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한국외항선교회 50년 (1) 출범 배경과 태동
1974년 7월 4일 공식 창립한
한국형 초교파 토종 선교기관
타문화권 선교, 민간 외교 기여
외항선원 수백만 명 복음 전파
선교사 수백 명, 단기 선교사
1천 명 이상 파송 세계적 단체
한국 최초 자생적 선교단체인 ‘한국외항선교회(Korea Habor Evangelism, Inc., 이사장 김삼환 목사, 총재 이정익 목사)’가 올해로 50주년을 맞이했다.
‘복음 역수출’의 선두주자인 사단법인 한국외항선교회는 50년 전인 1974년 7월 4일 ‘타문화권 선교와 민간 외교 기여’ 두 가지 목적 아래 한국 복음주의 교회 지도자들과 성도들에 의해 창립된 초교파적 토착 선교기관이다.
한국외항선교회는 지금까지 전 세계 외항선원 수백만 명에게 복음을 전했으며, 수백 명의 선교사와 1천 명 이상의 단기선교사를 파송한 세계적인 선교단체로 성장·발전해 세계 선교에 이바지하고 있다.
선교회가 세워진 1974년은 7월 16-25일 스위스 로잔에서 첫 로잔대회, 8월 13-18일 현 여의도 공원(당시 5.16 광장)에서 엑스플로74 부흥대성회가 열리는 등, 세계 선교와 한국교회 부흥에 있어 기념비적인 해였다. 그 해에 한국외항선교회를 통한 타문화권 선교까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한국외항선교회 태동 배경
1973년 인천항 교역 활기에
선원 28개국 2만여 명 입국
제3세계 선원 복음 전파해
그들 지역에 간접 복음 전달
한국교회 부흥과 성장 도모
윤리 지도와 필수품 구입 등
봉사와 친선 활동도 함께해
1973년 인천항에 현대적 갑문식 독(Dock)이 완공되면서, 국제 항구로서 43척의 배가 동시에 접안 가능해지고 최대 5만 톤급 선박이 드나들 수 있게 돼 항만 교역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당시 통계에 의하면, 인천항을 찾는 외항선과 선원들 수는 28개국에서 약 2만 1,000명에 이르렀다. 한국의 점진적 국력 신장에 따른 교역량 증가로 한국 항만에 전 세계 수많은 인종들이 빈번하게 왕래하게 된 현실을 직시하면서, 목회자들은 국내에서도 타문화권 선교가 필요함을 확인했다.
특히 선교사 입국이 제한된 이슬람권, 힌두교권, 공산권 등 제3세계 선원들에게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함으로써, 그들 지역에 간접적으로 복음을 ‘수출’하는 입체적 선교 전략 가능성도 발견하게 됐다. 이와 함께 한국교회의 성경적 부흥과 올바른 성장에 유익을 도모하며, ‘하나님의 선교’에 공헌하고자 했다.
당시 외항 선원들에 대한 교회들의 전략은 크게 선교와 봉사였다. 궁극적 목표는 외항 선원들이 복음을 믿게 하는 일이었지만, 이를 위해 봉사가 선행돼야 했다. 선원들이 거칠고 오랜 항해 끝에 항구에 도착하면, 허전한 심정에 주색과 방탕한 환경으로 빠지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바른 윤리 생활을 위한 지도가 필요했고, 필수품 구입과 일상생활을 위한 안내 및 건전한 오락과 운동 등을 통한 친선 활동을 적절히 준비하면 사전에 사고를 방지할 수 있을 것으로 봤다. 세계 여러 나라에 한국을 널리 알리는 일도 빼놓을 수 없어, 외항선 선교는 당시 꼭 필요한 사역이었다.
이에 예비 모임이 시작됐다. 김의민 장로(예비역 장군) 주선으로 시온감리교회 5대 김용련 목사와 김학수 장로 등 몇몇 교역자들이 기도하면서 ‘(가칭) 외항선 선교회 설립 준비위원회’를 조직하기로 하고, 1973년 1월 초 인천에서 당시 성산감리교회 최준옥 목사와 인천제일교회 원로 이기혁 목사, 인천송도장로교회 이낙주 목사, 인천기독교연합회 회장 김광식 목사 등과 협의해 경인 지역 목회자들로 구성된 ‘창립준비위원회’를 조직했다.
1973년 7월 14일에는 ‘(가칭) 한국외항선선교회 창립 준비위원회 구성을 위한 기도회’를 갖고, 8월 18일에는 김의민 장로 발기로 ‘(가칭) 한국외항선선교회 준비위원회’가 송도교회와 인천 성산교회에서 모였다. 10월 2일 모임에서는 준비위원장에 이기혁 목사, 총무에 김의민 장로를 선출했다.
이듬해인 1974년 7월 4일, 인천시 중구 인천성산감리교회에서 경인 지역 목회자, 장로, 평신도 등 250여 명이 모여 창립총회를 개최, 한국외항선교회가 정식 출범했다. 창립총회 개회예배에서는 최준옥 목사 사회로 곽선희 목사가 ‘선교사 요나’라는 제목으로 설교, 마포삼열 선교사(마삼락, Samuel Hugh Moffett, 1916-2015)와 인천시장이 축사, 홍현설 박사가 축도했다.
창립총회 개회예배에서 설교했던 곽선희 목사가 지난 11월 4일 서울 강동구 명성교회(담임 김하나 목사)에서 열린 50주년 감사예배에서도 설교를 맡으면서 의미를 더했다. 곽 목사는 선교회 이사장을 지내기도 했다.
설립에 공헌한 한국교회 지도자들
초교파적 연합 앞장선 한경직 목사
한국 주요 목회자들 선교로 이끌어
민족복음화 부르짖은 이기혁 목사
아들 이동훈 교수, 손자 이수영 목사
이북 출신 김의민 장군, 북한에 비전
한국외항선교회 태동과 발전을 위해 많은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헌신했다. 1973년 초기 준비위원으로는 이기혁·최준옥 목사, 김의민 장로, 김광식·황성주·이낙주 목사 등이 있고, 1974년 한국외항선교회 태동에는 한경직 목사와 실행총무 최기만 목사가 앞장섰다.
또 교파를 초월해 방지일 목사, 이삼성 목사, 김용련 목사, 황대식 목사, 홍현설 목사, 이한수 목사, 윤창덕 목사, 오영필 목사, 김계용 목사, 김일남 목사, 최동진 목사, 최훈 목사, 정진경 목사, 한병기 목사, 곽선희 목사, 박조준 목사, 림인식 목사, 장자천 목사, 주선애 교수, 이호문 목사, 김삼환 목사 등이 함께했다. 특히 한국교회 최고 지도자인 한경직 목사의 각별한 관심과 도움으로 오늘날 같은 선교회의 성장이 가능했다.
항구를 통해 들어오는 외국 선원들은 가족을 떠나 먼 항해 속에서 거센 파도와 싸우면서 심신이 지쳐 있기 마련이다. 당시 이러한 선원들을 제일 먼저 반기는 곳은 즐비하게 늘어선 유흥업소와 윤락가들이었다. 이로 인해 에이즈(AIDS) 같은 불치병이 확산되는 가운데, 이들을 방치해 ‘도덕적 타락 국가’라는 오명이 붙을 경우 한국교회 역시 책임을 면하기 힘들었다.
이러한 사실을 안타깝게 여긴 한경직 목사는 항만 선교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당시 기준으로는 90년 전 제물포(인천)항을 통해 받았던 복음의 빚을 갚기 위해 ‘복음의 역수출’을 시작했다.
오늘날 한국외항선교회가 장로교를 비롯해 감리교, 성결교, 순복음 등 한국교회 주요 교단들을 초교파로 한데 묶어 함께한 데는, 무엇보다 한경직 목사의 역할이 지대했다고 할 수 있다.
한경직 목사는 방지일 목사를 비롯해 한병기·한명동·김계용·안경운·노진현·최기만·최훈·정진경·림인식·박조준·곽선희·김삼환 목사 등 존경받는 한국교회 지도자들을 선교회 전면에 내세워, 세계 교회를 연합해 섬기도록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민족복음화운동을 처음 주창하고 복음화 운동에 모든 삶을 바친 이기혁 목사(1898-1984)는 당시 인천제일교회 원로로서 한경직 목사와 더불어 선교회 설립의 선두에 있었다. 그는 1974년 7월 11일 제1회 이사회에서 선교회 이사장에 선임됐고, 1975년에 초대 이사장에 선임돼 1980년 4월까지 이를 역임했다.
이기혁 목사는 1898년 12월 28일 평북 용천에서 티어나 1918년 3월 선천 신성학교를 졸업했다. 신성학교는 윤산온(G. S. McCune) 목사가 교장으로 시무한 곳이며, 1911년 105인 사건으로 많은 교사와 학생들이 무고하게 잡혀가 옥고를 치른, 민족주의적 성향이 짙은 학교였다. 그가 복음과 민족 및 국가를 연결시켜 강조한 것은 신성학교 시절에 받은 교육의 영향이다.
신성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선천 명신학교 교사로 있다 1927년 평양신학교에 입학, 1933년에 졸업했다. 1947년 5월 인천제일교회에 부임해 교회를 크게 부흥시키고 한국교회 복음화를 위해 헌신했다. 1962년 제47회 예장 통합 총회장도 역임했다.
이기혁 목사의 후손들도 한국교회와 사회를 위해 큰 영향을 끼쳤다. ‘한국의 슈베르트’라 불리는 그의 장남 이동훈(1922-1974) 교수는 ‘어둔 밤 마음에 잠겨’, ‘가슴마다 파도친다’, ‘캄캄한 밤 사나운 바람 불 때’를 작곡했고, 엑스플로74 대회에서 1만 명의 성가대를 지휘했다. 이동훈 교수는 천재적인 음악성을 복음 전파 사명을 바탕으로 나라를 위해 사용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이동훈 교수는 에스더선교합창단 지휘자로 헌신한 피아니스트 김병숙 권사와 결혼해 장남 이수철 장로, 차남 이수영 목사(새문안교회 담임 역임), 이정희 권사, 이정옥 사모 등 2남 2녀를 뒀다. 이수영 목사는 한국월드컨선선교회 이사로 섬기기도 했다.
이북 출신 김의민 장군은 유엔 주도하에 통일을 이룰 것이라 생각했으며, 사도행전에서 말하는 ‘땅끝’을 북한이라 여기고 북한을 복음화시킬 요원들이 해외 선원들이라 생각했다. 이에 선원들을 양육하고 제자화해 북녘 땅 항구에 입항할 때 복음을 전하게 하는 꿈을 품었다. 그가 구상했던 외항선교회 설립 주목적은 외국 선원들을 통해 북한에 성경을 배달하는 것을 포함한 북한 선교였다.
김의민 장로는 일본에서 항만 선교 모습을 보고 우리나라에서도 그 필요성을 느끼고 돌아와, 한국외항선교회 초기 설립 때 총무로 사역했다. 그가 암으로 소천받은 후, 실무를 담당하던 최기만 목사가 뒤를 이어 총무로 활동했다.
외항선교회의 초기 주요 사역
성경과 전도지 배포 등 복음전도
운동경기, 오락회, 시내외 관광
문병 및 치료, 가족과 서신 교환
우리나라 홍보 활동까지 맡기도
창립 3년 만에 서울 본부 개설해
한국외항선교회가 초기에 펼친 주된 선교 활동으로는 복음전도를 비롯해 성경 및 전도지 배포, 선상 예배 및 육상 예배, 선원 모임 및 선원 집회 등이 있다.
또 친교 활동으로 친선 운동경기 및 영화 상영, 오락회 개최, 시내 및 시외 관광, 선원 대표 공관 및 관계 기관 예방 알선, 외항선교회 대표의 선박 및 회사 방문 등을 진행했다. 기타 주선 활동으로는 문병 및 치료, 주식과 부식 구입, 선원 가족과의 서신 교환, 신문 잡지 및 한국 소개지 전달 등의 활동도 담당했다.
이후 초창기 주요 지도자들의 적극적인 헌신으로 선교회 사역의 전국적 확대가 이뤄져, 먼저 각 지부가 출범했다. 특히 한경직 목사는 국내 저명 목회자들을 동참시켜 한국교회의 전국적 연결성을 만들고 조직체로 거듭나는 데 공헌했다.
선교회는 창립 3년 만에 1977년 4월 26일 서울 본부 사무실을 신촌성결교회 교육관 3층에 두고 본격적 활동을 개시했다. 서울 본부 사무실은 1982년 마포구 선향빌딩, 2003년 서교동 교평빌딩, 2014년 용산 대우월드마크로 옮겼다가, 2023년 10월 현재의 종로5가 한국기독교회관 807호로 이전했다.