 난잡한 가학적 변태성욕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을 청소년들이 인식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네. 조카에게 청소년 자녀가 있다면 그런 내용의 책을 그 자녀에게 읽혀도 좋을까? 그렇지 않아도 우리 사회에서 육욕을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성폭행이나 가스라이팅 성범죄, 청소년들의 성범죄 등이 끊이지 않고 있는데, 조카의 작품은 이 시대의 음란한 풍조에 돛을 달아주는 역할을 할 수 있네. 중고생들의 필독서로 선정되는 것은 삼촌인 나도 결사적으로 반대할 것이네. 굳이 그렇게 작품을 구성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다른 방향으로 풀어낼 수 있었을 텐데… 그저 안타까울 뿐이네.

셋째, 조카의 소설 작품 세계에 대한 의견

조카의 대표적인 작품들은 대부분 그 종결이 비극으로 끝나네. 작품을 읽는 내내 어둡고 답답하여 책을 덮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네. ‘카프카’의 소설 “변신”도 그 정도는 아니었네. 내가 29살까지 빠져 있었던 그 짙은 어둠과 절망을 다시 접하는 것 같아서 화가 날 정도였다네. 그런대로 지성이 있고 분별력 있는 독자들은 억지로라도 작품이 주는 교훈을 얻을 수 있겠지만 청소년과 같이 분별력이 약한 독자들은 ‘인생이 다 그런가 보다’ 하고 작품의 세계에 동화할 위험성이 있네. 더구나 노벨문학상 작가의 작품이라고 하니까 조금의 의문이나 비판도 없이 주인공의 인생을 당연한 것처럼 여길 수도 있네. 조카의 작품들은 독자들에게 허무와 절망을 심어주고 가끔 분노를 일으키게 하고 심지어 인생은 살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겨지게끔 만드는 힘이 있네.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출간된 후로 독일을 비롯한 유럽 사회에서 청년들의 자살이 급증했던 것은 대표적인 일이네. 문학은 어디까지나 문학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조카의 작품이 세상을 밝고 아름답게 만들어 가는 데는 역기능(逆機能)을 한다고 감히 말하고 싶네. 사회의 어두운 면과 인간 본성의 악한 면을 까발려 놓기만 했지 미래지향적인 대안이 없다네. 그렇다고 종교성 강한 작품을 요구하지는 않네. 조카가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옙스키’나 ‘톨스토이’ 같은 작가가 되길 바라는 것은 아니네. 이 시대가 아무리 암울하고 악하다고 하더라도 사람은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임을 보여주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러시아의 ‘도스토옙스키’는 나폴레옹 전쟁과 농노 반란 등으로 어지럽고 어두운 시대에도 인생은 살 만한 가치가 있음을 그의 작품들을 통하여 보여주었고, 볼셰비키 혁명으로 피 냄새가 진동했던 러시아의 ‘파스테르나크’도 그랬고, 미국의 대공황이라는 어둡고 힘들었던 시대를 살았던 ‘스타인벡’이 그랬으며, 2차 세계대전에 모국 독일을 떠나 망명하면서 목숨을 부지했던 ‘레마르크’도 그랬다는 것을 잘 알 것이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그런 작가들이 극히 드물다는 게 안타깝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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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은 고통·절망의 역사 속에서 민족의 희망 돼 분열·세속화 얼룩진 한국교회, 다시 영적 부흥을 지난 성과 내려놓고 복음 전하는 일에 달려가며 다음세대 전도, 병들고 가난한 이웃 돌봄 힘쓸 것 말씀으로 세상 판단하며, 건강한 나라 위해 헌신 한국교회총연…

 ‘AGAIN1907 평양대부흥회’

주님의 이름만 높이는 ‘제4차 Again 1907 평양대부흥회’

탈북민 500명과 한국 성도 1,500명 참석 예정 집회 현장과 이후 성경 암송과 읽기 훈련 계속 중보기도자 500명이 매일 기도로 행사 준비 1907년 평양대부흥의 성령 역사 재현을 위한 ‘AGAIN 1907 평양대부흥회’가 2025년 1월 6일(월)부터 11일(토)까지 5박 6일간 천안 호서…

한기총 경매 위기 모면

한기총 “WEA 최고위층 이단성 의혹 해명해야”

한국기독교총연합회(대표회장 정서영 목사, 이하 한기총)이 WEA(World Evangelical Alliance) 최고위층의 이단성 의혹에 대한 해명을 요청했다. 2025 WEA 서울총회 조직위원회 출범을 앞두고 한기총은 13일 입장문에서 “WEA 서울총회 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WEA 국제이사…

김종원

“다 갈아넣는 ‘추어탕 목회’, 안 힘드냐고요?”

성도들 회심 이야기, 전도용으로 벼랑 끝에 선 분들, 한 명씩 동행 해결 못하지만, 함께하겠다 강조 예배와 중보기도 기둥, 붙잡아야 제게 도움 받지만 자유하게 해야 공황으로 섬기던 교회 결국 나와 책 속 내용, 실제의 ‘십일조’ 정도 정말 아무것도 없이 …

한국장로교총연합회 제42회 정기총회

한국장로교총연합회, 새 대표회장에 권순웅 목사 추대

세속의 도전 속 개혁신앙 정체성 확고히 해 사회 현안에 분명한 목소리로 실시간 대응 출산 장려, 청소년 중독예방 등 공공성 노력 쪽방촌 나눔, 재난 구호… 사회 책임도 다해 총무·사무총장 스터디 모임으로 역량 강화도 신임 사무총장에는 이석훈 목사(백석) …

저스틴 웰비 대주교

英성공회 수장, 교단 내 ‘아동 학대 은폐’ 논란 속 사임 발표

영국성공회와 세계성공회 수장인 저스틴 웰비(Justin Welby) 캔터베리대주교가 아동 학대를 은폐했다는 스캔들 속에 사임을 발표했다.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에 따르면, 웰비 대주교는 12일(이하 현지시각) 영국성공회 웹사이트에 게재한 성명에서 “찰스 3세의 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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